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동양문화산책 4
사라 알란 지음, 오만종 옮김 / 예문서원 / 199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직도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유교이다. 유교를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철학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유교는 우리의 생활 깊숙히 들어와 있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활을 제약하고, 규정짓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제사일 것이다. 제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짓는, 사람들의 삶이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 연결을 예라는 형식을 통해 발현시키는 것은 유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유교의 대표자는 공자와 맹자이다. 이들이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 위해서 어떤 개념을 동원했을까? 이 책은 여기서 출발한다. 단지 유교만이 아니라 도교까지도 언급하면서, 유교와 도교에 나타는 물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왜 도교까지 포함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사상들이 만개한 때는 춘추전국시대이고, 그 시대에 제자백가라고 해서 많은 학파들이 나왔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학파는 유가와 도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펼치는 개념으로 또는 대상으로 물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고대사상에서 '물'을 언급한 사상가로 유가와 도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가의 대표자는 공자와 맹자이고, 도가의 대표자는 노자와 장자이다. (장자는 노자와 다른 사상가로 분리하려는 움직임도 있으나, 통상적으로 노장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함께 묶고 있으니 여기서는 노자와 장자를 도가로 엮는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여기고 있다.)

 

왜 이들은 '물'을 중시했을까? 사상을 펼치는데 사상은 철학으로 개념이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추상적인 개념을 그냥 펼쳤다가는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는데 실패하고 만다.

 

예수도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 쉬운 비유들을 많이 들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공자와 노자도 자신들의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추상적인 개념을 대체할 다른 개념을 찾아내었으리라.

 

그것이 바로 '물'이다.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물. 우리는 물이 없으면 죽고, 또 고대사회는 물을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했기에, 물은 가장 쉽게 접하는 대상이고,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물'의 속성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펼친다. '물'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든지, '물'처럼 맑고 깨끗해야 한다든지, '물'처럼 포용적이어야 한다든지 하는 비유를 들어 자신들의 사상을 펼친다.

 

이것을 이 책의 저자는 '뿌리 은유'라고 한다. 은유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개념으로 대체하는 비유라고 하고, 뿌리라는 말은 근본이라는 말이니 '뿌리 은유'는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라는 뜻이 될 터이다.

 

그리고 이런 '뿌리 은유'로 '물'을 들고 있다. 결국 우리는 '물'의 속성을 알면 그들이 어떤 사상을 펼쳤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와 개념체계가 다른 서양 사람들에게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업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물'로 이들 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유교와 도교의 '물'이 차이를 이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유교의 '물'은 넓고 깊고 크다. 이들은 왕도정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다. 그래서 공자나 맹자에게서 '물'은 '우'와 함께 등장한다. '우'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물길'을 바로 잡은 사람 아니던가. 물길을 바로잡아 물이 제 길을 가게 하고, 사람들이 제 삶을 살게 해준 사람 아닌가.

 

이렇게 유교에서 '물'은 행동과 함께 나온다. 마치 작은 물길들을 모아 큰 물길을 만들고, 서로 떨어져 있던 물길을 터서 연결시키는 그런 행동이 군자의 길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유교에서는 행함이 있기에, 그 행함을 유지시켜주는 틀과 형식으로서의 '예'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반대로 도교에서 '물'은 그냥 놓아둠이다. 물길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물길을 서로 트고 합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물은 흘러간다. 제 갈 길로. 거기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행동을 할 필요가 없으니 틀과 형식인 '예'가 필요없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이런 차이가 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4대강 사업이다, 경인 아라뱃길이다, 뭐다 하면서 물길을 트고, 합치고, 연결하는 일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물의 본성을 살리는 행동을 한 것이 '우'가 한 일이라면, 우리가 한 일은 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 아니었던가.

 

물의 본성을 거스르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유교와 도교의 공통된 사상이니...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유교나 도교를 스스로 배반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유교와 도교를 '물'로 엮어 주장을 펼쳐나가는 것에서도 감탄하였고... 지금 우리의 삶을 '물이 본성'에 비춰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주팔자는 타고 났다는 말을 한다. 당연한 말이다. 자기가 태어난 년월일시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긴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태어나는 날을 조정하기는 하지만, 이미 태어났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데 타고 났다는 말은 바꿀 수 없다는 말과 같지 않다. 사람들이 이 두 말을 같은 말로 쓰고 있는데, 타고 났다는 말은 이미 그랬다는 과거형을 뿐이라면 바꿀 수 있다/없다는 말은 지금이라는, 얼마든지 유동적인 현재형이다.

 

과거형으로 현재를 규정지으려는 것이 바로 운명론이고, 이러한 운명론을 사람들을 우매하게 만들어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고 만다. 자기의 운명이 정해졌다는데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운명론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이 아마도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아닐까 싶은데, 자신의 사주를 믿고 평생을 그대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과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살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운명이란 이미 타고 났지만, 그 타고 남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쪽으로 사주를 해석하고 활용하는 것이 '사주명리학'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사주명리학을 활용한다면 사주명리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점집에 가서 점치는, 그 점대로 하고, 또 부적을 받아서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자세를 지닐 필요가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사주명리학은 운명론이나 미신이 아니라 철학이고 인문학이다. 우리가 살아갈 길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이다. 이정표대로 따라가든 아니든 그것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즉, 운명에 대한 삶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

 

운명이 그러니 내가 이럴 수밖에 없어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포기했음을 나타내주는 말일 뿐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천지의 기운을 자신의 몸에 받은 것은 당연한 일. 그것이 기질을 형성하는 것도 당연한 일. 그러나 사람은 단지 주어진 것을 따라만 가는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주를 행위를 통해서 또다른 관계로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존재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관계론이라는 얘기다. 우리의 운명은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는 얘기.

 

하여 자신의 사주를 명확히 알 필요는 있다. 사주를 명확히 알고 자신이 추구해야 할 관계를 파악한 다음에 행위로 나아간다면 자신의 운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 된다.

 

이 책의 부록에 사주가 단지 8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밝혀놓고 있다. 사주의 경우의 수를 20,736가지, 천간까지 합쳐 계산해 보면 팔자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12,960,000가지(280쪽)라고 한다.

 

천이백만분의 일. 이것이 내가 지닌 팔자다. 여기에 내가 스스로 관계를 통하여 만들어가는 팔자까지 생각해 보면 경우의 수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팔자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팔자는 타고 났지만 결코 정해지지 않는다. 팔자는 유동적이다. 팔자는 관계지향적이다. 관계를 통해서 팔자는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다. 때문에 팔자는 만들어진다. 팔자는 곧 내 행위를 통한 삶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아는 것. 모든 것은 앎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이것을 바탕으로 실천으로 나아가 관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 된다.

 

하여 운명은 길이다. 우리가 다양한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길. 이 길에서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는 운명의 길이 달라진다.

 

이렇듯 미신이라고 도외시하고 있었던 사주명리학이 단순한 미신이 아닌 삶에 대한 철학, 인문학이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가겠다” - 고병권이 만난 삶, 사건, 사람
고병권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으며 거리의 인문학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되었고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인문학 하면 뭔가 심오한 철학을 연상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무언가 특별한 지식을 얻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지레짐작하고는 인문학에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인 고병권은 인문학은 우리의 삶에서 멀어지는 학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이라고 한다.

 

그가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전혀 인문학과 관계가 없을듯한 사람들과 인문학을 통하여 만나면서 그는 인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우리 삶에서 인문학을 발견하는 점에 중점을 둔다.

 

즉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앎을 참조하는 질문'이 앎을 앎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면, 우리가 흔히 만나는 장삼이사들은 '삶을 참조하는 질문'을 하는데, 이런 질문은 곧 삶을 앎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먼 얫날 철학자들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앎이란 곧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곧잘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이 된다.

 

삶이 되지 않는 앎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대학 강단에서 고담준론을 논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과 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잔치에 불과하게 되지 않겠는가.

 

정녕 인문학은 이러한 강단 철학, 강단 인문학이 아니라, 삶과 밀접히 관련이 되어 있는 거리의 인문학, 삶의 인문학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경험한 일들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통하여 우리는 인문학이 우리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이야기한 몇가지 개념이 머리 속에 계속 남아 있다. 바로 "빵과 장미"라는 말인데, 우리에게는 빵도 필요하지만 장미도 필요하다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외침이 바로 그것이다.

 

생계를 보장하는 활동만이 아니라, 삶을 삶이게 하는 어떤 요소들을 필요로 한다는 말, 인간에게는 밥만이 아니라 바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오도엽이 엮은 "밥과 장미"라는 책도 있듯이 인문학은 바로 이러한 소수자들에게 그들에게 주어질 것은 시혜가 아니라 함께 함이라는 사실, 그들이 이 사회를 바르게 보고, 자신의 삶을 직시하며,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장미'라는 개념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논의에 비추어 "옹이"란 말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톱질이나 대패질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리라. 옹이가 얼마나 단단한지. 그 옹이를 벨 때 얼마나 힘이 드는지. 옹이가 나무가 겪은 상처라고 한다면, 나무의 상처는 너무도 단단하고,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지니게 되는데...

 

그러나 그 흔적이 단지 상처로만 남지 않고 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옹이라는 사실. 나무에 있는 옹이는 얼마나 멋진 무늬로 남을 수 있는지, 옹이를 옹이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알고 있다.

 

이렇게 옹이를 상처가 아닌 무늬로 바꿔주는 힘.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거리의 인문학. 그것은 상처를 상처로 인정하고,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해주는 일회성 처방이 아니라, 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이되, 상처가 무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하여 이 책을 읽어가면 온갖 상처가 나오지만, 그 상처가 상처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들의 상처를 직시하며,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이 인문학을 통하여 상처를 무늬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그래서 '철학은 앎이지만 또한 행함'(15쪽)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인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때, 정말로 우리를 살리는 것은 인문학임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
이광호 지음 / 홍익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 중기 35년의 차이를 두고 두 학자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만난다. 조선 중기 유학사에서 활짝 꽃이피는 순간이다.

 

우리나라 지폐에도 나와 있는 두 인물은 유학사에서도 큰 자리를 차지하는데, 율곡이 퇴계를 찾아가면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나눈 시와 편지가 남아 있어 우리들에게 그들의 사상에 대해서 알려주게 된다.

 

35세 연상인 퇴계는 율곡에게는 스승과 같은 존재인데, 율곡은 편지를 통해 퇴계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퇴계가 하는데, 이들의 논의가 지금 내 수준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번역의 문제도 아니고, 이는 유학 개념에 대한 지식의 부족 때문일 수가 있다. 이들은 중용의 몇 구절, 또는 중국 학자의 학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에 이들의 논의를 따라가기엔 너무도 벅차다.

 

다만, 이들이 이런 편지들을 통하여 어떻게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나가고 있는지, 과연 접점은 없었는지를 살펴볼 뿐이다.

 

뒤로 갈수록 이 책의 해설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퇴계와 율곡은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율곡이 묻은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가만 보면 자신의 의견을 고쳤다고 보기는 힘들고, 퇴계 또한 몇몇 부분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틀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

 

범속하게 분류를 하면 퇴계는 주리론(主理論)에, 율곡은 주기론(主氣論)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퇴계는 영남학파, 율곡은 기호학파라고 할 수 있을텐데...

 

주리론이 서양의 관념론에 가깝다고 한다면, 주기론은 서양의 경험론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이들은 서양의 역사에서도 늘 평행선을 그리며, 때로는 만났다가도 또 평행선을 그었던 철학 사조 아니었던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주기론에서 이야기하는 기(氣)역시 서양에서는 관념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다만 실천적인 활동을 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기가 허약해졌다고 말할 때 기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활동을 하고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비해 리(理)는 이런 기보다도 더 추상적인 무엇이니, 그것은 유학에서 말하는 태극과도 통하는 것인지...우리 삶의 원리라고 해야 하는지.

 

해설을 보면 퇴계는 유학의 진리에서 철학을 하고 있고, 율곡은 실천의 차원에서 철학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현실정치에서는 율곡이 더 힘을 발휘했으리라는 것은 이들이 이와 기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퇴계가 죽을 때까지 편지를 주고 받는다. 비록 그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율곡은 퇴계를 학문에서는 자신보다 앞선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퇴계 역시 능력있는 젊은이인 율곡에게 학문의 진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으리라. 이런 만남. 이런 관계. 그것이 우리나라 유학을 꽃피우게 만든 동력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퇴계는 기고봉과도 편지를 통해서 논쟁을 하게 되니... 다양한 논쟁을 통해서 문화는 더욱 융성해지고, 생각은 더욱 정교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말을 막아서는 안되고, 생각을 막아서는 안된다. 말과 생각은 터뜨릴 수 있게 해줘야 하고, 이런 말들과 말들이, 생각과 생각이 서로 부딪치면서 좀더 좋은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이 책에 시사하는 바가 아닐까.

 

조선시대에도 그랬는데, 지금 민주화된 시대에는 이런 일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단지 퇴계와 율곡의 사상이 어떻다, 어떤 지점에서 차이가 나고, 나는 어느 편에 더 마음이 간다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런 토론이 우리 사회에서도 자연스레 일어날 수 있게 해야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이것이 책을 읽는 의미를 살리는 길이 된다.

 

우리의 전통 철학에서 많이 멀어져 왔다. 가끔 옛 성현들의 글을 읽기도 하지만,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어렵다. 좀더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도록 이렇게 번역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 - 사유의 스승이 된 철학자들의 이야기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밤 하늘에 하늘을 쳐다본다. 별이 보이지 않는다. 별이 존재하지 않지는 않을텐데... 도심에서는 웬만해서는 별을 볼 수가 없다.

 

별보다도 더 밝은 빛들이 이 땅에 너무도 많이 있다. 저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던 옛시대를 지나 이제는 별보다도 더 밝은 빛들이 우리를 현혹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빛나는 별들을 보며 우리는 길을 잃기 일쑤다. 길을 잃지 않고 제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길잡이 별을 찾아야 하는데...

 

루카치가 말했던 창공의 별을 보고 길을 갈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감상은 이제 옛말이고, 우리 자신이 이 땅의 별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이 때 길잡이 별 노릇을 해주는 사람들이 바로 철학자다.

 

시대를 통해 변함없이 철학자들은 자신의 세계를 해석하려 했으며, 또한 변혁하려고도 했고, 세상과 인간에 대해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인간의 의식에 대해서 끝없이 질문하고 해답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이다.

 

현대에 들어서 세상은 급변하고, 과학기술은 더없이 발전해서 철학자들의 역할이 없어질 것 같았으나, 이런 시대일수록 길을 잃기가 쉽기 때문에, 길잡이 별 노릇을 하려는 철학자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사유의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 그 모험을 통해 우리에게 길을 보여준 사람들.

 

이 책은 그런 철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처음 시작하는 철학"이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철학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이 책은 현대, 즉 20세기의 주요 철학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 철학의 핵심과 그들 삶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해서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철학에 대해서 처음 접하는 사람, 또 자신의 삶에 대해서 사유하기 시작하고, 자신을 밝혀줄 길잡이 별을 찾는 사람에게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철학자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고, 현대 철학자 중에서 현대철학의 한 기점을 마련한 사람들과 또 글쓴이가 좋아하는 철학자를 중심으로 20명을 뽑아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처음 나온 책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철학자들의 사유와 삶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자신에게 길잡이 역할을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철학자가 있다면, 그 철학자에 대해서 소개되어 있는 책들을 더 찾아 읽으면 된다.

 

그런 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책이다.

 

참고로 여기서 다룬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베르그송, 제임스, 프로이트, 러셀, 후설,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아렌트, 콰인,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카뮈, 간디, 알튀세르, 레비스트로스, 들뢰즈, 푸코, 레비나스, 데리다, 하버마스

 

이 중에 이름을 들어본 철학자도 있고, 처음 듣는 철학자도 있는데, 그리고 철학자라기보다는 정치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문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의 사유가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온 것은 사실이고,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 다를 공부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마음에 와닿는 사람은 한 번쯤은 공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게 바로 이 책의 목적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 그것은 내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는 순간이고, 내 인생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길잡이 별을 찾는 순간이다. 이 땅의 수많은 가짜 별들에게 길을 잃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갈 수 있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