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파문 - 노자, 아나키, 꼬뮌
신철하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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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파문. 이 제목만 가지고는 도무지 노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노자 하면 무위(無爲)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런 노자를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그 사랑이 퍼져 나가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둔 사상을 노자의 사상이라고 정리한 저자의 노자 읽기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하긴 철학(philosophy)이라는 말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미라고 한다면, 그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치사상이라는 것에서 사랑이 빠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출현한 시대는 춘추전국시대이고, 그 시대는 조화가 무너지고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침범하는 시대 아니었던가.

 

이 시대를 이겨내는 사상들은 바로 사랑에 바탕을 둔 사상들이 아니었을까? 이 점에서 제자백가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상들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바탕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무엇에 대한 사랑일까? 단순한 지식에 대한 사랑? 그것은 아니다. 지혜란 단지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 수 있는가를 아는 것 아니겠는가?

 

잘 살아간다는 것의 기본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이 어떻게 실현되느냐에 따라 각 사상가들이 달라지고 있는데...

 

노자는 기본적으로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거대한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부정하고 자치를 주장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주장을 좀더 밀고 나가면 노자는 결코 춘추전국시대의 통일을 (노자가 살던 시대는 춘추시대니 주나라 중심의 통일을) 바라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는 중앙집권적인 거대 통치국을 바란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마을에서 스스로 생산하고 소비하며 서로 돕고 사는 상부상조의 작은 공동체를 바라고 있으니, 오히려 춘추시대에 서로의 영토를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노자가 어떤 주장을 했느냐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보다는 지금 이 시대에 노자의 주장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또 어떻게 노자의 주장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좋다는 쪽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노자 사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도덕경의 다른 해석본과 저자의 해석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그런 해석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사랑에 기반을 둔 작은 공동체들의 연합,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남북의 긴장이 완화되어 평화적으로 교류 되어야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지방자치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방자치가 지금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노자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고, 이런 점에서 아나키와 코뮌을 노자의 사상과 연결지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또 플라톤을 비롯한 서양의 여러 사상가들의 사상, 그리고 우리나라 소설들에 나타난 상황들을 종합하여 노자의 사상을 적용하고 있는 책이라고 보면 된다.

 

단지 노자의 사상을 먼 과거의 사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적용할 수 있는 사상, 그것도 남북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노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지방자치제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가 노자의 사상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사랑의 파문'이다. 노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이 멀리멀리 퍼져 나가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면 우리 사회가 좀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저자 나름대로 소화해서 우리나라 현실에 적용시킨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도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덧글

 

책을 출판사에서 보내주었다. 노자의 도덕경을 다르게 해석하는 법, 또 책을 자신에 맞게 소화시키는 법. 다양한 책들과 융합시키는 법을 보여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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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논어에서 얻은 것 - 삶이 흔들릴 때 나를 잡아주는 힘
사이토 다카시, 박성민 / 시공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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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교 교육에 대해서 생각하면 이런 말이 먼저 떠오른다.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

 

이상하다. 교육의 목표는 말과 행동이, 지식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이끌어내는 일일텐데, 왜 자꾸만 우리나라 교육을 생각하면, 특히 교육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언행이 불일치되고, 지식과 행동이 반대로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지.

 

우리나라 교육의 목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찾아보지 않아도 분명히 민주시민 양성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일테고, 민주시민이란 남을 배려하면서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일텐데...

 

지금 사회가 돌아가는 꼴을 보라. 많이 배운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이용해서 어떻게 이득을 얻는지, 자신들의 지식을 이용해서 어떻게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지.

 

그래서 우리나라 교육의 핵심은 철저한 "언행불일치"이지 않을까 싶다. 언행이 불일치 하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 호의호식하면서 남들 위에 군림하고, 언행이 일치되면 낙오되는 현실. 씁쓸하지만 이것이 지금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이러니 학생들은 오로지 대학이라는, 그것도 명문대라는 곳에 진학하기 위해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도덕, 윤리? 이것은 교과서에만 있는 말이다. 언행일치, 지행일치. 시험 문제에서 정답을 고를 때만 쓸모있는 말이다. 

 

명문대학에 들어가거나 바른 삶을 살 때 이런 말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냥 교과서와 함께 버려지고 마는 말이다. 이게 바로 교육의 현실이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제목이 "내가 논어에서 얻은 것"인데...

 

"논어(論語)"라는 책은 공자의 말을 적어놓은 책이고, 동양고전이며 사서삼경 중의 하나라는 기본적인 지식에다, 우리나라에서 학교 생활을 했다면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易說乎 -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이 등장하는 책이지 않은가.

 

동양 최고의 성인인 공자의 말을 모아놓은 책, 그 책의 첫부분이 바로 배움으로 시작한다. 그런 배움이 곧 교육이었고, 공자는 말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단지 말뿐이었을까?

 

공자의 말은 곧 행동이었다. 공자의 말은 공자 자신이었다. 공자의 삶이었다. 공자에게서 말과 행동은, 지식과 행동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유학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었다. 공자와 제자들, 고대의 학교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장소, 만남, 교육들은 실천을 바탕으로 한다. 단지 번드르한 말, 자신의 출세를 위한 말, 남을 누르기 위한 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논어에서 배운 것"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우리나라 교육현실이 생각이 났고, 일본에 유학을 전파해주었다고 큰소리치는 우리들이 정작 유학에서는 멀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논어"는 삶을 다룬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이것이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서 묻는 제자에게 삶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느냐고 했고, 안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얘기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바로 현세의 삶, 교육과 삶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이고,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알게 된다면 자신의 삶에서 자신이 실천하는지 하지 않는지도 안다는 것이다. 실천하지 않은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라는 얘기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이 책 "논어"가 수천년이 흘렀음에도 지금까지 우리에게 읽히는 것이다. 우리 삶을 되돌아보고 바른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에는 논어의 원문이 나와 있지 않고 (번역문만 있다) 또 논어 전편이 실려 있지도 않지만 대학교수인 자신이 "논어"를 읽으며 느꼈던 점, "논어"에서 우리 삶에 참조할 만한 내용들을 골라 싣고 있다.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도록 ("논어"를 원문인 한문으로 수록하면 그것을 읽어낼 사람은 별로 없고, 또 그냥 해석만 해도 역시 "논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은 현실에서 누구나 "논어"를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이렇게 썼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그에 해당하는 "논어" 구절을 현대어로 풀이해 함께 보여주고 있다.

 

"논어"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을텐데, 이 책에 실린 내용 말고도 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음은 물론이다. "논어"를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에게 "논어"라는 책이 아스라이 먼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삶을 풍부하게 해줄 수 있는 지침서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덧글

 

조금 아쉬운 점은 일본인 저자라서 일본의 예를 들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 우리의 정서와는 조금 안 맞을 수도 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이 맥아더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때는 "논어"와 같은 고전을 읽은 사람들이어서 그랬다는... 그렇지만 그들이 군국주의로 가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했는지... 그것은 "논어"를 제대로 읽어냈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한계는 우리 관점에서 잘 정리하면서 읽으면 될 테다.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었다. 손님처럼 집으로 온 책은 언제나 반갑다. 그리고 고맙다. 덕분에 잘 읽었다. 나는 언행일치, 지행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가 반성하면서 읽은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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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노자, 그들은 물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동양문화산책 4
사라 알란 지음, 오만종 옮김 / 예문서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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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유교이다. 유교를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철학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유교는 우리의 생활 깊숙히 들어와 있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활을 제약하고, 규정짓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제사일 것이다. 제사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짓는, 사람들의 삶이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 연결을 예라는 형식을 통해 발현시키는 것은 유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유교의 대표자는 공자와 맹자이다. 이들이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 위해서 어떤 개념을 동원했을까? 이 책은 여기서 출발한다. 단지 유교만이 아니라 도교까지도 언급하면서, 유교와 도교에 나타는 물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왜 도교까지 포함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사상들이 만개한 때는 춘추전국시대이고, 그 시대에 제자백가라고 해서 많은 학파들이 나왔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학파는 유가와 도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펼치는 개념으로 또는 대상으로 물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고대사상에서 '물'을 언급한 사상가로 유가와 도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가의 대표자는 공자와 맹자이고, 도가의 대표자는 노자와 장자이다. (장자는 노자와 다른 사상가로 분리하려는 움직임도 있으나, 통상적으로 노장사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함께 묶고 있으니 여기서는 노자와 장자를 도가로 엮는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여기고 있다.)

 

왜 이들은 '물'을 중시했을까? 사상을 펼치는데 사상은 철학으로 개념이 매우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추상적인 개념을 그냥 펼쳤다가는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는데 실패하고 만다.

 

예수도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 쉬운 비유들을 많이 들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공자와 노자도 자신들의 사상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추상적인 개념을 대체할 다른 개념을 찾아내었으리라.

 

그것이 바로 '물'이다.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물. 우리는 물이 없으면 죽고, 또 고대사회는 물을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했기에, 물은 가장 쉽게 접하는 대상이고,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물'의 속성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펼친다. '물'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든지, '물'처럼 맑고 깨끗해야 한다든지, '물'처럼 포용적이어야 한다든지 하는 비유를 들어 자신들의 사상을 펼친다.

 

이것을 이 책의 저자는 '뿌리 은유'라고 한다. 은유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개념으로 대체하는 비유라고 하고, 뿌리라는 말은 근본이라는 말이니 '뿌리 은유'는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라는 뜻이 될 터이다.

 

그리고 이런 '뿌리 은유'로 '물'을 들고 있다. 결국 우리는 '물'의 속성을 알면 그들이 어떤 사상을 펼쳤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와 개념체계가 다른 서양 사람들에게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업이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물'로 이들 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유교와 도교의 '물'이 차이를 이룬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유교의 '물'은 넓고 깊고 크다. 이들은 왕도정치를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다. 그래서 공자나 맹자에게서 '물'은 '우'와 함께 등장한다. '우'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물길'을 바로 잡은 사람 아니던가. 물길을 바로잡아 물이 제 길을 가게 하고, 사람들이 제 삶을 살게 해준 사람 아닌가.

 

이렇게 유교에서 '물'은 행동과 함께 나온다. 마치 작은 물길들을 모아 큰 물길을 만들고, 서로 떨어져 있던 물길을 터서 연결시키는 그런 행동이 군자의 길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유교에서는 행함이 있기에, 그 행함을 유지시켜주는 틀과 형식으로서의 '예'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반대로 도교에서 '물'은 그냥 놓아둠이다. 물길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물길을 서로 트고 합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물은 흘러간다. 제 갈 길로. 거기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행동을 할 필요가 없으니 틀과 형식인 '예'가 필요없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이런 차이가 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우리는 4대강 사업이다, 경인 아라뱃길이다, 뭐다 하면서 물길을 트고, 합치고, 연결하는 일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물의 본성을 살리는 행동을 한 것이 '우'가 한 일이라면, 우리가 한 일은 물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 아니었던가.

 

물의 본성을 거스르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유교와 도교의 공통된 사상이니...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유교나 도교를 스스로 배반하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유교와 도교를 '물'로 엮어 주장을 펼쳐나가는 것에서도 감탄하였고... 지금 우리의 삶을 '물이 본성'에 비춰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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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크로버 시리즈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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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팔자는 타고 났다는 말을 한다. 당연한 말이다. 자기가 태어난 년월일시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긴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태어나는 날을 조정하기는 하지만, 이미 태어났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데 타고 났다는 말은 바꿀 수 없다는 말과 같지 않다. 사람들이 이 두 말을 같은 말로 쓰고 있는데, 타고 났다는 말은 이미 그랬다는 과거형을 뿐이라면 바꿀 수 있다/없다는 말은 지금이라는, 얼마든지 유동적인 현재형이다.

 

과거형으로 현재를 규정지으려는 것이 바로 운명론이고, 이러한 운명론을 사람들을 우매하게 만들어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고 만다. 자기의 운명이 정해졌다는데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운명론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이 아마도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아닐까 싶은데, 자신의 사주를 믿고 평생을 그대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과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살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운명이란 이미 타고 났지만, 그 타고 남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쪽으로 사주를 해석하고 활용하는 것이 '사주명리학'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사주명리학을 활용한다면 사주명리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점집에 가서 점치는, 그 점대로 하고, 또 부적을 받아서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자세를 지닐 필요가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사주명리학은 운명론이나 미신이 아니라 철학이고 인문학이다. 우리가 살아갈 길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이다. 이정표대로 따라가든 아니든 그것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즉, 운명에 대한 삶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

 

운명이 그러니 내가 이럴 수밖에 없어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포기했음을 나타내주는 말일 뿐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천지의 기운을 자신의 몸에 받은 것은 당연한 일. 그것이 기질을 형성하는 것도 당연한 일. 그러나 사람은 단지 주어진 것을 따라만 가는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주를 행위를 통해서 또다른 관계로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존재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관계론이라는 얘기다. 우리의 운명은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는 얘기.

 

하여 자신의 사주를 명확히 알 필요는 있다. 사주를 명확히 알고 자신이 추구해야 할 관계를 파악한 다음에 행위로 나아간다면 자신의 운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 된다.

 

이 책의 부록에 사주가 단지 8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밝혀놓고 있다. 사주의 경우의 수를 20,736가지, 천간까지 합쳐 계산해 보면 팔자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12,960,000가지(280쪽)라고 한다.

 

천이백만분의 일. 이것이 내가 지닌 팔자다. 여기에 내가 스스로 관계를 통하여 만들어가는 팔자까지 생각해 보면 경우의 수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팔자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팔자는 타고 났지만 결코 정해지지 않는다. 팔자는 유동적이다. 팔자는 관계지향적이다. 관계를 통해서 팔자는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다. 때문에 팔자는 만들어진다. 팔자는 곧 내 행위를 통한 삶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아는 것. 모든 것은 앎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이것을 바탕으로 실천으로 나아가 관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 된다.

 

하여 운명은 길이다. 우리가 다양한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길. 이 길에서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는 운명의 길이 달라진다.

 

이렇듯 미신이라고 도외시하고 있었던 사주명리학이 단순한 미신이 아닌 삶에 대한 철학, 인문학이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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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겠다” - 고병권이 만난 삶, 사건, 사람
고병권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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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거리의 인문학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되었고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인문학 하면 뭔가 심오한 철학을 연상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무언가 특별한 지식을 얻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지레짐작하고는 인문학에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인 고병권은 인문학은 우리의 삶에서 멀어지는 학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이라고 한다.

 

그가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전혀 인문학과 관계가 없을듯한 사람들과 인문학을 통하여 만나면서 그는 인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우리 삶에서 인문학을 발견하는 점에 중점을 둔다.

 

즉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앎을 참조하는 질문'이 앎을 앎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면, 우리가 흔히 만나는 장삼이사들은 '삶을 참조하는 질문'을 하는데, 이런 질문은 곧 삶을 앎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먼 얫날 철학자들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앎이란 곧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곧잘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이 된다.

 

삶이 되지 않는 앎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대학 강단에서 고담준론을 논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과 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잔치에 불과하게 되지 않겠는가.

 

정녕 인문학은 이러한 강단 철학, 강단 인문학이 아니라, 삶과 밀접히 관련이 되어 있는 거리의 인문학, 삶의 인문학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경험한 일들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통하여 우리는 인문학이 우리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이야기한 몇가지 개념이 머리 속에 계속 남아 있다. 바로 "빵과 장미"라는 말인데, 우리에게는 빵도 필요하지만 장미도 필요하다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외침이 바로 그것이다.

 

생계를 보장하는 활동만이 아니라, 삶을 삶이게 하는 어떤 요소들을 필요로 한다는 말, 인간에게는 밥만이 아니라 바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오도엽이 엮은 "밥과 장미"라는 책도 있듯이 인문학은 바로 이러한 소수자들에게 그들에게 주어질 것은 시혜가 아니라 함께 함이라는 사실, 그들이 이 사회를 바르게 보고, 자신의 삶을 직시하며,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장미'라는 개념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논의에 비추어 "옹이"란 말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톱질이나 대패질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리라. 옹이가 얼마나 단단한지. 그 옹이를 벨 때 얼마나 힘이 드는지. 옹이가 나무가 겪은 상처라고 한다면, 나무의 상처는 너무도 단단하고,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지니게 되는데...

 

그러나 그 흔적이 단지 상처로만 남지 않고 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옹이라는 사실. 나무에 있는 옹이는 얼마나 멋진 무늬로 남을 수 있는지, 옹이를 옹이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알고 있다.

 

이렇게 옹이를 상처가 아닌 무늬로 바꿔주는 힘.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거리의 인문학. 그것은 상처를 상처로 인정하고,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해주는 일회성 처방이 아니라, 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이되, 상처가 무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하여 이 책을 읽어가면 온갖 상처가 나오지만, 그 상처가 상처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들의 상처를 직시하며,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이 인문학을 통하여 상처를 무늬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그래서 '철학은 앎이지만 또한 행함'(15쪽)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인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때, 정말로 우리를 살리는 것은 인문학임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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