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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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은 온다. 행복을 위해 선택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할 순간 말이다. 그 자리에서 멈추거나 다른 길을 걷기로 하거나 하는 선택으로, 행복이 아닌 순간을 살아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순간. 정세랑의 단편집 『옥상에서 만나요』 중 「이혼 세일」의 주인공 이재에게도 그런 순간이 온 것 같다.

 

"그냥,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 게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동산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어서." (「이혼 세일」중에서)

 

이재의 이혼 소식을 들었다. 친구들은 이재의 갑작스러운 이혼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이재가 주최한 이혼 세일에 무엇을 사서 가지고 올지 기대가 크다. 학창시절부터 이재는 특이하게 매력적인 아이였다. 처음에는 잘 몰랐어도 한 학기만 지나면 이재는 학교의 남학생 절반이 좋아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재의 외모는 평범했는데, 무엇이 이재를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걸까?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별것 아닌 옷도 이재가 입으면 예뻤다. 그녀가 가진 찻잔 하나마저도 기품 있어 보였다. 친구들은 그런 이재의 인생이 부러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동안 이재의 주위로 사람이 끓고 이재가 가진 것들이 우아해 보이고 이재가 매력적으로 보였던 건 단지 그녀의 운이었을까?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친구들은 이재와 교류했고, 이재와 가까이 지냈으며, 이재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아름답고 맛있는 것들로 행복했다. 그런 이재가 이혼을 하다니. 놀랄 수밖에. 더 놀라운 것은 이재가 이혼 세일을 한다는 거다. 이혼을 결정한 이재가 결혼생활 동안 사용하던 많은 물건을 판매한다고 했다. 그 소식에 친구들은 이재의 집에 모인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한 친구는 적금까지 깨고서라도 이재의 물건들을 살 거라고 했다. 여기까지 들으니 나도 이재가 궁금해진다. 이재는 누구인가, 이재는 어떤 사람인가...

 

처음 이 제목을 듣고 무슨 내용일지 궁금했는데, 이혼 세일이 펼쳐질 거라는 전개에 놀라면서도 흥미로웠다.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순간을 정리하는데, 보통은 마음으로만 정리하면 끝나는 거 아닐까 싶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물건까지 정리한다는 설정이 기가 막혔다.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런 깔끔한 정리가 이재의 다음 행보를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여러 인생의 순간이 있다면, 그 인생의 하나를 정리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이런 방식의 정리가 참 괜찮은 방법이구나 싶은 앎의 순간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의 친구가 이재의 집에 모여 이혼 세일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기까지의 심리가 담백하고 솔직하게 그려진 소설이다. 누구는 이재를 질투하고, 누구는 이재의 매력을 부러워했다. 그러면서도 이재를 사랑했다. 그러니까, 이재는 누군가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그 존재를 각인시킨 거다. 이재의 손맛을 따라갈 수 없어서 계속 노력하는 친구만 봐도 그렇다. 그 친구는 앞으로 이재가 없는 상황을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수시로 이재에게 부탁했던 밑반찬은 어디서 공수해오나? 이재의 손맛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데 그 입맛에 길든 입은 어떻게 달래줄 수 있을까?

 

그녀들이 부러워했던 이재의 결혼이 끝났을 때, 모두가 궁금했던 그 이혼 사유를 듣는다. 운이 좋았지만... 이제는 이혼의 이유를 말하면서 그녀가 운이 좋았다고 한다. 그게 운이 좋은 것이었나? 이재의 할 말은 더 남아있지 않았을까? 그녀가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이 더 듣고 싶은 이유가 있다. 남들은 모르는 그녀의 인생이 궁금했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그녀에게는 온통 부러운 것들뿐인데, 그녀의 이혼으로 이제 더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닌 게 될 것인지도 궁금했다. 이재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 속에 감춰진 진심들은 더 남아있을 것만 같다. '어디서나 위험한' 여자의 인생에서 조금 비켜 간 이재의 미래를 위해 친구들이 고사를 지내준 것이 이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결말처럼 들려서 아프기도 했다. 그리고 다짐하듯 이어지는, 이재가 놓치지 않고 달려와서 전해주었던 장아찌 누름돌. 삶의 맛을 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간절하게 전해지던 장아찌 누름돌이, 이제는 그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이에게 전해졌다. 장아찌의 맛을 결정짓는 것은 이재의 손맛도 아니고, 무의 종류도 아니고, 간장 때문도 아닌, 누름돌 때문이었다는 걸. 이럴 수가! 정말 찾아야 할 것을 든제야 찾은 느낌이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이재의 매력이나 생활, 인생은 결코 운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만들 때, 그 맛을 가장 중요하게 결정짓는 게 무엇인지 바로 알고 살아가게 될 때, 그때 가장 완벽한 맛을 낸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 인생의 안전도, 삶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도 운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음을...

 

이혼 세일은 무사히 끝났다. 너무 저렴한 가격으로 이재는 자신의 생활공간에 있던 많은 물건을 정리했다. 이재는 남김없이 떠나고 싶어서 좋았고, 친구들은 부러워하던 이재의 모습을 하나 가져온 것 같아서 좋았다. 이재의 손이 닿았던 많은 물건으로 그녀들은 또 다른 흔적으로 이재를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 이재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마치 그렇게 길었던 여행의 공백은 없었던 것처럼 마주하겠지. 인생의 큰 구멍 하나를 메우고 밟으면서 단단하게 다지는, 짧지만 시원한 느낌에 삶의 두려움 하나 지우고 건너가는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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