예전에는 탈북자라는 말을 썼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때 새터민이라는 말을 쓰자고 했던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


  그들을 실생활에서는 만나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북한을 떠나오기 전에 겪었던 일을 증언한 증언집을 읽으며 북한의 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었다.


 몇 가지가 기억이 기억이 난다. 우선 북한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 월급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대가를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쌀 1kg을 살 정도의 돈이라고 한다. 이들에게는 국가가 다 재워주고 먹여주기에 월급 개념이 없다고 하면 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국가가 줄 수는 없으니... 일하고도 대가를 받지 못하는 생활을 견뎌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


  그러니 북한에서는 직장에 가는 대신에 자신이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고 일정액을 직장에 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직장에서도 그 일을 막지는 않고 오히려 장려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공유지의 비극도 아니고,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상당히 폐쇄적이라고 생각했던 북한에 밀수가 횡행하고 있었다는 사실. 직접 밀수에 참여했던 사람의 증언이 있으니 헛말은 아닐테고...


먹고 살기 힘드니 중국과의 밀수를 통해서 돈을 버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뇌물을 주면 만사가 다 통한다고 하니, 사회주의국가를 표방하는 북한에서 돈(자본)이 최고의 가치로 작동하고 있는 모습에 씁쓸함을 느낀다. 개인의 밀수뿐만이 아니라 국가 밀수도 있다는 증언이 있으니, 세계와 무역을 할 수 없는 북한이 자구책으로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위 보통 국가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어릴 적부터 배운 내용들, 쉽게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대부분의 증언에서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어릴 적부터 들어온 내용이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도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우선 좀 여유가 있는 북한 사람들은 남한 방송을 많이 본다고 한다. 공개적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암암리에 남한 방송을 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 또한 남한에 와서 정착한 사람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그나마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통해 북한의 통제 사회에도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북한에서는 의무적으로 남녀를 불문하고 군대에 가야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증언집을 보면 그건 명시적인 것이고, 돈을 주고 군대에 안 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들의 군대에서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고 보면 되고, 여기에 북한의 대학은 공부를 많이 한다기보다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발판 역할만 한다고... 그러니 대학 성적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수업도 주로 오전에 끝나고 오후에는 노력동원을 나간다는 증언이 많다.


국경을 넘는 일도 예전에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하는데, 요즘은 국경 통제가 강화되어서 예전과 같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국경을 넘거나 밀수를 하는 사람, 남한에서 북한으로 돈을 전달하는 일 등이 완전히 끊기지는 않을 거라는 증언이 있다. 이는 폐쇄된 북한 사회를 개방된 사회로 바꿀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통제되고 폐쇄된 사회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삶이 여유로워져야 한다. 배가 불러야 딴 생각도 할 수 있는 것. 그러니 북한을 개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증언집이다. 


이런 증언을 보라. 


"저처럼 한국에 가족이 있는 사람은 남 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어요. ... 그런데 한국으로부터 돈 받는 사람들은 자기들만 그 돈을 쓰는 게 아니에요. 보위원이 와서 쪼고 담당 주재원이 쪼고 그러니 뇌물을 바쳐야 해요. (중략) '돈은 받아서 쓰되 나라를 반역하진 마라'는 것이죠. 보위부에서도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공공연한 사실이에요." (515쪽)


"그런데 미국도 그렇고 여기 한국도 그렇고 뭘 모르는 게, 제재를 하면 할수록 북한은 핵을 더 만들 거예요.  ... 오히려 풀어 놓는 게 더 나을 거라 저는 생각해요. 제재를 하면 할수록 북한은 더 악에 받쳐서 핵을 더 만들 거거든요. 저는 북한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제재가 해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534쪽)


이와 비슷한 증언들이 많으니 참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일을 위한 발판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 필요가 있으니...


60명이 넘는 북한에서 온 사람들의 증언이 담겨 있는 책인데, 비매품이라 시중에서는 구하기 힘들겠지만,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에 연락하면 구할 수 있을지도... 


책의 뒷부분에 실린 국제사면위원회의 권고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혹시 읽고 싶은 사람은 이 사진을 참조하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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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2-27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주 일요일 방송하는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시청하면 탈북한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북한 주민들의 실상을 더욱 잘 알 수 있어요. 책보다 오히려 더 생생한 증언들이지요.

kinye91 2023-12-27 10:21   좋아요 0 | URL
네. 방송 채널은 모르고 있었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시우행 2023-12-27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즐거운 시간되세요.

루피닷 2024-01-0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kinye91 2024-01-01 07:3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루피닷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시집이다.


  1회부터 10회 수상자의 수장작과 대표시를 모아놓았다.


  이름을 들으면 알 수 있는 시인들... 상을 받아서 유명한 시인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시세계를 갖추고 있던 시인들이다.


  그래도 불교문학상이니, 불교에서 말하는 무엇과 통하는 것이 있으리라.


  무량하다는 말을 찾아보면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라고 되어 있다.


내가 생각하는 불교는 정도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음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헤아리지 아니함을 추구한다고 생각했는데, 무량한 소리라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리라니... 소리가 없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스님들은 간혹 묵언 수행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부처는 수많은 말을 했지만 그 말들은 진리로 향해 가는 수단일 뿐, 말이 목적이 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그래서 말보다는 행동, 또는 마음과 마음으로 뜻을 헤아리는 과정을 중시했다는 생각도 하는데, 시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시도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함축이니 비유니 할 것 없이 시는 다른 어떤 글보다도 짧다. 그 짧음 속에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무량한 소리라는 것은 많은 소리가 아니다. 한 소리에 담긴 수많은 소리라는 뜻이리라. 즉 하나에 담긴 여럿이라는 의미. 하나가 전체가 되는 모습. 그러한 시들이 아마도 현대불교문학상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물의를 일으킨 모 시인을 제외하고, 이 시집에 실린 시들 좋다. 이미 알고 있는 시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시집을 읽으면서 시들에 담긴 많은 뜻을 생각하게 된다.


불교가 속세를 벗어나서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부처 역시 속세를 벗어나 수행을 했지만 다시 속세로 돌아왔다. 


처음의 나가 아닌 깨우친 나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가 추구하는 모습이다. 시 역시 마찬가지다. 시인에게만 속한 시가 아니라, 시인과 독자들이 함께 하는 시들이 사랑받는 시가 된다. 


그런 시들은 사회를 떠날 수도 없고, 또 사회를 떠난 시도 없다.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더라도, 그런 개인의 감정 역시 사회와 관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뭐, 도 닦는 소리는 그만하고, 지금 우리 사회를 떠올리는 시를 한 편 발견했다. 다른 시들도 좋지만, 이 시를 생각한다.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소위 지도층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있어서 문제지만...


제9회현대불교문학상을 수상한 이시영의 대표시라고 실린 시 중 하나다.


     비유의 시


횟집 주인은 일부러 수족관에 상어를 밀어 넣는다

다른 물고기들이 살해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성찰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 동해 인근에도 제국의 전함은 유유히 떠 있을 것이다.

약소국들이 살해의 위협 속에서 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무량한 소리 -제 1-10회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시집, 불교문예출판부. 2005년. 151쪽.


설마? 이런 깊은 뜻으로 정치를 하고 있지는 않겠지... 성찰이 아니라 우리를 위협으로 몰고 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 시인의 시가 '비유의 시'가 되겠지. 


이 시 속에서 너무도 많은 소리들을 들을 수 있으니... 이런 식으로 이 시집에는 '무량한 소리들'이 실려 있다.


그냥 참고로 제1회부터 10회까지 수상한 시인의 이름을 적어본다. 


최동호, 나태주, 정현종, 고은, 최하림, 신경림, 이근배, 정희성, 이시영,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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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고 있는 곳.


  지금이 전부가 아니다. 그 장소에는 수많은 삶들이 거쳐간 역사가 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많은 삶들이 겹쳐져 있는 곳이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이런 삶의 축적으로서의 장소를 서효인이 시로 썼다.


  장소가 시가 된다. 장소에는 사람의 삶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지명이 아니다.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또 삶을 이루고 있는 곳이 바로 장소다.


그런 장소에 대한 시들... 많은 지명이 나온다. 우리가 잘 아는 지명들만 꼽아도 여수, 이태원, 강화, 남해, 부평, 강릉, 목포, 인천, 진도, 평택, 서울, 구로, 안양, 나주, 안성,, 파주, 마산 영광, 철원 등등 많은 장소들이 나온다.


우리가 살아온 장소들. 또 조상들이 살아온, 미래 세대가 살아갈 장소들. 이 장소들에 얽힌 삶들. 그것을 시로 풀어내고 있다.


그 중 '진주'란 도시를 생각해 보자. 진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논개? 남강? 기생? 냉면?


이 모든 것이 진주란 도시에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시인은 진주에서 백정을 떠올린다. 형평사 운동을 되살려낸다. 형평사를 불러오기 위해 돼지고기를 소환한다. 그렇게 시인은 '진주'란 장소에서 많은 것들을 불러낸다.


진주


  지난 주말에는 동네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두 근을 떼서 먹었다. 수육용이요, 비계는 싫어요, 했을 뿐인데 돌인지 고기인지 알 수 없는 돼지가 몸을 털었다. 이번 주말에는 기차를 타고 진주에 갔다. 옆자리에는 지난번 그 정육점 주인이 탄 것 같은데 그때 감히 따지지 못했던 고객으로서의 품위와 권리 같은 것이 떠올라 백정처럼 분해지는 것이다. 진주에 도착할 때까지 분한 마음으로 졸다가, 창밖을 보다가 했다. 왜 질긴 돼지고기를 성토하지 못한단 말인가. 졸리지도 않으면서 눈꺼풀을 닫은 채 진주에 닿았다. 작년 여름에 누구는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다 보기 좋게 실패했다. 돼지고기에 술추렴하며 몸을 털었다. 진주에 도착하니 남강이 보이고 강에서 부드러운 비계 같은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정육점 주인이 날아가고 없다. 어디 갔지? 어디 갔노? 흩어지고 없다. 질긴 고기처럼 입을 다물고 동덩이처럼 자리에 앉아서 전화고 받고 서류도 쓰고 했다. 문득 관광객의  품위와 권리가 떠올라 남강에 몸을 비추어보았다. 때는 1923년이었다. 진주 남강에는 백정들이 모여 운동 단체를 만들었고 그것을 형평사라 했다. 비닐봉지에 든 고기 두 근이 바스락 소리를 내었고, 나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 몸을 털었다.


서효인, 여수. 문학과지성사. 2017년 초판 2쇄. 100-101쪽.


형평사 운동은 성공했을까? 백정 자식과는 같은 학교에 다니게 할 수 없다는 그 완고한 사람들이 있던 시대에... 그들은 평등을 외쳤는데, 21세기에 와서 노동자도 사람이라고 단결할 권리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음에도 노조 결성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또는 노조를 만들어도 무력화 되는 경우가 많은데...


돼지고기에서 시작하여, 진주, 노동조합, 백정들의 단체인 형평사까지... '진주'에 얽힌 이런 삶들을 시인은 우리에게 풀어내 주고 있다.


그렇담 내가 살고 있는 장소는 어떤 삶들이 얽혀있을까? 문득 살펴보고 싶어진다. 지금 내 삶이 그 장소에 얽힌 삶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이런 생각을 들게 한 것만으로도 이 시집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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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우리 이웃(?)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 평범하다는 것, 두드러지지 않다는 얘기인데, 두드러지지 않다는 말은 곧 사회에서 어떤 힘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통한다.


남 위에 군림하지 않고 제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이렇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질문을 하면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물 흐르듯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도처에 물이 흐르는 것을 막는 댐, 보를 설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물 흐르듯 산다는 말이 행복한 삶과 연결이 되겠는가.


지리산 주변에 골프장, 케이블카가 들어온다고 하는데, 이것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겨들어야 하는데... '빌어먹을 멍청이들'(75쪽)


이번 호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다룬 예술가 케테 콜비츠 이야기가 있다. 아들과 손자를 전쟁에 잃은 케테 콜비츠. 약자들과 연대하고, 약자들이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함을 예술로 보여줬던 작가, 케테 콜비츠.


그에 관한 글(나의 아가야, 봄이 왔다)을 읽으면서 힘에 의한 평화를 부르짖는 모 정치인이 생각났다. 힘에 의한 평화, 그래서 나치가 평화를 유지했던가?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힘으로 인해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는 힘을 추구하는 정치인들로 인해서 평화가 오는가? 오히려 긴장과 불안... 케테 콜비츠는 이런 상황을 이미 자신의 예술로 보여줬는데, 과거에서, 예술에서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다 나도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정부 예산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맞다. 정부 예산이 우리 세금이지. 그렇다면 정부 예산은 우리 돈인데... 왜 우리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참여할 수가 없지 하는 문제의식.


<2024년 정부 예산, 656.9조 원 속 노동자>라는 글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정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금은 내가 낸 돈이다. 내게도 이 돈을 어떻게 쓸지, 어디에 쓸지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 정부나 국회가 전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많은 돈에 내가 돈은 일부라고? 허어, 돈의 액수로 따지면 안 된다. 돈의 출처,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 살펴야 한다. 그러면 국민 개개인은 세금의 주인이다. 주인이니 주인답게 세금을 쓰는 용처, 즉 정부 예산에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이게 지나친 발상일까 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직접민주주의가 힘든 현대에,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단체를 통해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어디인가. 세금을 쓰는 일에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단 얘기잖은가. 


'남아공 헌법은 정부예산안을 이중적으로 한다. 하나는 행정부가 마련하는 예산안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예산위원회가 만드는 예산안이다. 민중예산위원회는 남아공의 NGO, NPO,노동조합총연맹,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다. 공공재정이 담아야만 할 국민의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인 것이다. 남아공에서는 이 두 가지 예산안이 마련되면, 서로 조정과정을 거치고 난 이후에 국회의 승인을 받는다.' (20쪽)


이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 최근에 정부는 노조들에게 회계공시를 고용노동부의 노동조합회계공시시스템을 통해서 하라고 했다. 민간(그들이 말하는) 단체를 정부 시스템을 통해서 돈의 사용처를 공개하라고 한 것. 하지 않을 때에는 불이익을 주겠다고, 특히 하지 않는 단체는 기부금 공제를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민간 단체의 회계를 정부가 관리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정부의 회계를 국민들이 관리해도 된다는 말이잖은가. 그러니 이 정책을 뒤집으면 바로 남아공에서 하는 예산안 조정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니, 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정부 스스로 국민들을 대변하는 민간단체들이 정부예산안을 짜는데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것과 그것은 다르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듯하니...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회계를 정부시스템을 통해서 공개한다. 그렇다면 정부예산, 즉 우리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들의 권리인 정부예산안을 조정하는데,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라고.


그래야만 정부가 노동조합에 회계공시를 하라고 한 일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그런 정부가 되길 바란다고...


[삶이보이는창]13호(2023년 가을호)를 읽으면서, 내년 예산안을 그냥 넘길 게 아니라, 국회심의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예산안을 계획하는 데서부터 국민들이 참여해야 함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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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적 지향과 몸의 불일치. 내 몸에 다른 이가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이의 몸에 내가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든 몸에 둘이 있다. 둘은 나와 남이라는 분리 의식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이분법의 세계에서,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일 수도 있다는 너와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은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는 수많은 나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나라는 존재들 사이에 너는 없다. 그러므로 내 몸에 들어온 너는 잘못 들어온 너가 되고, 너 안에 들어간 나는 잘못 들어간 내가 된다.


  과연 그런가? 성적 지향과 몸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 들어간 나, 또는 잘못 들어온 너라고 할 수 있는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 중에, 너도 있을 수 있고, 그런 나와 너 중에는 서로 다른 지향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런 너와 나를 어떻게 한몸에서 융합할 것이냐에 있다. 하나를 내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또 하나가 받아들여 다른 하나로 함께 지내는 일.


이번 시집 제목이 된 '슬픈 게이'란 시에서 통합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부만 인용한다.


1

손바닥에 너의 두 눈 / 내 눈을 빼고 그걸 끼운다. / 코와 입 귀를 지우고 / 너의 코와 입 귀를 덮는다. / 머리카락을 뽑고 / 너의 머리카락을 / 씌운다. // 내 얼굴은 사라지고 / 거울 속에 비친 네 얼굴 / 웃는다 너처럼. / 너무나 생생한 예전의 너의 미소 / 그걸 흉내낸다. / 내 생각이 너의 생각이도록 / 반복하고 반복한다.  // 너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냐. / 네가 되어 너의 삶을 살아가는 거지.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슬픈 게이' 중 부분. 86쪽)

 

쉽지는 않은 일이다. '네가 되어 너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 쉬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슬프다. 하지만 슬프다고 해서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계속 노력한다. 살아가려고, '반복하고 반복한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힘든 일이지만 너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게이 1' 시를 보면 이 점이 더 잘 나타난다.


게이 1


내 몸을 다 / 뒤지고 돌아다녀도 / 내 들 곳은 없어라, 내 몸의 / 벼랑에 서서 생각하느니 / 저 꽃의 몸으로 / 저 바위, 저 파도의 몸으로 / 저 새의 몸으로 / 태어났다면 나는 지금껏 /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 허공 중에 흩어나는 너의 향기 따라 / 나를 던지느니, 저 포말의 몸으로 태어날 건가 / 벼랑의 컴컴한 틈에 아슬아슬히 /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나를 잡아채니 / 너는 내 안의 오랜 나였구나 // 한 꽃 속에 모든 여성이 들어 있고 / 한 여성 속에 모든 꽃이 숨어 있으니 / 나는 내 육체의 경계를 빠져나와 / 네 몸으로의 험난한 벼랑을 기어오른다네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94쪽.


'너는 내 안의 오랜 나였구나'라는 구절을 통해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 중에 너도 있음을, 그래서 너를 추구하는 일이 결코 나를 잃는 일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요즘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성적 지향과 몸의 불일치를 이루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운 경우가 있다. 스스로도 버거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시인은 이를 '게이 4'라는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게이 4


내 몸이 / 내게 맞지 않다 // 몸에 갇혀 /끙끙거리는 / 나 아닌 / 몸 속에 / 다른 이의  / 애타는 / 목소리. // 덜컹거리는 몸에 실려 / 나의 일생을 떠메고 가는 / 잘못 입은 너의 / 몸의 / 쓸쓸한 뒷모습.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98쪽.


여전히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줄 필요가 있을까? 그가 자신 속에 있는 수많은 나와 너들을 받아들이고 '너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 역시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여러모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 준 채호기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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