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읽는 게 어려운 건 아니지만, 읽은 시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꽤 어렵다. 늘 그랬다.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다 알지 못한 채로 시집을 덮는 일이 다반사였다. 특히 이번 시집은 더욱 그랬다. 나에게 세사르 바예호는, 유명하지만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시인이었다. 오랜 시간 절판이었다가 다시 세상에 나온 시들, 여러 시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시인을 만난다는 게 설레기까지 했다.

 

있는 그대로 읽었다. 문장 그대로 읽힌다. 그러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어떤 의미를 감춰둔 단어가 자리하기도 했다. 그의 생각이 엿보이는 부분에서는 각주로 설명되는 배경까지 읽어야 했다. 어느 밤을 기억하고, 어느 계절을 보낸다. 누군가의 일상 같은 인생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언급한다.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화기애애한 형제애를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는 죽은 형이 그립고, 시대의 배경이 아프다. 특히 인간에 대해 고민하는 그의 시어들은 고통을 느끼게도 하지만, 결국은 희망을 노래하고 싶었던가 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오랜 시간 독자들에게 회자할 리 없겠지. 하지만 내가 느낀 그의 시들은 희망보다는 다른 게 더 많이 보이는 듯하다. 어둠, 우울, 괴로움 같은 거. 그 마음을 뭔가 더 표현하고 싶은데,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 한발 뒤로 숨기는 것 같은.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들은 희망과 반대되는 말들을 늘어놓음으로써 고통을 마주하게 하려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런 시간을 마주하면서 건너가는 고통의 순간들이 곧 희망에 닿을 거라는 기대라도 품게 하려는 걸까.

 

피할 수 없는 선을 따라

내가 멀리 아주 멀리

저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아침,

당신의 발들은 묘지를 향해 굴러가겠지.

(중략)

청동이 우는 동안

당신의 괴로운 마음속으로

한 무리 회한이 지나가겠지.

(부재(不在) 중에서)

 

존재하지 않을 어느 순간을 떠올리기라도 한 걸까. 이 세상에서 사라진 형을 기억해내려 애쓰기도 하면서 그 부재의 시간을 견디기라도 하는 걸까. 그냥 일기처럼 써 내려갔다고 생각하면 평범하게 흘러갔을 문장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시인의 시라고 생각하니 문장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게 한다. 이런 느낌이겠지, 이런 고통을 담아놨겠지, 그의 사색의 깊이가 이러하겠지, 하는 기대감이 시어에 저절로 묻어난다. 물론 누가 강요하지 않은, 읽는 독자의 느낌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어렵다면, 그냥 문장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의 시간을 상상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음습한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공평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중략)

인간이 때로 생각에 잠겨

울고 싶어 하며, 자신을 하나의 물건처럼

쉽사리 내팽개치고,

훌륭한 목수도 되고, 땀 흘리고, 죽이고,

그러고도 노래하고, 밥 먹고, 단추 채운다는 것을

어렵잖게 이해한다고 할 때…

(중략)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인간은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인간의 모든 서류를 살펴볼 때,

아주 조그맣게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서류까지

안경을 써가며 볼 때…

 

손짓을 하자 내게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중에서)

 

122편의 시가 수록된 이번 시선집은 세사르 바예호를 만나고 싶었던 독자의 목마름을 충분히 해소해주는 듯하다. 이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를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의 일기를 읽는 느낌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그가 세계문학에 남긴 궤적이 대단하고, 중남미 시단의 거장이라고 해도, 아직은 우리에게 낯선 시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마주함으로써 또 한 명의 시인에게 다가가려는 시도가 그와 만남에 신중하게 한다. 그가 바라보는 인간, 고통에 관한 시선을 같이 보는 시간이 나쁘지 않다. 아직은 내가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도 있기에 충분한 공감을 이룰 수는 없지만, 시 한편 한편에서 보이는 그의 고백 같은 진심은,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특히 예상하지 못했던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 부분에서는 그가 스페인 내전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담겼다. 스페인의 시련이라고 말하며 아파했다. 특히 전쟁 속에 던져진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전쟁이든 가장 아프게 보이는 건 아이들일 테니까 말이다.

 

얘들아,

전사들의 아이들아, 그동안에라도

목소리를 낮추렴. 스페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동물의 왕국, 꽃, 연, 인간 사이에서

힘을 쪼개고 있단다.

목소리를 낮추렴. 스페인은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단다. 어찌할 바도

모르는데, 손에 있는

해골들은 말을 한다, 말을 해.

저 머리 땋은 해골,

저 살아 있는 해골.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 중에서)

 

시인의 삶과 닮았다는,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비극적인 시각이 그의 시어를 더 집중해서 읽게 한다. 그는 형제 많은 집의 막내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가족을 떠나 살았으며, 도망자로 살기도 했다고 한다. 평생의 가난이 불러온 고통과 병 앞에서 그가 표현한 내면의 말들은 그대로 들려온다. 희망에 대해 말하겠다면서 아프다고 그대로 드러낸다. 아픈 원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그 원인이 아니라고, 어느 것도 원인이 아닌 것 또한 없다면서, 고통의 원인을 또렷하게 한 가지로 말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시로 마음을 이야기하고, 시로 전쟁의 참상까지 토로하는 일. 세사르 바예호의 시를 만나는 즐거움을 그대로 확인하는 시간이다. 그의 시가 보는 범위가 넓고, 하는 말의 깊이가 다양하다. 결국은 인간 내면의 소리를 내려고 애쓰는 게, 그가 시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말의 모든 것이겠지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7-09-25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 시 읽었으니 시에 대해 써 보자! 하고 시작했는데, 끝내고 읽어보면 항상 뭔가 읽은 시랑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더라구요.... 그럼 걍 냅둡니다. 에라이, 모르겠다, 이러면서 ㅎㅎㅎ

자꾸 그래서 아직도 시를 모르나봐요.....

구단씨 2017-09-26 10:49   좋아요 0 | URL
아... ㅠㅠ
당분간, 시는 그냥 읽는 것에서 만족하는 걸로...

stella.K 2017-09-29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구단님,
덕분에 공연 잘 보고 왔습니다.
평소 보고 싶었던 공연이었는데 이렇게 구단님을 통해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이 은혜를 뭘로 갚아야 할지...ㅠ

암튼 고마웠습니다.
행복한 추석되십시오.^^

2017-09-30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