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사연들 - 내가 모르는 단어는 내가 모르는 세계다
백우진 지음 / 웨일북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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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 관한 책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말에 대해서 많이 무심하게 지내왔는지도 모른다. 늘 쓰는 말이기 때문에,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게 여기면서 우리말에 대해서 더 깊게, 더 넓게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쓰는 말들 중에 이상한 말이 있어도, 외래어도 아닌 외국어가 함부로 쓰여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도 했다. 우리말이 오염된다는 말을 한글날만 되면 듣고, 한글날만 되면 우리말을 사랑하자는 말들이 나돌아다니기도 하지만, 나머지 날들에는 우리말에 대해서 고민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작년 수능에서 국어가 너무 어려웠다고 한다. 국어가 어려운 이유는 배경지식이 작동해야 하는 지문이 엄청나게 길어진 데도 원인이 있겠다. 또 배경지식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우리말 어휘에 대하여 많이 알아야 하는데, 과연 학생들 어휘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방법도 없어 제대로 측정도 하지 않았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영어사전에는 중고등학교 또는 대학교까지 반드시 알아야 할 단어가 표시되어 있는데... 우리말 사전에는 그런 것이 없다.)

 

어떤 연구결과는 집에 있는 책의 수와 학생들 언어 능력 또는 국어 능력이 비례한다고 하던데,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경제력과 학업 성취도가 비례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경제력이 있는 집들은 책도 많을 것이고 시간도 있을 것이고 아이들에게 다른 경험도 많이 시켜줄 수 있을 테지만, 경제력이 없는 집들은 책도, 시간도, 다른 경험도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학업 성취에서 차이가 날밖에...

 

이 책을 읽으며 갑자기 웬 학업 성취... 단어의 사연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인데... 단어들을 많이 알면 표현력이 좋아지고, 또 단어들을 많이 알면 이해력 또한 높다고 봐야 한다. 굳이 비트겐슈타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아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반대로 모르는 것은 표현할 수 없다. 이 말은 표현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는 것이 많다는 얘기다.

 

알고 있는 단어의 수는 결국 지식의 양이다. 지식의 양은 곧 지식의 활용으로 바뀔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말 단어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 중요하다. 단지 학업 성취만이 아니라 자신이 세계를 인식하는 범위를 더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 참 고민 많이 했던 철학자, 그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다 결국 자기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칸트가 만들어낸 용어,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미궁의 세계, 미지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이미 존재하는데도 언어가 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면 칸트의 물자체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 인식이 이미 도달한 지점에도 자신이 못 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경제력이 이렇게 어휘력까지 좌우하지 않게 해야 한다. 적어도 학교 교육을 통해서 또는 사회 기반-도서관 등-을 통해서... 책을 읽을 시간을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주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언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도, 또 모르고 있던 것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읽는 재미도 있고,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또한 우리말에 이런 점이 있었구나 하는 것도 알 수 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우리말의 모습들이 있음도 알게 된다. 여러모로 읽으면 좋을 책이다.

 

나 역시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세상에, 이렇게 잘못 알고 당당하게 썼다니... 부끄러웠는데, 지금이라도 이 책을 통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다행이랴.

 

그 말은 바로 '양반은 죽어도 겻불을 쬐지 않는다'와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라는 말이다. 여기서 내가 잘못 알고 있던 낱말은 '겻불'과 '씨알'이다.

 

난 당연히 '곁불'이라고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불을 쬐는 것이라고, 그것은 양반 체면에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곁불'이 아니라 '겻'불이란다. '겨'에 사이시옷(ㅅ)이 붙은 말. 왕겨와 같은 것을 태울 때 제대로 불이 붙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양반은 지지부진한 불을 쬐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184-185쪽)

 

마찬가지로 '씨알'을 '씨앗'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 베틀에서 '씨'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베틀에서 옷감을 짤 때 가로줄은 씨, 세로줄은 날이라고 한다. ... 씨가 날에 잘 먹어야 옷감이 잘 짜이는데,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바로 '씨가 안 먹힌다'고 말한다. ... 여기서 씨가 베틀의 씨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씨를 '씨앗'으로 알고 '씨알'로 바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말하게 됐다. (185쪽) 

 

자주 쓰는 말임에도 잘못 알고 쓴 대표적인 말 두 가지였다. 물론 이 책에는 더 많은 말들이 나온다. 처음 알게 된 말들도 많고... 또 이 말은 꼭 써봐야지 하는 말들도 있고.

 

그렇게 우리말에 대해서 더 많은 사연들을 쌓아가게 한 책이다. 좋다. 우리말을 많이 알아간다는 것, 우리 문화를 많이 알아간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단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차원에서도 우리말에 대해 알아가는 것,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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