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그레이트북스 84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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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묶였으면 상당히 읽기 힘들었으리라. 다행히도 출판사가 두 권으로 분리해서 읽기가 그나마 쉬웠다고 할까?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가 1권에 실린 내용이었는데, 이는 상당히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읽기였다. 반면에 2권에 실린 전체주의에 대한 내용은 그래도 우리 시대와 가깝다는 점에서 읽기가 앞부분 보다는 조금 수월했다고나 할까.

 

읽어가면서 이런 전체주의가 과연 히틀러와 스탈린에게만 해당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체주의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묶어버리고(이는 개성이 없는 인간으로 동질화 한다는 말이다), 또한 국가나 민족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국가, 하나의 인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요즘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지만 말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와 동일한 전체주의는 나타날 수가 없다. 이미 최첨단 기기들을 통해 이러한 일들이 불가능해졌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최첨단 기기들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폭력을 통해서, 테러를 통해서, 아니면 강제수용소를 통해서, 커다란 거짓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최첨단 기기들을 통해서 말이다.

 

이미 세상은 국경이 의미없어졌고(그놈의 자유무역협정!으로 관세라는 국경을 철통처럼 지키던 장벽이 사라지고 있으며, 교통수단의 발달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언어도 이상하게 하나로 통일되어 가고 있으며(이게 축복일지, 재앙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점점 정치에서 멀어지고 있으며(정치라는 행위를 하는 순간은 투표용지에 기표할 때뿐이라는 자조섞인 말도 있지 않은가), 자신만의 생각을 잃어가고(세상의 미는 표준이 되어 있고, 질병 또한 표준화되어 있으며, 입고 있는 옷들과 신발, 또 먹는 음식까지 이상하게 개성이 있어야 한다면서, 개성을 말살하고 있지 않은가) 있지 않은가. 인종이야 세계는 하나라는 구호로 뭉쳐지고 있으니, 인종차별은 불가능한 시대라고 보아야 하지만, 인종차별이 없는 대신, 하나의 인종으로 통일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면 더 쉽게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는 운동이 성립하지 않을까? 이거 갑자기 소설 속의 '빅 브라더'가 뛰쳐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빅 브라더'가 존재하는 세상은 이미 전체주의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너무 거창하다.. 그렇담 우리나라는? 아니 바로 우리랑 같은 민족인 저 위쪽에 있는 나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북한 사회를 분석하는 틀로서 아렌트의 이 전체주의 논의가 유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가고 들었다. 물론 차이점도 있지만, 유사점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나라도 국민들을 숫자로 통제하고 있는 면에서는, 그것도 대다수 국민들이 별다른 저항도 없이 그 속에서 안주하고 있으니, 이제는 주민번호라는 숫자뿐만이 아니라, 전자주민증이라는 칩으로 국민을 통제하려고 하니, 도처에 까려 있는 폐쇄회로 테레비전을 보아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개성을 잃지 않았으니, 또한 우리의 언어를 잃지 않았으니 전체주의에 빠져들지 않았다고 위안을 삼는다. 우리는 아직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말이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정치적으로 시작은 인간의 자유와 동일한 것(284쪽)"이니 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시작할 능력이 있으니 전체주의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개성을 없애려고 하는 운동이 전체주의라면 우리는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우리의 인격을 확보해야 하며, 어떤 순간에도 나라는 개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 우리는 전체 인간으로 존재하되, 개별적으로도 존재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개별적 인간, 이는 나와 남을 함께 볼 수 있는 인간이고, 남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인간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인간이다. 

 

그렇지 않고 나를 남에게 맡기는 순간, 전체주의는 한걸음 다가오게 된다. 이를 명심하자.

 

내 멋대로 읽은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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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 1 한길그레이트북스 83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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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사회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소수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다수결 원칙이라고 하는 민주주의 원리라고 알고 있는 제도가 자칫하면 전체주의라는 독재보다 더한 제도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러한 전체주의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장소를 상실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자신의 국적을 상실한 무국적자가 된다고 한다. 이들은 어떠한 저치적 지위도 갖지 못한 집단이 된다. 그래서 인류에게서 추방당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전체주의의 기원을 찾는 노력을 한 사람이 바로 아렌트이고, 이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한 권으로 나왔으면 좋았을테지만,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 두 권으로 분책을 했다.

 

1권에서는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를 다루고 있으며, 2권에서는 전체주의를 다루고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반유대주의에서 찾고 있고, 이를 기초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나게된 과정을 추적하고 있으며, 제국주의가 어떻게 해서 발생했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추적하고 있다. 이러한 추적을 통해서 장소를 상실한 사람들이 어떻게 배제되고 탄압당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배제, 탄압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이 들지 않는가?

 

세계1차, 2차 대전과 심각한 대량학살을 겪고도, 2000년대인 지금에 이르러서도 과연 우리는 이를 극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가능성이 더 많다.

 

얼마나 많은 민족간의 갈등이, 인종간의 갈등이, 종교적인 갈등이 지금도 일어나나고 있는지, 우리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이유는 무엇인가? 다름을 인정하되, 같음을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다름을 낯섬으로 받아들이면, 이 낯섬은 곧 두려움을 유발하고, 두려움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낯선 상대방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움직임이 바로 우리 집단을 공고하게 만들고, 다른 집단을 배제, 탄압하게 하게 되는데...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자연의 위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정복하는 길로 나아갔듯이, 다른 집단에게도 이와 같은 일을 취한다고 한다. 이 책에 의하면...

 

그렇다면 우리는 낯선 존재를 봤을 때, 우선 낯선 존재에게서 다름을 찾기 보다는 같음을, 비슷함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같음을 전제한 다름은 함께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함께함은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인정한 상태에서 자신의 전존재를 거는 모험이 될 수 있는데, 이를 실행하지 않으면 배제, 탄압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반복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인류는 지난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상태가 될텐데...

 

전체주의를 국가간의 문제들로만 보지 말고, 한 국가안에 있는 다른 집단들과의 관계로도 살펴보면 과연 우리는 전체주의를 벗어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 질문을 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전체주의를 견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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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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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했다고 하지,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드러나게 된다고. 가끔은 그래서 얼굴이 험악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자체도 험악하겠다고 지레 짐작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우리는 그가 그 자신의 모습에서 악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지만 막상 그 사람 얼굴을 보면 그냥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일 경우가 많지 많았던가.

 

억압을 일삼는 독재자들도 자신의 집에서는 다정한 사람이듯이, 악은 그렇게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아니, 보통 악은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악은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지금은 흔하게 쓰는 이 말이 처음에는 아마도 충격이었나 보다. 그래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책이기도 하겠고.

 

여기서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악의 평범성을 대표하는, 생각못함과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없음의 전형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이는 이미 과거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렌트가 이야기하듯이 인류의 역사에서 한 번 일어난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자신은 옳다고, 법과 명령에 의해 성실하게 일할 뿐이라고 하지만, 그 성실이 결국 다른 사람들, 그리고 이 지구에 해를 입히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많지 않은가.

 

언제고 어디서고 적용될 수 있는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우리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아니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 대신에, 생각못함과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없음이라는 이 두 말을 사용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지구에, 인류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또는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했을 대 옳은지, 옳지 않은지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아이히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 때, 하나하나의 기술들이 단지 어느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 지역에서의 문제가 지구의 문제가 되는 이 때에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지구적인 관점과 인류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이히만은 또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를 다만 법, 규칙과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라고만 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할 것인가.

 

자신의 일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싶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 자신의 업무(?)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충실하게 임한 사람이 인류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아렌트의 글들이 대부분 어려운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쉽다. 아마도 재판의 기록으로서, 보고서 형식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많은 생각할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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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위기 - 정치에서의 거짓말.시민불복종.폭력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17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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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다. 우리는 공화국에 산다. 그런가?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 한다. 공화국에서는 국민들은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하며, 자신의 정치적인 참여를 제약받지 않아야 한다. 표면상으로, 우리나라는 헌법이라는 권력 유지 체제를 지니고 있어서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공화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으며,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부정과 부패에 연루되어 있고, 탈법에 범법까지 자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위임받은 권력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아, 국민들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그렇다고 폭력 상황으로 나아갔냐면 그것은 아닌데, 연일 폭력이라고는 학교폭력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정치권력이 붕괴되고 있는 지금, 학교폭력을 다루면서 정치권력의 붕괴를 희석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의 눈길이 가기도 한다.

 

이 때 아렌트의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왔다.

 

"자신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가 반대하지 않을 때는 일단 자기가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아렌트가 이의를 제기할 권리를 말하고, 이를 집단적으로 말할 때 시민불복종이 된다고 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권력을 쥐고 있는 집단은 우리가 동의한다고 여기고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 애쓸 것이다. 그러니 그건 내 양심에 맞지 않아 하고 속으로만 불평해서는 안되고, 이를 행위로 나타내야 한다. 이처럼 시민불복종은 결코 양심의 운동이 아니며,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행사하는 행위에서 나오는 권력이라고 한다.

 

그렇다. 양심이 아니라 행위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아니면 벌어졌던 수많은 행위들은 -촛불부터 희망버스, 희망비행기, 하다못해 삼보일배까지- 나 자신의 양심 선언이 아니라, 우리들의 시민불복종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한가지가 빠져 있단 생각이 든다.

 

그 무엇은, 이 생각들이 우리들의 양심에 의해서 행위한다가 아니라, 우리의 이런 행위들이 하나의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이를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집단의 의견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행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행위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행위들은 단발성으로 끝나고, 결코 사회를 변혁시키지 못하게 된다. 아렌트의 시민불복종이란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면 그렇게 된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서는 이러한 변혁을 추동할 집단이 없다는 점과, 그리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젊은세대의 부족이 원인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이 책 마지막 부분에 실린 아렌트의 말

 

"대학은 젊은이들이 수년 동안 모든 사회적 집단과 사회적 의무에서 국외자의 입장에 서게, 즉 진실로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말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민불복종이 사회변혁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대학은 학생을 자유롭게 해주지 못하고, 학생을 자본의 틀에 얽매이게 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가장 자유로울 세대가 가장 자유롭지 못하다는 역설이 성립하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권력의 누수가 심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대체 권력은 형성되고 있지 않다. 준비된 집단이 없다는 말과도 같은데, 이렇게 시간이 흐른다면 이 사회는 어느 정권이든, 권력이 새는 상태로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으리라.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꿈꾼다면, 그것은 개인에게서가 아니라 집단에게서이다. 이를 명심한다면, 이 책의 1부에서처럼 정치권 자신도 자신들이 속고 있는 상황일테니, 우리가 현실을 바로 보는 태도를 지니고, 우리라는 집단의 의견을 형성해서 이를 관철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얼마나 좋은가? 이미 우리는 너무도 좋은 수단들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이 책, 특히 시민불복종 부분, 참조할 사항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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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한길그레이트북스 11
한나 아렌트 지음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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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책이기도 하고, 인간의 삶을 조건지우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책이기도 하다.

 

유명한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노동, 작업,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세가지 조건이라고 한다. 여기에 사유니 관조니 하는 다른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활동적 삶이라고 하는 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는 노동, 작업, 행위가 주요 요소로 나오고 있다.

 

노동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에서, 필연성에서 도래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자유를 느낄 틈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을 한다. 여기에 자유가 개입할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노동은 순환적이다. 이는 자신의 후손들을 생산하는 데서, 즉 다산성으로 나타난다. 노동의 필연성이 다산성을 유발하고, 이 다산성이 인간의 조건을 형성한다.

 

그러나 죽음의 존재들은 불멸을 꿈꾸기도 한다. 아니 꿈꾼다. 의식이 있는 존재가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았을 때, 그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생각이 없는 존재, 즉 사물에 불과하다. 그러한 불멸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작업이다. 자신이 생산물을, 즉 노동에서처럼 한 번 사용하면 사라지고 마는, 그래서 사라져서 순환성을 일으키는 노동 생산물이 아니라, 순환성을 깨는 불멸성을 지니는 대상을 창조하는 노력이 바로 작업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꿈꾸며 자신의 현존을 후대에게도 알리고 싶은 욕구가 바로 작업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과 작업은 결국 생산물에 관계하고, 이는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공론 영역, 즉, 공적인 영역이다. 이 공적 영역을 정치 영역이라고 할 수 있고, 정치 영역을 구성하는 인간의 조건이 바로 행위이다. 이 행위는 자신의 존재 전체를 던지는 용기가 필요하고, 이 용기는 바로 자유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또한 이 행위는 바로 나와 같은 남을 전제로 해야만 하기 때문에, 행위에 대한 용서와, 남을 의식한 약속 이행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고 한다.

 

나와 남이 관계를 맺어가는 공간에서는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용서와 믿음이 필수적이라고 하는데, 이를 행하는 공간이 바로 정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삶을 유지하는 공간이 아닌, 실존적인 삶을 영위하게 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략 정리를 하면 노동과 작업은 개인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이를 사적 영역이라고 하자. 행위는 공적 영역, 요즘 말로 하면 사회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태어남이라는 기적을 지닌 인간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요소로 노동과 작업을 지니고 있다면, 같은 기적을 지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간적 삶을 유지하는 요소에는 행위가 있다.

 

이러한 행위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노동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는 사태가 지금의 현실이고, 우리는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유의 힘을 필요로 한다. 노동이 행위를 전복시키고, 노동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 이유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지만, 이에 몰입하다보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자유를 상실하고, 필연성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바로 이 현실을 직시할 정신의 힘, 아렌트가 나중에 전개하고자 했던 사유, 의지, 판단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인간의 활동적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므로, 노동, 작업 ,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다.

 

쉽지 않은 책이고, 어떻게 이해해야 잘 이해했는지 알 수 없는 책이다. 많은 부분이 그리스 철학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근대 철학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핵심을 잘 잡아내기 힘들다. 철학적 소양이 부족한 나에게는 말이다.

 

다만, 그냥 내 맘대로 이해하고, 이를 내 삶에 적용시켜야지 하는 생각으로 끝까지 읽고 나간 책인데...

 

과연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일까...지금, 우리 시대에 어떤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인간적인 삶을 향유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든 책이다. 그리고 그런 고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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