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편지 - 붙잡고 싶었던 당신과의 그 모든 순간들
이인석 지음 / 라온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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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문명의 발달은 확실히 인간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산다 한들 두어 리만 떨어져 있어도 물리적으로는 이야기를 나눌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게 옛 사람들 사는 모양새였습니다. 하물며 다른 시, 도, 심지어 외국에 나가 머무는 친지, 연인, 자녀와라면, 아무리 화급한 사정이 생겨도 무슨 수로 의사를 전달했겠습니까. 시외, 혹은 타국의 가입자와 대화할 수 있는 유선전화의 발명은 그래서 획기적인 쾌거였습니다. 실내에 머물면서 회선의 제약을 받는 일 없이, 이동 중에도 상대와 대화할 수 있는 무선통신은 더욱 놀랍습니다.

헌데, 우리는 이런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너무 많은 것을 잃지 않았을까요? 이 책을 펴낸 이인석 님은 "편지 수집가"입니다. 모으신 편지 중에는 한국 안에서 객지 생활을 하며 부모님과 가족의 안부를 묻는 내용도 있고, 외국에서 힘들여 일하며 노동의 대가를 가족에게 송금하는 분의 절절한 사연도 있고, 주한미군으로 보이는 청년이 고국의 애인에게 보내는 영문 편지도 있습니다(영문의 경우 편저자께서 번역도 한 후 이 책에 실으셨네요. 책에 실린 원문의 사진은 달필의 로마자 필기체입니다).

어떤 이들은 편지 쓰기가 그리 내키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 위로, 격려, 고백을 억지로 줄글로 쓴다는 건 누구에게나 고역이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애써 펜을 들어 편지를 쓰는 일은 벌써 자신의 마음가짐을 청신(淸新)히 먹어야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편지를 써야겠다 싶어 단정한 자세로 펜을 쥘 때, 벌써 한 번은 명경지수 같은 자세를 되찾습니다. 행여 수신인이 나의 글을 읽고 마음 상할 수 있으니, 지우고 고치고 말을 가다듬는 중에 나의 인격이 바로잡히기도 합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과정 그 자체가, 착한 마음의 회복으로 이르는 의미 깊은 수련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편지는 물론 당사자 사이의 내밀한 소통입니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이 설마 반 세기 뒤 어느 수집가분의 정성에 의해 책으로 펴내질 줄을 미리 알고 문장을 새삼 가다듬어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사적(私的)인 공간의 말들이라 해도, 편지를 쓰는 이들은 막말을 함부로 내뱉지는 않습니다. 자제하고, 반성하고, 온유해지려 노력하고, 혹 격정을 채 잠재우지 못해도 글로 쓰는 과정이니만치, 종이에 적힌 어휘들은 점잖고 삼가는 태가 배어납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벌써 화가 줄어들기도 합니다. 반면, 상대의 배신, 게으름, 표리부동을 알아채고 "내 이 녀석을 가만 두나 봐라!" 하며 이동전화를 꺼내 드는 이들 입에서는 무슨 말이 나올까요? 우리는 몸이 편해진 만큼 그 남은 여유를 선용하는 게 아니라, 원색적 감정을 격발시키는 데에 낭비하며, 마음은 그만큼 더 거칠어집니다. 내 인격에 상처를 내는 자는 바로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내 자신입니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은 그저 애모하는 정, 보고싶어 사무친 마음만 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50여년 전 월남에 파견된 장교로 보이는 남편은, 고국의 아내가 왜 자신의 마음을 바로 헤아리지 못하는 지에 대해 야속해하고 분개합니다. 서신을 주고받아도 오해가 풀리지 않자 예정된 송금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하고, 이동전화로 로밍하여 바로 통화가 가능한 세상이었다면 대판 싸우고 바로 이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부부들이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반면 저 시절엔 통신의 불편이 "숙려 기간"을 베풀었고, 편지가 자상한 중재 알선자 노릇을 대행했던 셈입니다. 마셜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언이 생각나는군요. 편지에 담긴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그 이전에 편지 자체가 사람 사이의 정을 이어주는 심부름꾼입니다. (이 와중에도 어디어디 땅을 미리 사 둘 것이며, 누구에게 논밭을 사 주라며 처세와 재테크[당시에는 그런 말이 없었겠습니다만]에 열중이신 발신자[남편분]의 마음씀이 엿보여 너무도 흥미로웠습니다)

"내 앞으로 다시는, 편지에다 기쁜 나쁜 말을 적지 않으리다."

글쎄 보십시오. 이렇다니까요. 편지는 그 자체로 우리 마음을 순화시켜 주는 진정제입니다. 상대의 나빠지는 기분도 기분이지만, 편지에다 대고 몹쓸짓을 한 듯 내 자신이 못나보인다는 겁니다. 예전 분들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편지는 또한 요즘의 문자메시지, 통신체 따위와도 달라, 하오체 등 고아한 문투를 써야 제격 제맛이었습니다. 요즘 흥행인 영화 <킹스맨>에도 그런 말 나오지 않습니까? "Manners Maketh Man."

"겉봉투를 보니 초면이시군요."

물론 편지 안에 사진을 동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가 초면인지 아닌지는 눈으로 봐야 아는 법인데, 어찌 겉봉투로 판단하겠습니까? 이는 앞면에 적힌 이름자가 낯서니, 익히 교류하던 지인은 아니라는 뜻(그래서 더 반갑다는 정)을 저렇게 재미나고 멋스럽게 표현한 거죠. 편지를 주고받는 이들은 이처럼 일상의 대화에서도 여유와 품격을 남달리 쌓는 혜택도 누린 겁니다.

"여태까지 성장하면서
이런 서신을 수견하기는 처음입니다."

오래전 분들의 소통이다 보니 오늘날 우리에게는 생경한 어휘도 많이 등장합니다(예를 들면 "아빠"의 낯선 용법, "쏘제" 같은 시대상을 반영한 말). 우리가 주관적으로 낯설게 느껴도 국어 사전에 등재되어 있으면 엄연히 자격을 갖춘 우리말입니다. 그러나 "수견"은 사전에도 없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받을 수(受), 볼 견(見)을 써서, 보다 정중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임의로 고안된 어휘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는 순우리말 접미사 "~님"도, 점잖은 서신 중에서는 한자로 써야 격이 맞다고 여겼거든요(이두?ㅋ). 저 말은 그저 "받아보다"의 뜻이겠습니다. 문법, 어법 오용을 지적한다기보다, 예전 분들의 삼가고 조심스러워하는 그 태도가 흐뭇해져서 하는 말입니다.

"당신의 뺨에 베에제를!"

이는 대학생들이 당시 낭만을 풍기려 현학을 즐기던 풍을 반영하는 어투의 좋은 예겠습니다. 어원은 프랑스어이겠지만, 아마 일본 대중 문학에서 남발되던 투를 따라한 흔적이겠죠. 우리가 쓰는 일빠체(이런 말부터가 정제된 어휘가 못 되지만요), 오타쿠체에 비하면 그나마 성숙함, 조신함이 느껴져 좋습니다.

중동의 열사와 싸워 가며 일하던 근로자들의 애환, 그보다 훨씬 전 한국전 당시 고향의 농촌에서 아들을 기다리던 부모님께 띄우는 서신, 월남전에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 "나는 짐승이 아니다"를 절규하는 청년, 신문사 편집위원실에 서신을 보내 펜팔 친구 하나를 알선해 달라는 다소 해학적인 사연,... 편지들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온갖 생동하는 감정과 욕구, 이해, 공감, 애련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고, 때론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 몸짓도 투영됩니다.

오늘,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문자메시지, 페이스북, 트위터 멘션이 아닌, 편지를 한번 써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손으로 정성 들여 수를 놓듯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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