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의 기억
안채윤 지음 / 자화상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언젠가부터 누구를 향한 마음에 본전을 생각하곤 했다. 내가 너를 이만큼 좋아하니 너도 나를 이만큼 좋아해야 당연한 거 아닌가, 하는 계산.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유치한 계산인데, 아마도 상처받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보다 마음에 새겨진 상처가 더 깊고 큰 법이기에, 그 상처의 주인공이 내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다짐 같은 것. 그렇게 이기적이고 나를 먼저 챙기는 마음을 품고 있는데도, 안채윤의 『서촌의 기억』을 읽는 동안에는 그런 본전 생각을 안 하게 된다.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마음, 그게 짝사랑인데도 한없이 절절한 마음을 혼자서 앓고만 있던 순간을 보고 있노라면, 일방적으로 보내는 마음이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겠다.

 

태인은 서촌의 어느 골목길 끝에 자리한 흉흉한 건물을 매입하고 공사를 시작한다. 그도 왜 그 집을 구매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갑자기 마음이 끌렸다고 할 수밖에 할 말이 없다. 친구와 함께 가구 공방을 차릴 장소로 선택한 곳이다. 오래된 그 집을 수리해서 사무실 겸 공방으로 만들기 위해 공사를 시작하는데,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한 편지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집의 외양간 밑에서 방공호 같은 작은 공간을 발견했고, 그 공간 안의 나무 상자에서 나온 오래된 물건들을 본다. 낡은 담요, 이백 통이 넘는 오래된 편지들. 중단되었던 공사는 계속되고, 태인은 그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1950년에 써진, 일 년 동안 계속된 한 남자의 애절한 마음을 담은 편지였다. 차마 부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쓰는 걸 멈출 수도 없는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살아있는지 확인하러 친구가 직접 와야 할 만큼 외출도 안 하는 남자 태인은 그 편지로 인해 뭔가가 꿈틀거린다. 이백 통이 넘는 편지와 빛바랜 사진 두 장, 그나마 사진 한 장은 가장 궁금한 얼굴이 잘려나가기까지 해서 잘 알아볼 수가 없다. 궁금했다. 무엇인지 모를 호기심에 심장이 뒤기 시작했다. 그래서 직접 나섰다. 편지의 주인공, 혹은 그 편지와 관련한 인물을 알려줄 단서를 찾아서. 태인은 그렇게 한발 한발, 누가 등 떠밀지 않았는데 그가 직접 대문을 열고 나갔다.

 

1950년의 흔적을 발견하다.

 

1950년 1월 1일 일요일 저녁. 당신에게 쓰는 편지.

이 편지가 언제쯤 당신의 손에 쥐여지게 될는지 기약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편지를 쓰는 연유는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강물 불어나듯 넘쳐나 내가 어찌할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봄, 오후 늦게 내리던 소낙비를 피해 나의 벗들과 들어간 그 간판 없는 전집에서 당신을 처음 본 것이 이 연모의 시작이었습니다. (28페이지)

 

편지는 1950년 1월 1일부터 시작한다. 서촌의 한 막걸리 집에서 본 여인에게 마음을 뺏긴 문학도 구자윤.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친구들에게 먼저 막걸리 마시러 가자고 말할 정도로, 그 술집의 여인을 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그를 모르지만, 그는 그녀의 행동과 표정을 놓치지 않고 보면서 마음을 키워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책 한 권을 가슴에 품고 길을 걷는 그녀를 본다. 그때야 비로소 그는 그녀가 숨긴 열정을 읽는다. 그녀가 일하는 시간, 그녀가 일하는 공간이 현재의 그녀에게 어떤 시간을 살게 하는 건지 알게 된다. 그렇게 그녀에 관해 하나씩 알아갈수록 구자윤이 그녀를 향한 마음은 주체할 수가 없다. 그래서 편지를 쓴다. 그 마음 온전히 전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편지에 꾹꾹 눌러 담는다. 그러던 중에 발발한 전쟁으로 그는, 더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된다.

 

태인이 66년 전 구자윤의 편지를 한 통씩 읽어갈 때마다 드러나는 그 시간의 진실이 애절하다. 한 여자를 향한 마음을 담은, 차마 전해지지 못한 편지는 그 마음을 더 애타게 한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그는 그녀에게 직접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짝사랑의 끓는 마음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자윤의 편지였다. 그녀를 살짝이라도 보고 싶어서 자꾸 그 술집을 찾고, 우연히 알게 된 그녀의 이름에 설레 잠 못 이루고, 그녀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내일을 기다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가는 그의 마음은 하루하루 이어가는 편지의 양과 비례한다.

 

조금은 알 것 같다. 어쩌면 끝내 전해지지 못할 것을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때 적어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을 풀어놓아야만 했으니, 지금 같다면 온라인 어디에 말하거나 혼자만의 일기장에 적어두거나 했을지도 모른다. 시인을 꿈꾸던 남자였으니 그 마음의 표현이 오죽했으랴. 옛날식 말투가 손발이 오그라들게 하지만, 그 시대를 생각하면 그런 편지글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들리기도 한다. 무엇보다 어떤 말투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편지에 담긴 마음이 어떤 건지 우리가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이 소설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렇게라도 꺼내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을 거라는 예측 가능한 진심이기도 하다. 그렇게 계속 적다 보면 언젠가는 전할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 그렇게 전하고 나서 마음을 나눌지도 모르지,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하지만 운명은 참 얄궂다. 구자윤에게 그렇게 중요한 시기였는데, 감성 폭발하여 절절한 연애편지로 시를 쓰는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 때에 전쟁이 일어나다니. 살아남기 위해 몸을 숨기며 갇혀(?) 지낸 그 순간이 그에게는 더할 수 없는 습작의 시간이 되기도 했지만, 그녀를 다시 만나지 못한 그 아픈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을 듯하다. 아, 이 남자의 순정은 이렇게 끝나고 말 것인가.

 

이제 마지막 종이입니다. 나에게 남은 종이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수중에 돈도 없고 상점도 열지 않으니 아마도 이 편지가 당신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낙마저 없어지면 난 이제 어떻게 하루를 버텨내야 하나, 눈앞이 아찔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봐야겠지요. 그동안 참아오고 버텨냈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나마 날 여기까지 살 게 한 건 두말할 여지없이 당신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온 정성을 다해 사모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도 당신 덕분에 알게 되었으며 당신 덕분에 가슴 뛰었던 나의 젊은 날들을 사랑해 마지않습니다. (293~294페이지)

 

설정은 달달하다. 21세기에 발견된 1950년도의 편지라니. 내용을 몰라도 이런 분위기를 미리 알고 나니 설레기부터 한다.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현재의 사람이 과거의 흔적을 굳이 찾아 나서게 하는 마음에 저절로 이끌린다. 그 호기심이 불러낸 어떤 감정을 읽기도 전에 공감할 것만 같다. 태인이 구자윤의 편지를 단서로 찾아가는 과거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해서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니까 말이다. 현재 태인의 발자취와 과거 구자윤의 편지가 교차하듯 보이는데, 그게 더 호기심을 부른다. 그는 그녀를 만났을까? 못 만났을까? 이십 대 초반의 그들은 어떤 세월을 보냈을까? 만약 그들이 현재까지 살아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떤 사건을 추적하듯 태인의 여정에 동행하다 보니, 어느새 소설은 끝이 났다. 구자윤은 매번 편지의 끝에 '당신을 사모하는 구 자 윤'이라 적었다. 언제 부쳐질지 모를 편지에 자기 이름 넣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당신을 '사모한다'는 마음도 잊지 않고 적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바로 통화 연결음이 들리는,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바로 전송되는 문자, 자판 몇 번 두드리며 발송하는 이메일. 점점 악필이 되어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 익숙한 지금 만나는, 이런 아날로그적인 이야기가 생소하면서도 정겹다. 어린 시절에 적어보던, 누가 볼 새라 잠금장치를 걸어두었던 일기장, 몇 번인가 적었다가 찢어서 버렸던 마음들, 아닌 척하면서 몰래 훔쳐보던 누군가를, 생각만 해도 얼굴이 빨갛게 물들고야 마는 순간들을 기억에서 꺼내본다.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그때는 왜 그렇게 세상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는 했는지... 그런 마음에 더해진 시대 상황이 구자윤의 사랑을 더 진하게 만든다. 우리 기억 속 '언젠가'의 감정과 전쟁이 부른 안타까운 이별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감성, 추억을 부른다. 살면서 세상에 부대끼며 잊고 지냈던, 누구에게나 한번은 있었을 감정을 이렇게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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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0-25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영화 <파이란>이 떠올랐습니다. 참 좋았는데요 그 영화.

2017-10-26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