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빈말로라도 마음에 없으면 밥 한번 먹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스치듯 우연히 만나는 사이가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을 일이 일어나는 건 드물다. 그래서 그런 빈말에 마음을 두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내가 먼저 꺼내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언제였던가. 서른 즈음에 중학교 동창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인지 자주는 아니어도 그렇게 어쩌다 한번, 몇 달에 한 번 정도 우연히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웃으면서 인사하고 지내는 정도. 어느 날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친구가 나한테 언제 시원한 생맥주나 한잔하자고 그러면서 인사하고 지나갔다. 그 친구가 느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사하고 지나갔다. 그 친구의 제안이 씁쓸했던 건 빈말이라는 걸 고스란히 드러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언제 한 번 시원한 생맥주 한잔하자고 하면서 내 연락처를 묻지 않고 갔다. 몇 년 동안 몇 번을 지나치며 인사했어도 그 친구와 나는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그런 상대에게 내가 '다음에'라는 가정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술 한 잔'이라는 '다음에' 역시 기대하지 않았던 거다.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에'가 있을 수 없을 거, 아닌가

 

전작들을 꾸준히 챙겨 읽고, 개정판 특별판 한정판 등등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기존 출간작도 관심 두게 하는, 인터넷서점의 출간 알림을 설정해놓은, 나에게 이도우는 그런 작가다. 6년 만에 출간되었다는 이번 작품 소식이 반갑다. 느려터진 내가 다행히도 선착순 사인본을 놓치지 않았다. 힘들었던 건, 받아놓고도 바로 읽지 못하고, 이제 좀 읽어보려고 하니 폭염에 책을 손에 들 수 없었다는 거. 힘들지만, 읽어냈다. 사람을 읽고, 이야기를 읽고, 그들이 전하는 삶의 모습들을 읽었다. 아마도 특별한, 아주 특별한 뭔가를 기대하고 읽었다면 밋밋하고 재미없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이런 기대를 한 독자가 있겠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조금 기대했다. ^^) 이야기는 평범했고, 잔잔했다. 사람에 치이고 세상에 치이던 여자가 어렸을 적 자랐던 곳으로 돌아왔다는, 그곳에서 고교 동창이 작은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싶던 순간에 시골 동네의 작은 서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듣는 시간 때문에, 오래전 해묵은 상처부터 기억 속에서 잊으려고 애쓰던 상처까지 같이 찾아오고야 말았던,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찾은 것들 때문에 상처는 비워지고 마음이 채워진다다는 내용

 

 

 

 

 

 

 

 

 

듣고 보니, 별거 없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서 높낮이가 심한 감정을 읽는다거나 사건의 출렁임을 자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잔잔한 흐름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의 한마디, 의외의 장면에서 삶의 뭉클함을 찾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아아, 속이 시원하다."

이제 해원은 추운 것도 못 느꼈다. 실내복에 맨발엔 은섭의 슬리퍼만 꿰신고 나왔는데도 몸에서 이상하게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명여가 통쾌하게 외쳤다.

"그래, 다 망가져버려라! 내가 망가지는데 집이 멀쩡하면 되겠니, 같이 고장 나야지!"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145페이지)

명여 이모의 낡은 펜션으로 찾아온 해원은 이모가 왜 펜션을 방치하는지 몰랐다. 이 장면을 읽고 있던 나도 몰랐다. 그러나 명여가 통쾌하게 외치는 그 순간의 감정은 알 것 같았다. 답답함이 폭발하듯, 본인은 닫아두고 꼭꼭 눌러두면서 그 감정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단속하고 살아온 것 같은데, 고장이 난 수도가 폭발하듯 분수처럼 튀어 오르는 순간, 명여의 마음도 폭발했으리라. 아무리 단속을 한다고 해도 감정은 작은 틈새로라도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이건 뭐, 새어 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폭발했으니 얼마나 거대했을까. 이렇게 소리치고 싶던 순간이 명여에게 얼마나 많았을까? 담고 있자니 아프고 답답하고, 쏟아내자니 그게 감당이 안 될 테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자책의 순간을 조금은 더 끌어안고 있었으리라. (명여가 왜 자책하면서 15년을 살아왔는지는 소설의 후반부에 나온다) 이 장면을 읽는데, 몇 문장 안 되는 명의 외침을 듣는데, 갑자기 뭔가 확 터지는 것 같은 기분에 은근슬쩍 개운함마저 들었다. , 한파에 수도는 터지고, 물은 분수처럼 튀어 올라온 집을 얼음 왕국으로 만들었지만, 명여의 속은 시원했을 것만 같다. 그러면서 감정이 이입된다. 누구나 그런 순간 담고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차마 꺼내놓을 수 없는 말에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는 일들, 어디 대나무 숲에라도 가서 외치고 싶은데 그래서도 안 될 일들, 그게 담아두고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니까.

 

이게 시작이었나 보다. 서울 생활이 지친 해원이 강원도 시골의 이모 집을 찾아든 이유도 명여 이모가 외치던 이유와 비슷할 것 같다. 시원하게 쏟아냈으니, 이제 회복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거다. 이야기는 그 길을 참 천천히 걷게 한다. 당장 뭔가를 전환하는 게 아니라 서서히 걷는 길을 여는 것만 같다. 고장이 난 수도 때문에 펜션 호두하우스의 수리 기간은 열흘 정도 걸린다고 했다. 수리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명여 이모는 친구 수정의 집으로, 해원은 은섭의 집으로 임시 피난처로 삼는다. 그리고 서서히 상처를 비우고 마음을 담는 시간을 연다. 해원은 은섭의 서점 굿나잇책방에서 일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은섭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서점 일에 몰두하면서 피곤했던 서울에서의 시간을 잊는다. 일주일에 한 번 독서 모임에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친해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섞이는 법도 익숙해진다. 그리고 얼음 왕국이 되어 흉가처럼 보이던 호두하우스는 일주일의 시한부였지만 굿나잇책방의 이벤트 상품으로 활용된다

 

소설 곳곳에서 묘사되는 장면들이 눈앞에 그대로 그려진다.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독립서점의 분위기를 그리면서 읽게 되기도 하지만, 그 공간에 모여든 나이 성별 불문한 책모임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작고 허름한 기와집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펼쳐질 작은 서점 내부, 여름 내내 푸르게 자랐던 벼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겨울 논의 스케이트장,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 리어카의 뒷자리에 앉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승호, 뭔가를 계속 만들면서 손을 놓지 않는 소녀 감성 수정 씨, 엘이디 전구로 바꾸라며 영업에 열을 올리지만 그래도 책이 좋아서 책방을 찾는 거라고 믿고 싶은 근상 씨, 반항하는 이미지 뒤로 속이 꽉 찬 아마추어 래퍼 현지. 그중에서도 명여 이모의 표정을 계속 그리면서 읽게 되는데, 내가 바라보는 명여 이모의 얼굴은 항상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 말을 하지 못하는 나날들 때문에 명여 이모는 단 하루도 편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해원의 인생에 책임까지 느끼지는 않았을까? 상당히 복잡한 표정의 명여 이모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 한밤에 창으로 비친 달빛에 의지해서라도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할 말이 너무 많지만 할 수 없어서 곧 죽어도 계속 써 내려가야만 하는 사람, 그렇게까지 했건만 다 쏟아내지 못한 사람의 얼굴을...

 

전에 이모가 했던 말을 생각해봤어. 날씨가 좋으면 만나자는 건 너무나 기약이 없다는 거. 그러게, 좀 더 때가 되면, 상황이 좋아지면차일피일 미루게 되는 일들이 내게도 있었어. 이젠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을까?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401페이지)

 

어쩌면 우리에게 화해나 용서, 상처를 덜어내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무게가 없는 말들이 그 순간을 만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잔뜩 날 선 마음을 둔해지게 하기 싫었나? 나를 방어하기 위해 계속 뾰족하게 있어야 했던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더는 안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의 제목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다는 말은,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말과 같다고 명여 이모가 그랬다. 그건 만나지 말자는 말이라고. 그랬다. 그런 빈말들. '다음에'라며 약속 시각을 못 박지 않고 흐지부지 잊어주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은 말. 해원이 보영에게 지금은 너무 춥다면서 날씨가 좋으면 만나자는 말을 했을 때, 아마도 해원은 미루고 싶었던 것 같다. 기억 속 상처를 들추는 시간을, 그 상처를 다시 꺼냈을 때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을, 어쩌면 영원히 기억에서만 머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그런 상처들이 안에서 머물기만 한다고 좋은 걸까? 그대로 있어도 괜찮을 걸까? 아니다. 괜찮지 않으니까 우리는 매번 그 상처를 조금씩 들추고, 싸우고 화해하고, 괜찮아지려고 노력하는 거 아닐까. 그 괜찮아지는 시간은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는 건가 싶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갈 게 아니라, 먼저 찾아가서 그날 날씨를 좋은 날로 기억하라는 듯이. 결국은 그 상처도 치유도 내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 '너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이, 세월이 흐르니까 이렇게 용기를 내게 하기도 하는구나' 싶은 조금은 늦어버린 안심. 그래도 괜찮다. 이제는 손을 내밀어야 하는 순간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여야 하는지를, 날씨가 좋은 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되었으니까. '언제 밥 한번 먹자'는 것으로 시작한 빈말(?)'우리가 같이 밥을 먹은 그 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는 마음 가득한 말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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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0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20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장미 2018-07-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말말고 꽉찬 말로..... 우리도 밥 한번 먹어요.ㅎㅎㅎㅎㅎ
완전 진심!

구단씨 2018-07-28 00:11   좋아요 0 | URL
속을 꽉 채울 수 있는 음식을 골라봐야겠어요~!! ^^

다락방 2020-02-2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비 채널 돌리다 이 드라마를 하는 걸 알게 됐어요. 어? 이건 이도우 작가 책인데?! 저는 읽지 않은 책이지만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고, 오, 이거 분명 구단씨 님의 리뷰 있을거다! 하고 찾아왔어요. 역시 있었습니다! 헤헷 :)

구단씨 2020-02-28 15:38   좋아요 0 | URL
아... ^^
언젠가부터 드라마 방영 시작 예고도 많이 하더라고요.
알면서도 드라마는 못 봤는데, 반응은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