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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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다짐과 확신을 하는 게 살아가는 거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살아가야겠다, 하는 다짐을 하는 건 삶에 당연히 필요한 요소인 것 같았다. 짧은 인생이지만 경험으로 아는 확신들이 옆에서 그 다짐을 응원하며, 눈에 확연히 보이는 분명하고 좋은 길로 가는 것을 열어준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살면서 겪고 알게 되는 것들로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졌다. 어설프게 한 마디 더해보자면, 확신할 수 있는 건 우리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뿐이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아는 것과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이 보태지는 정도가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다. 지금 내가 아는 건 그 정도이다. 그러니 이 소설 속의 남자 다다시가 사는 방식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다가도, 그의 일상을 몇 달 옆에서 지켜보면서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는 거다.

 

다다시는 이혼을 하고 오래되고 낡은 집을 얻어 이사를 온다. 차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타고 다니던 차도 판다. 그가 구한 오래된 주택의 이곳저곳을 손보며 지금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요소들에 충실할 뿐이다. 집주인 소노다 씨가 그 오래된 주택을 다다시에게 임대하면서 내건 조건은 하나뿐이다. 내부의 불편한 부분을 수리하거나 변경하는 건 괜찮지만 집의 겉모습만은 그대로 유지해달라는 것. 다다시는 소노다 씨의 요구에 어긋나지 않게 집의 수리를 이행한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은 아니지만, 뭔가 빨리 처리해야 할 일 앞에서는 분명하고 빠른 결정을 하는 편이다. (물론 아닐 때도 분명 있지만...) 시골이나 자연의 정경 앞에서 시원하고 속이 탁 트인다는 감정의 발산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환경이 나의 주거지가 되는 것은 또 원하지 않는다. 자연의 푸르름과 느긋함은 그저 내가 가진 일상을 한 번씩 벗어나고 싶을 때 만나고 싶은 공간이다. 그러니 굳이 주택을 이상형으로 삼아 주거지를 결정하는 다다시의 선택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일상의 편리함을 버리고 여기저기 손 볼 곳이 많은 집을 선택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가 소노다 씨의 오래된 주택으로 들어가 집의 수리를 하나씩 해가면서 찾아가는 안정된 공간의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보이던, 연기가 집안으로 들어와 사용할 수 없었던 벽난로를 가나가 수리하던 그때, 무언가 삶의 방식이 찾아지는 기분이었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만났던 불륜 상대 가나를, 다다시는 이혼 후에 우연히 다시 만난다. 처음부터 다시 연애의 감정으로 가나를 대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가나와 친숙해진다. 그냥 연인 관계로만 본다면 가나와 다다시 사이가 재회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삶이라는 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선명한 감정 앞에서 선명하지 못한 태도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 가나는 아버지의 병시중을 해야 하고, 다다시는 가나의 환경에 어떤 제안도 쉽게 할 수 없다. 그런 가나가 다다시의 벽난로를 고쳐(?)준다. 연기가 굴뚝으로 좀 더 가깝게 빨려 들어가게 만들어주면서 벽난로 바닥에 벽돌을 몇 개 쌓는다. 집안으로 들어오던 연기는 벽돌 몇 개로 높이를 높여주니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것처럼 굴뚝으로 향해 피어오른다. 엉터리로 만든 벽난로에 안정되게 불을 피우는 일. 그건 벽돌 몇 개를 쌓음으로써 정상인 벽난로가 된 모습에서 가능해 보였다.

 

마치 우리 인생이, 가나가 경험한 기억을 토대로 쌓은 벽돌 몇 장으로 달라진 벽난로 같았다. 부족한 자리에 뭔가를 쌓으니 제자리를 찾는 느낌. 몰랐던 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기분. 다다시의 현재가 그랬다. 그는 알았을까? 그의 불륜을 아내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다가 이혼 시점에 꺼내놓은 일, 그가 아내와 이혼하게 될 거라는 일, 오래된 주택에서 소노다 씨가 돌아올 때까지 몇 년은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 시간이 너무 짧을 거라는 걸. 소소한 것 같지만, 마치 다 알 것 같지만, 처음 생각처럼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그 생활을 유지하는 게 정상이라고 여기며 살아왔겠지만, 이제 그가 바라는 정상은 혼자만의 삶이다. 혼자여서 편한 오늘의 일상인 거다. 저녁에 근처 공원을 느긋하게 걷기도 하고, 고양이와 눈을 맞추며 인사하고 밥도 챙겨주고. 그는 이 소설 제목의 한 단어처럼 우아한 삶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일상에 끼어들기도 하고, 예정에 없던 집을 짓게 되기도 하는 일이 인생에 비집고 들어온다.

 

"오래된 걸 이것저것 손보는 게 즐겁거든.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정원도 업자를 부르면 되살아나고, 다다미도 이불도 손질하면 새것이 되고, 장지도 덧문도 마찬가지야. 부엌 공사도 그랬어. 어둡지, 간장 냄새 나지, 전체적으로 기름때가 묻어 있었지만, 물론 그건 그것대로 운치가 있었지만, 싹 고쳤더니 몰라보게 좋아졌어. 수명이 다해가던 게 되살아나는 게 뭐라 말할 수 없이 기쁜 거야." (85페이지)

 

그는 다시 마련할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갈까? 아마도 혼자여서 편한 삶을 유지하면서, 그와 관계된 사람들 틈에서 감정을 쏟아내며, 소노다 씨의 처음 만났던 주택처럼 늙어갈 것이다. 물론 그런 흐름은 나에게도 적용되겠지. 알 수 없는 일투성이로 때로는 여유롭게, 때로는 다급하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겠지. 분명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인생에서,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그런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만은 선명하다. 아무도 모르는 내일을 살아가는 게 우리여서, 그렇게 살면서 채워진 시간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오래된 집 한 채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런 집을 하나 발견한다면, 그 오래된 집을 보고 다다시처럼 여기저기 손보면서 하나하나 바뀌는 집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을 만나게 될지도... 만약 그런 순간이 온다면 조금씩, 다시 고쳐가면서 그 공간에 머무르고 싶을 것 같다. 한 치 앞도 모를 내일을 사는 방법은, 그런 즐거움으로 오늘을 채워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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