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을 켜다 삶창시선 48
손병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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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걸 시인.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 빛을 잃었다고 하는데...

 

하여 시인은 눈으로 보지 않고 통증으로 본다. 시인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길, 그것은 바로 '통증을 켜는' 일이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통증, 손가락에 켜는 통증으로 시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이런 통증들이 잘 느껴지는 시집이다. 읽으며 마음이 따스해진다. 그냥 내 처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느끼고, 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 시집에서 '입동 무렵'이란 시... 이런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다.

 

 입동 무렵

 

모두 다 춥다 춥다 껴입을 때

나무는 이파리를 다 벗는다

 

생활의 옳고 그름을

옷매무시 한 가지로 따질 수는 없겠지만

내 삶 오롯이 알몸인 적 없었다

 

삶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말

언 바람을 베어대는

저 나무의 당당한 목소리다

 

깡마른 가지를 휘두르며

때로는 뚝뚝 부러져나가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

나무는 결코 눕지 않는다

 

종내엔 뿌리의 내력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딱 한 번 유언을 오롯이 남기겠다는 듯

어둠을 움켜쥔 체 꼿꼿한

전라의 나무 한 그루

 

또 한 겹의 나이테를 여미고 있다

 

손병걸, 통증을 켜다. 삶창. 2017년. 50-51쪽

 

어쩌면 살아가면서 자꾸만 덧씌우기만 한 것이 아닐까. 삶은 이렇게 자꾸 자신을 덧칠하기보다는, 자신을 덮고 있는 것들을 덜어내는 일 아닐까.

 

추울수록 더 입는 것이 아니라, 추울수록 다 떨어내는 나무들처럼 그렇게 우리의 삶도 어려운 때를 만나면 덜어내고 덜어내서 깡마른 알몸으로 버틸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무에게서 삶의 자세를 보는 시인, 그런 시인의 시를 읽고 삶의 자세를 생각하게 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너무도 고맙게 잘 읽었다. 마음에 새겨둘 시들이 한두 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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