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주사회의 필란트로피 - 필란트로피의 역사, 제도, 가치에 대하여 ㅣ 사랑의 열매 나눔총서 6
롭 라이히.루시 베른홀츠.키아라 코델리 엮음, 이은주 옮김, 최영준 감수 / 교유서가 / 2021년 8월
평점 :
보통 우리는 philantrophy를 "자선"으로 번역하며, 영한사전을 찾아 봐도 이 외에 별다른 뜻은 잘 안 보입니다. 형태를 분석하면 phil-은 "사랑[愛]"이요, anthrop-는 "인간"이라는 어원을 지님은 고교 과정 정도에서 무난하게 다루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p8의 일러두기에서 편집진은 이 단어를 "자선" 등으로 번역하지 않고, 다양한 학문에서 다양한 맥락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쓰이는 점을 고려하여 "필란트로피"로 그대로 놓아 둔다며 표기 태도를 밝힙니다. 이는 단순히 편집상의 한 지침일 뿐 아니라, 어느 정도 학제적 논문 모음의 성격도 띤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주제어, 키워드에 대한 큰 오해 없이 독해가 가능할지에 대해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도 있는 셈입니다.
서문에서 저자들은 일단 필란트로피를 "정의(definition)"합니다. 자선, 아니 필란트로피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도 이처럼이나 다양한 관찰 방법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행위로서의 자선은 그닥 모호함 없이 비교적 쉽게 그 외연과 내포가 확정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거론하는 정의상의 난점 중 대표적인 것만 여기 적어 보자면 예컨대 기부금 입학 전형에서의 기부 같은 것도 과연 필란트로피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냐는 거죠. 대뜸 "무슨 소리?"라며 반문이 나올 만하지만 사실 미국 유수의 명문대에서 그 돈은 널리는 인류 전체를 위해 유익히 쓰인다 할 만큼 기초학문 연구 용도로 요긴히 활용됩니다. 기업으로부터 이뤄지는 지원은 어떤 명시적인 상품 개발에 연계되지 않을 경우 좀처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그저 자신의 자녀에게 명문대 학벌을 얻어 주기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라고 해도 이를 쉽게 결격 판정 내리기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p24 이하에서 저자들은 구조적, 설명적, 규범적 관점에서 필란트로피를 입체적으로 정의하려 애 씁니다. 개인적으로 독자인 저는 여태 규범적 관점 같은 것은 법학에서나 쓰이는 방법론인 줄 알았습니다만, 법학 역시 철학에서 그 여러 유용한 도구를 차용하는 입장 아니겠습니까. 여튼 이 서문 파트에서는 필란트로피의 기원, 제도적 형태, 도덕적 근거와 한계, 등을 고찰한다고 미리 밝힙니다. 이 세 가지 주제를 1, 2, 3부에서 각각 다루며 서문 후반부에서 소제목으로 뽑은 "과정"은 필란트로피의 과정이 아니라 이 책이 나오게 된 제작, 편집 과정을 가리킵니다. 책이 워낙 흥미로운 편제와 내용이므로 독자에게는 이 대목 역시 흥미를 갖고 읽힙니다. 또 필란트로피는 주로 중세 이래 귀족과 종교 단체 중심으로 이뤄진 행태, 제도였으나 이 책은 저자들이 미국인들인 만큼 미국적 관점에서 미국의 현실, 현상을 중심으로 논의한다고 역시 서문에서 밝힙니다. 하긴 기여입학 같은 것도 지극히 미국적인 시스템의 일환이긴 합니다.
미국 역사에서 이른바 라버 배론(robber baron) 즉 강도 나으리들의 행태는 당대에도 악명이 높았습니다. 천민자본주의의 전형, 나아가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이 범죄와 윤리적 타락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19세기 미국 경제사는 암담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런데 당사자들도 바보가 아닌 만큼 그런 불리한 평판을 잘 알고 있었으며, 사랑하는 자손들이 앞으로 상속 받을 재산으로부터 별 무리 없이 기쁨을 향유하려면 자신들 살아생전에 어느 정도 조치를 해 놓고 죽을 필요가 있음도 인식하고 있었죠. 그래서 시작된 게 자선행위였으며 이 책 1부에서는 주로 이 점에 대해 역사적 개관을 진행합니다.
일단 자선이라 함은 공적(公的) 행위가 아니라 사적인 행위입니다. 법인의 경우 우리 법제에는 그저 재단법인, 사단법인 두 가지 형태만 있을 뿐이며 그나마 후자는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는 회사 등이 실질적으로 대부분을 이룹니다. 영국의 오랜 법제를 그대로 계수(繼受)한 미국에서는 종전에 여러 법인의 형태가 있었고 이들 중 일부가 상속재산 등을 관리하며 필란트로피를 본연의 기능으로 삼았다고 책에 나옵니댜. 영국식 시민법인과 자선법인을 합친 게 "민간 사단법인"이라 하여 미국 고유의 제도가 되었는데, 이에는 "공화주의 법인"이란 당대 미국식 개념이 그 기저에 자리했습니다. 책 저 뒤 p339 같은 곳에서 "공화주의적 전통", "공화주의 원칙" 등이 다시 거론되는 것처럼 이 개념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상위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대중 문학 작품인 <키다리 아저씨> 같은 곳에만 봐도, 코믹하게 사화사업가와 사회주의자라는 용어를 헷갈리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저 무렵의 미국은 "자기 일에나 신경쓰기(to mind your own business)"로 대변되는 자유주의와, 이에 대항하는 이타주의 내지 개입주의 사이에 매우 첨예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미국에서는 자선이란 개인이 개인에게 진정성 있는 선의로 행해야 하지, 어떤 전문 단체가 대횅하는 자선에 대해 깊은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p120의 "법인은 변종에 불과"라다거나, 책임 소재가 불명확하다는 (역사적) 논의는 이런 맥락을 먼저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또 이는 "집단은 본래 책임이 없다"는 오래된 서유럽의 개인주의 책임 개념과도 통합니다. 반대로 p128 이하에는 재단 옹호론이 나오는데 사실 이런 입장의 대립은 우리 시대에서도 결코 효력이 다한 게 아닙니다.
이 저자들이 이런 논쟁의 역사적 정리(와 해석) 다음에 재미있게 덧붙인 건, 이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법인 제도가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의 논의입니다. p155의 표에는 도금시대(gilded age)와 현대의 "필란트로피"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가 잘 정리됩니다. p161에는 놀랍게도 필란트로피의 역사에도 1930년대에 "혁신주의" 운동이 일어났다고 기술합니다. 여기서 혁신은 주로 자선 시스템상의 비효율 제거 등을 가리킵니다. 또 이 지점에서부터 과학과 필란트로피 간의 결합이 흥미롭게 이뤄집니다.
5장부터는 애플의 CEO 팀 쿡이라든가, 혹은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처럼 현대적인 주제가 더 자주 거론됩니다. 우리도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CSR에 반대하는 입장이란 정도는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더욱 깊이, 그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분석됩니다. 앞선 장에서는 "필란트로피는 민주주의를 파괴한다(혹은 그럴 수 있다)"는 주장도 다각도로 분석되었는데, 바로 여기서부터가 이 책만의 재미(물론 학문적인 책이지만)가 돋보이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필란트로피가 시스템화하고 나아가 이익극대화의 원칙마저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들면 종래의 자본주의, 나아가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작동하겠냐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있는 거죠. 사실 깊은 연원을 따지자면 필란트로피는 중세 귀족제 사회라든가 신성 불가침의 영역을 유지해 왔던 가톨릭 등 종교단체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필립 코틀러라든가 많은 학자들은 이미 CSR이 단순한 마케팅이나 PR을 넘어 기업의 이익극대화와 공존할 수 있다거나, 아예 필요조건이라는 입장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이 책 p224 이하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아서, CSR은 기업의 재무가치를 감소시킨다는 건데.. 여기서 요즘 핫한 MSG에 대한 재고찰도 다시 등장하네요. 찬이든 반이든 일류 학자들의 논쟁은 실증과 통계에 바탕을 둔 것이라 그 추이가 참으로 볼만합니다. 데이비드 엥겔 같은 이는 기업이 "처벌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갈(go away with) 수 있을 때에는 법을 지키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경제학에서 예전부터 완전경쟁시장이라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주요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 건 "정보의 비대칭성 극복"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식이 일정 집단이나 계층의 독점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책의 제7장에서는 도서의 저작권을 둘러씬 구글의 소송을 집중 분석합니다. 이는 법률적 관점에서 봐도 재미있을 뿐 아니라, 과연 우리 시대 필란트로피의 한계와 근거가 어디서부터 시작하며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압축적이고 극적이며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또 이제 "필란트로피"의 개념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확장될 수 있는지도 독자들이 비로소 체감할 수 있습니다. "자선"이라 범주를 한정하면 이 사건은 논의 대상이 아니지요. 예전에 화제였던 카피레프트 이슈도 다시 떠올려 볼 만합니다.
경제학에서 또하나의 오랜 동안 치열한 논쟁거리가 바로 "무임승차자 문제" 혹은 외부 경제 이슈입니다. 8장에서는 바로 무임승차 문제가 집중 조명되며, 그동안 경제학개론 수준에서 피상적인 공부를 했던 이들은 비로소 이 문제가 어떻게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를 통째 흔들 수 있는지 확인 가능합니다. 요즘 진보 진영에서는 영리법인의 대안으로 "조합"을 자주 거론합니다. 또 이 파트(논문)의 저자인 에릭 비어봄 하버드대 교수는 p350 같은 곳에서 "국가의 이미지=상비군을 보유한 비영리단체"로 규정하곤 합니다.
"민주주의적 평등"은 어떤 개념 요소를 필수로 삼을까요? p369에는 이것이 보기 좋게 도시화됩니다. 사실 평등이라는 절대적 이념가치를 떠올리면 필란트로피, 비상 수단을 통해서라도 평등에 보다 가깝게 다가서려는 노력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인용되는 중 민주주의를 "시장민주주의"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무상공여를 심각한 체제 위협으로 볼 수밖에 없죠.
기부에 있어 기부자 자신의 "재량"이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책에서는 "재량적 관점"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특히 국제단체를 통해 기부를 실천하는 쪽에서 보면 무제한 재량은 도리어 필란트로피를 휘청이게 만듭니다. 아니 내 돈으로 내가 좋은 일 좀 하겠다는데 그걸 (돈을 직접 대지도 않는) 타인들의 의사 결정에 따라야 한다니 이런 불힙리가 있냐며 반발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꺼운 책 전체를 다 읽고 자선, 나아가 필란트로피의 문제가 순전히 미국으로 분석 대상을 한정하여 봐도 얼마나 복잡미묘한 문제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만큼, 이런 입장의 차이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지성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무엇이 도달 가능한 최상의 공동선인지 깊이 숙고하고 합의점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