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라스 불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1
니콜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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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소설은 역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작가가 결론을 바꿀 수가 없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러나 결론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읽는데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작가가 허구적인 상상력으로 메워넣기에 더 흥미롭고 재미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이 역사 소설이나 또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미 알고 있는 결과지만 그 과정을 채워넣는 작가나 감독의 상상력에 감탄하기 때문이다. 고골이 쓴 소설 '타라스 불바'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을 나는 지금까지 '대장 부리바'로 알고 있었다. '타라스'라는 말을 '대장'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던 것. (소설 시작 전에 있는 일러두기에 이런 말이 있다. [타라스 불바]는 [대장 불리바]로 번역된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러시아 문학 전공자들까지도 '타라스'에 '대장'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타라스는 인물의 이름이고, 불바는 인물의 성이다. 6쪽)   역시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한데, 대장 부리바로 알고 있었던 이유는 어린 시절에 본 율 브린너가 부리바 역으로 나온 영화가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영화가 그래도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색을 해봤더니 1962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영화고, 이 소설의 말미에 번역자가 영화도 소개하면서 영화와 소설이 지닌 차이를 설명해 주고 있다. 눈이 부리부리한 율 브린너의 연기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데, 소설을 읽으면서도 자꾸 율 브린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영화를 먼저 본 나에게 불바는 율 브린너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불바의 이미지가 꼭 그렇게 고정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소설과 영화의 차이다. 소설에서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훨씬 많다. 특히 인물에 대해서는. 

 

자유를 추구하는 카자크 족. 그들은 이교도들, 특히 폴란드와 타타르인들을 싫어한다. 그리고 소설에 또 하나의 축 유대인이 나오는데, 어떤 식으로든 돈을 버는 그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세익스피어의 샤일록이 얀켄이라는 이름으로, 극한 상황에서도 돈을 생각하는 유대인으로 나오는데, 유대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끝없은 미움을 엿볼 수 있다.

 

영화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카자크 족은 야만인이었는데, 아니었다. 소설을 읽어보니 이들은 그리스정교를 독실하게 믿는 신앙인이었다. 마치 십자군 원정을 유럽 기사들이 떠났듯이 카자크 족은 그리스정교를 믿지 않는 가톨릭이나 이슬람교를 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과 공존하지 않으려 한다. 평화협정을 맺었음에도 자식들에게 카자크 족의 용맹을 일깨워주려는 불바. 결국 이들은 폴란드를 침공하고 전쟁을 하게 되는데, 전쟁 중에 아들들의 용맹을 확인하고 흐뭇해 하는 불바.

 

참 호전적이다. 이들에게 용서는 없다. 오로지 학살과 약탈뿐이다. 이런 그들이기에 평화로울 때는 먹고 마시고 논다. 그것이 다다. 미래를 위한 저축, 그런 것은 없다. 이상하게 그리스정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죽을 때 신에게 의탁하면서, 평소 생활은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같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 욕망에 충실한 자유인이다. 다만 그들 자유를 위해 상대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문제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라고 하고, 과거에 이런 전쟁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니, 꼭 이들을 탓할 것은 아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들은 결국 해체되고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이다. 이렇게 호전적인 집단이 계속 존재한다면 인류가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이런 불행을 불바의 두 아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아버지와 똑 닮은 큰아들 오스타프는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사형을 당하는데, 전사답게 당당하게 죽게 된다. 반면 둘째 아들 안드리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져 카자크 족을 배신하고 폴란드 군에 서서 전투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 불바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불바는 두 아들을 모두 전쟁에서 잃는다. 이들이 아무리 전투를 좋아해도 자기보다 먼저 자식들이 죽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는 이미 이 사실을 예견하듯이 불바와 떠나는 두 아들을 눈물로 보내게 된다.

 

어떻든 전쟁은 비극이다. 전쟁은 눈물을 부른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무용담으로 남을지 모르겠찌만, 가족들에게는 비탄만 남기게 되는 행위이다. 

 

불바의 죽음으로 카자크 족은 더이상 호전적인 전투를 할 힘을 잃어버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불바의 부대가 패배해 부하들이 간신히 도망가고 불바는 화형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불바는 카자크 족 마지막 전사가 된다.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불바를 영웅으로 만든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에서 결국 불바의 죽음으로 끝나는 결말을 보면서, 사람들은 전쟁이란 비극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유럽에서는 고골이 죽은 다음에 더 큰 전쟁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또 종교로 인한 분쟁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타라스 불바도 전쟁을 벌이는 원인이 바로 종교 아니던가.

 

사람을 구원한다는 종교가 이편 저편을 가르고 그들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여기에 사랑은 끼어들 틈이 없음을 '타라스 불바'를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평화에 도달하는 길은 여전히 멀다.

 

카자크 족 마지막 전사라 할 수 있는 불바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전쟁이 일으키는 비참함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카자크 족들이 전쟁을 통해서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모습을 통해서도.

 

이 소설은 단순히 영웅소설로만 읽을 수는 없다. 오히려 전쟁의 비극을 알려주는 소설로 읽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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