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블랙 장르의 재발견 1
오스카 와일드 지음, 서민아 옮김 / 예담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다움의 근원은 삶의 방향성.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고등학교 때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버스 안에서 가끔 좌석에 앉아계신 어른들이 무거운 책가방을 받아줄 때가 있다. 그러면 어디 다른 자리로 옮기지도 못하고 내 가방을 받아준 어른 옆에 서서 가곤 했다. 그때마다 익숙하게 듣던 말. "아이고, 예쁘다." 화장 안 해도, 세수만 한 얼굴이 아주 예쁘다며 경로석에 앉은 어른들은 버스 안 모든 교복 입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새벽에 등교해서 밤에 하교하는 얼굴에는 피곤과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있었을 거다. 온갖 스트레스로 얼굴에는 여드름이 잔뜩 났을 텐데, 폭식하느라 교복 치마 단추가 터질 지경인데 이런 얼굴이 뭐가 예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면 좋겠다는, 스무 살이 되고 싶은 바람뿐이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때 버스 안에서 어른들이 말하던 '예쁘다.'의 의미를 저절로 알게 되었다. 짜증스러운 얼굴에도 보이던 순수함, 아직은 세상 경험 부족한 아이의 모습이 남아있었을 거다. 거기에, 아마 그들보다 젊은 사람을 바라보는 아련한 시선까지 덧대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때 그 어른들의 눈빛은 눈가의 주름보다 여드름을, 세월의 무게보다 책가방의 무게를, 바짝 마른 피부보다 여고생의 통통하고 굵은 종아리를 그리워했던 시선일 듯하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기에 체념한 듯하지만, 역시 자신의 젊음과 건강함을 기억에서 지우진 못했을 거다. 꽃 같은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억하면서, 애틋함과 동시에 서글픔이 밀려왔을 것 같다. 며칠 전 문득, 내가 그때 그 버스 속 경로석에 앉아 있던 어른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고 있음을 자각했다. '너희, 참 예쁘구나.' 하는 말이 입속에서 맴돌며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지나가 버린 시간,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는 젊음, 나이 든 육체가 나에게 가져오는 슬픔이 두려워진다. 도리언 그레이가 영혼을 바쳐서라도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싶었던 간절한 바람을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래서 이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궁금했다. 장르문학의 고전이라는 타이틀만큼이나 그가 영원불멸의 젊음을 가지려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가 나를 대신해 경험한 다른 인생을 보고 싶었다.

 

열아홉의 청년 도리언 그레이는 화가 바질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알게 된다. 도리언은 초상화를 보며 간절히 바란다. 이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월이 흘러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와 젊음을 유지하고, 초상화가 대신 늙어가며 자신의 추함까지 짊어질 수는 없을까? 정말 신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바람대로, 그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게 되었으니까. 그는 늙지 않는다. 그의 아름다움도 변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초상화가 늙어가고 추해지며, 그의 온갖 죄를 흡수한다. 도리언의 젊음은 계속되고 초상화는 계속 늙고 추하게 변하며 그의 인생, 세월을 채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 하나로 시작된 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망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늙어가는 육체가 안타까워 젊음을 유지하고 싶다는 게 뜬금없는 말은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나이를 물었을 때, 실제 내 나이보다 어리게 나이를 말해주었을 때 괜히 기분이 좋다. 흔히 말하는 동안이라고 불린 거다. 시간이 채운 나이는 어쩔 수 없지만, 외모로 계산되는 나이는 어려지고 싶은 거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거다. 어디서부터 근원 했는지 모를 이 이론이 어느새 내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다. 조금 더 아름답게, 조금 더 젊게, 조금 더 즐겁게 사는 세상 속 주인공이 되고 싶은 바람. 화가가 그려준 초상화로 자기 외모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도리언은 그 아름다움의 영원성을 갖고 싶었다. 이 아름다움이 계속되길, 이 젊음이 영원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말했을 뿐인데 실제로 그렇게 되니 얼마나 놀라운가.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으니, 이젠 그 아름다움으로 앞으로의 시간을 사는 일만 남은 거다. 선하고 양심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며 남들과 똑같이 사는 것. 그에게 영원한 젊음이 있다는 특권을 준 것만 다를 뿐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변치 않는 외모를 선한 삶에 적용하지 않았다. 해리(헨리 경)와 한 권의 책이, 그를 아름다운 젊음이 아닌 쾌락의 길로 인도했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열아홉 청년 도리언은 서른여덟 남자가 되었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 젊음은 여전하지만, 그의 초상화는 더는 추해질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변했다. 이십여 년의 시간 동안 그는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아주 잠깐 그의 양심이 끓어올라 선하게 살면 초상화가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믿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선한 양심보다 쾌락을 추구하던 힘이 더 셌다. 자신의 아름다운 젊음을 등에 업고 욕망에 빠져들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퇴폐적인 쾌락이 도리언을 장악하고 잔혹함이 그의 비밀을 지켜주었다. 그는 기억을 짓밟아 망각하며 죄를 잊었다. 그의 불안함도 계속된다. 그런 삶이 그에게 남겨준 건 무엇일까.

 

잔인하게도 도리언에게 남은 건 허무한 바람이 만든, 쾌락만을 좇던 사람에게 주어진 파멸뿐이었다. 인간의 육체가 늙어가는 당연함을 자연의 섭리라고 말해도 좋다면 그걸 거스르는 일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내가 생각하는 삶이란, 인간의 노력으로 변화할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아는 일이다. 그 안에서 시도 자체가 불가한 일도 있는 거다. 순리대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지켜져야 할 불문율 같은 것. 나이 듦을, 늙어가는 육체를 인정해야만 하는 거다. 그럼에도 궁금했다. 허황한 바람이라도 한 번쯤은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가능할까? 영혼을 팔아서라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단지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일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나는 내 영혼을 담보로 젊음의 영원을 부여받고 싶은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느 쪽으로도 선택하기 어려웠다. 이미 이치대로 흘러가는 시간을 눈앞에서 보고 있기에 나에게 주어질 수 없는 시간을 상상하며 그 결말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어쩌면 도리언 그레이가 그런 나의 고민을 대신 해결해주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선뜻 선택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마음속 바람을 입 밖으로 말하고, 기적(?)처럼 이루어진 현실을 자신이 살아감으로써 대신 보여준 것 같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 시간을 선택한 자의 말로를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눈에 담아야 할 것은 영원한 젊음 같은 불가능이 아닌 주어진 삶을 제대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시사했다.

 

"죄는 사람의 얼굴에 저절로 드러나는 법이지. 감출 수가 없어. 사람들은 간혹 비밀스러운 악덕에 대해 말하지만, 세상에 그런 건 없네. 어떤 비열한 인간이 부도덕한 짓을 저질렀다면, 입가의 주름에서, 축 늘어진 눈꺼풀에서, 심지어 손의 생김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어." (273페이지, 해리의 말)

 

도리언을 대신해 그의 인생을 담은 초상화는 그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늘어갈수록 초상화는 변한다. 그가 쾌락을 추구하고 사랑을 무시하며 저지르는 죄악이 거듭될수록, 망각과 최면과 아편으로 잔인한 기억을 버릴수록 초상화는 불미해졌다. 심장이 없는 얼굴로 살아가는 그의 잔혹한 현실을 그대로 담고 있었던 거다. 그의 외모에 가려진 온갖 추악함과 비열함을 초상화가 내내 비추고 있었는데, 애써 피하기만 하다가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마주한 격이다. 영원한 젊음을 가지고 싶어 대신했던 게 얼굴 너머의 마음까지 비추는 거울이 된 것을 그는 몰랐다. 외면했다. 현실을 거스르는 욕망으로 파멸에 이른, 이런 결말이라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해리의 말처럼 사람 얼굴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게 있다. 아무리 감추고 가리려고 발버둥 쳐도 덮어지지 않는 게 있다. 세월의 흔적처럼 새겨진 주름, 험한 일로 거칠어진 손, 표정에 드러나는 마음. 사람이 겪는 자연스러움이 마음과 육체에 녹아들어 함께 가는 게 오늘을 살아가는 진정한 모습이다. 가끔은 흘러간 시간과 늙어가는 육체가 서글퍼지더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행복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

 

며칠 전, 오랜만에 대청소하면서 작은 사진첩 하나를 발견했다. 그동안 어디 있는지 몰라 한참 찾았던, 대학 시절 사진을 모아둔 앨범이었다. 한 장씩 넘겨보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참 촌스럽다'는 거다. 스무 살, 이십 대 초반을 즐기고 있었던 때다. 온갖 멋을 부리고 치장에 몰두하며 즐거워했을 텐데 지금 보니 정말 촌스러웠다. 그런데 사진을 보며 웃다 보니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진 속 내 모습, 지금은 연락도 되지 않는 친구들 얼굴이 예뻐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예뻤다. 촌스러움과 예쁘다는 게 동의어는 아닐진대, 어떻게 동시에 다가오는 말이 되었는지 의아하지만 정말 그랬다. 아름다웠다. 가만히,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외모의 촌스러움마저 아름다움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표정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화장, 어린애가 입은 듯한 어른스러운 옷, 어설프게 어깨에 멘 백, 불편해 보이는 구두. 그런 것들이 사진 속에서 다 사라지고 오직 우리의 얼굴만이 있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활짝 웃고 있는 표정, 햇빛에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린 자연스러움, 같이 머리 맞대고 뭔가 열심히 하고 있던 뒷모습, 공강 시간에 나무 그늘 밑에 누워있던 나른한 오후의 풍경. 좋아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사진을 바라보던 부러운 시선이, 내 삶에서 지나가 버린 청춘의 시간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시간을 보내며 행복했던, 즐거웠던 표정 때문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이라 불리던 젊음이 부러워서가 아니라 그때의 장면을 그리워했던 거다. 다시 찾고 싶은 그 시간이 아니라, 행복했던 그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였다. 이제 분명히 알겠다. 살면서 추구해야 할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오늘뿐이라는 것을...

 

소설이 가진 허구임을 알면서도 이런 주제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누구나 한번은 바랐을지 모를 내면의 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세상의 이치를 역행하는 일이기에 이야기로 구성될 수 있다. '만약에'라는 단서를 붙여 가지 못하는 길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 결말은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다. 영원한 젊음을 가진 채로 삶을 누리는 도리언의 판타지로, 자신의 모습을 속일 수 없는 잔혹한 삶을 마주하는 도리언의 현실로. 읽으면서도 내 눈이 자꾸만 후자로 기우는 걸 보면,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모습이 어떤 건지 이미 알고 있기에 그런 게 아닐까. 알면서도 한눈팔고, 몰라서 비켜가는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건 삶의 진정성뿐이므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진심으로 살아가는 이 순간만이 나를 만들고, 나에게 행복을 부여한다는 걸 거듭 확인해주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