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세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시인의 말을 보자.

 

  나는 평생 밀핵시(密核詩)를 추구해 왔다. 밀핵시란 시에서 의미의 밀도를 최대한으로 높이려는 시도다. 이것이 우리 시의 약점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밀핵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요소시(要素詩), 일자일행시(一字一行詩)이며, 그 궁극의 형태가 일자시(一字詩) 일명 절대시다.

 

무의미시(김춘수)에서 날이미지시(오규원)란 용어도 있었는데, 이제는 밀핵시 또는 일자시다. 단 한 글자로 시를 이루는 것. 언어를 없애고 없애 결국에는 의미만 남게 한다는 것.

 

'알'이다. 줄이고 줄여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 알. 알은 핵이다. 핵은 고도로 농축되어 있기에 터지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수다스런 말이 아니라 하나로 응축된 말.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 그런 시를 일자시, 절대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집 '서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이렇게 말한다.

 

서시

 

그 날이 그 날 같지만

오늘은 어저께가 아니다.

내일은 오늘이 아니다.

무엇이고 시간 속에서

시시각각 새롭지 않은 것은 없고

시간 속에서

색이 바래고 때묻지 않은 것도 없다.

새 것도 없고 새 것 아닌 것도 없는

기묘한 현실의 얼개 앞에서

감각과 생각은 여간 무디지 않다.

묵은 것에서

새 싹 가려내는 연습.

새 것에서

영원한 모습 찾는 연습.

동시에 우리말에 새 생기 불어넣는 연습.

그리하여 생긴 것이 이 시집이다.

 

성찬경, 논 위를 달리는 두 대의 그림자버스. 문학세계사. 2005년. 12쪽.

 

말은 어디에 배치되어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가령 '응'이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같은 '응'이지만 긍정도 될 수 있고, 부정도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의문도 될 수 있다. 이렇게 말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동을 한다. 그렇다면 단 한 글자, 그 한 글자가 어떻게 자리잡고 있느냐에 따라 너무나도 다양한 의미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에는 단 하나의 글자들을 한 행으로 배열한 시가 있다. 제목은 '해'다. 그리고 '해/달/별/땅/빛/김/참/물/불/흙/넋/피/숨/몸/맘/말..../힘'으로 끝난다. 단 하나의 글자들이 '해'라는 제목으로 시를 이루고 있다.

 

이 단 한 글자들은 해라는 절대 존재와 동격이다. 그러므로 동격들인 낱말들이 행을 이뤄 시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한 글자들이 시를 이루다가 이제는 제목만 남는다. 제목이면 이야기를 다 한 것이다.

 

맨 끝부분에 실린 '똥'과 '흙'이라는 시가 그렇다. 똥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냥 똥 하면 수많은 생각들이, 이미지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러기에 시인은 독자에게 시를 넘기고 있다. 당신의 상상으로 시를 채워가라고.

 

'흙' 역시 마찬가지다. 제목인 '흙'을 보강해주는 것은 두 쪽에 걸친 여백이다. 넓은 여백. 흙은 땅처럼 우리에게 어떤 장소를 제공한다. 우리 존재의 근원이다. 그러니 무슨 표현이 필요하겠는가? 그냥 백지면 된다. 이를 미술과 시의 만남이라고 해도 좋다. 단지 백지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건져내는 것, 이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게 바로 시가 된다. 절대시다. 무슨 말을 주절주절 풀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말이 많은 시대, 시도 수다스러워지는 시대... 노시인은 시의 말을 줄이고 줄여 나중에는 한 글자로 줄여나갔다. 일자시, 절대시의 세계로 나아갔다. 우주는 넓다. 무한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무한한 우주도 한 점에서 시작했다는 것. 시는 그렇게 우주의 빅뱅만큼이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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