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무심한 관계였을 것 같다. 서점상과 이름 없는 작가. 굳이 관심두지 않아도 되는 사이. 책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딱 거기까지만인 관계.  아니, 그냥 아무 의미를 두지 않고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책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장사꾼, 책이 필요해 구매하려는 소비자. 무엇이 더 필요한 관계일 수가 없지 않은가. 나를 비롯한 많은 독자가 인터넷서점의 창을 열고 책을 주문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책값을 지불하고 서점은 책을 배송해주고. 각자의 목적에 맞게 그 자리에서 요구하거나 책임 의무를 다하면 되는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조금 특이한 관계가 눈길을 끈다. 책 구매로 시작된 단순한(?) 편지가, 어느 순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선물을 주고받는, 애정을 담은 무게를 가지게 된 거다. 읽으면서 계속 궁금했다. 정말 이게 가능한 일인 걸까?

 

이름 없는 작가 헬렌은 채링크로스가의 고서점으로 메일을 보낸다. 구매하려는 책 목록을 적어 보내고 책의 재고 여부를 묻는다. 헬렌은 적당한 서점에 금액을 지불하고 의뢰한 책을 배송받는다. 서점상 프랭크는 헬렌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고, 헬렌은 계속 구하는 책을 프랭크에게 요구한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주문서와 영수증에 불과할 그들의 편지가 점점 색깔을 달리한다. 헬렌은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식료품을 프랭크의 서점에 보내주고, 프랭크는 헬렌의 선물에 고마워한다. 전쟁 때문에 사람들은 풍요롭지 못했던 시절이다. 프랭크의 가족은 식료품을 배급받으며 생활했고, 헬렌은 미국의 식품 문화를 그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자고 약속한 건 없다. 누가 먼저 요구하지도 않았다. 점점 그들의 사이에 서점상과 고객이라는 관계 이외의 것이 자리하기 시작한 거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런 걸까? 저절로 누군가에게 향하는 마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쌓이는 어떤 마음. 혹시나 하는 상상을 했다. 헬렌과 프랭크는 편지로 마음을 쌓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 이런 설정은 어디까지나 내 상상에서 머문 이야기다. 두 사람의 편지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프랭크가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남자라는 게 밝혀진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로맨스가 없다고 해도 아쉽거나 이상할 게 없었다. 이들의 편지에는 오롯이 책이 가득했다. 헬렌이 찾는 책, 그 책을 또 열심히 구하려는 프랭크와 서점 직원들. 한 번씩 오가는 선물에 인사와 답례를 하는 편지들이 또 이어지는 반복. 책으로 시작된 편지에 다른 마음이 끼어들면서 그들의 편지는 더 뜨거워진다. 사람 사이의 온기가 그대로 실려 오는 느낌이다.

 

이런 인연이 가능할 수 있을까 묻고 있다가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답에 나의 물음은 우문이 되었다. 새 책이 아닌, 헌책만이 줄 수 있는 감성이 전해진다. 오래된 종이, 헌책 특유의 냄새를 맡는 것만 같다. 클릭 한 번에 결제가 되고 배송이 되는 오늘날의 시스템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감각이다. 디지털 세상에서 갑자기 아날로그 세상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기도 하다. 나 역시 언젠가 오래된 절판본을 애타게 찾았던 경험도 있었기에, 어느 판매자에게 간절한 문의를 한 적도 있었기에, 헬렌과 프랭크 사이의 편지가 더 애틋하다.

 

책에 대한 애정이 바탕에 깔렸고, 그 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서점상과 독자의 이야기. 머릿속으로 그들이 편지를 쓰고, 책을 읽고, 책을 찾아다니는 장면을 수도 없이 그리면 읽게 된다. 책에 대한 로망이나 서가의 먼지가 일으키는 기침 따위 상관없이도, 한 번쯤은 나도 그 안에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책으로 이어지는 어떤 낭만을 상상해보기도 하고, 책이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감각이라는 생각도 든다. 언젠가, 누군가, 채링크로스 84번가를 걷다가 이 서점을 발견하게 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들어갈 것 같다. 그 책 냄새에 이끌려, 누군가 간절히 찾는 책을 수배하고 있을 서점 직원을 떠올리며...

 

이름 없는 작가와 서점상이 주고받은 편지 묶음에, 페이지 수도 적은 이 책이, 막상 구입한 나도 놀랐을 정도의 분량이었다. 그런데 이 얇은 책이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고, 개정판까지 나오게 되는 이유는 뭘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답정너'였다. 책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의 애정이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다. 오늘날 휴대폰만 열어도 책을 쉽게 읽을 수 있고, 검색 한 번에 그 책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의 편함을 너무도 잘 알지만, 그래도 퀴퀴한 책 냄새가 주는 무언가를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많은 사람이 알지 않은가. 이 얇은 책이 전하는 감성은 그런 거다. 처음 책을 접하면서 느낀 그 감각을, 그 정서를, 그 애정을 새록새록 하게 만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말이다. 오늘날 사라진 책의 낭만을 찾아가게 하는 이 짧은 순간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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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04-01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과 영국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도 감동을 주지 않나 싶습니다 미국에도 헌책방은 있었을 텐데 헬렌은 영국 책방에 편지를 쓰고 책을 사기도 했네요 편지로 이런저런 말을 나누어서 좋았던 거겠지요 이건 그 시대였기에 할 수 있었겠습니다 여기 실린 편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 해도 여기 쌓인 시간은 길지요 긴 시간 동안 마음을 나누다니... 프랭크가 갑자기 죽은 뒤에는 연락이 끊겨서 아쉽기도 했습니다


희선

구단씨 2018-04-02 14:35   좋아요 1 | URL
글쵸? ^^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것 자체로도 거리감이 생길 수 있는데,
그렇게 멀리 떨어진 두 나라에서 오가는 편지에 정이 뚝뚝 묻어나서 감동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