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오스카 - 호스피스 고양이가 선물하는 특별한 하루
데이비드 도사 지음, 공경희 옮김 / 예문사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책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그 서두가 얼마나 함축적인 문장이 쓰였는지를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멋만 부린 의도가 드러나서도 곤란하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스피스 고양이 오스카의 실제 동선(?)을 따라 담담하게 술회된 이야기들(실화)이 대부분입니다. 오스카에게 너무 감정 이입하지도 않고, 저자께서 주목하는 건 분명히, 의지할 데 없는 노인 병약자분들일 뿐, 오스카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고(혹은 독자인 우리들에게 기대를 크게 걸라는 듯) 사연을 풀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런 태연한 태도 덕분에, 이 책에서 고양이 오스카가 펼치는 여러 "활약, 능력"은 다분히 신기하게, 혹은 신비하게 들립니다. 저자께서는 의학박사이자 명문의대의 교수진이므로 이런 에피소드들이 더욱 신빙성을 갖게 되죠.

사실 "신빙성"이란 말은 좀 어폐가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온 여러 재미있는 실화들은, 그런 선입견이나 짐작을 갖고 보면 "허, 그럴 수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구?"처럼 거리를 둔 무관심한 태도로는 그저 일상적 수다처럼 간주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제가 이 책을 다 읽은 후 이야기를 추려서 주위에 들려 주니, 전하는 사람의 태도가 건조해서인지 그냥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더 많더군요. 그러니 뭘 믿고 안 믿고의 문제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시 저자님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자기 일을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자신의 일터가 멋져 보인다." 대개 우리 동양인보다는 서양인들이, 영혼과 육신이 완전 사멸하는 "죽음"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종교가 그만큼이나 번성했고, 아직도 "죽어서 지옥 가는 게" 그만큼이나 공포의 대상이겠죠. 그러기에, 죽음을 앞둔 노인들을 수발하고 간호하는 시설에서 일한다는 게, (저자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대체로 비슷한 우려를 부르는 것 같네요. 우리는 그저 보수만 넉넉하면, 그리고 육체적으로 아주 힘든 수고만 따르지 않으면 그 직장의 환경에 대해선 대체로 무관심한 편 아닐까요? 더군다나 저자처럼 시설의 감독자 내지 핵심 사무 담당자인 "닥터"라면 그가 어느 병과에서 근무하는지를 놓고는 "아 괜찮겠네" 정도로 넘어가는 게 보통일 겁니다.

저자는 자신의 근무처를, 적성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경우에 가깝습니다(미국의 많은 직장인들이 그러하듯요). 실제로 저자가 관찰하는 노인 환자분들은, 죽어가는 자신의 신변을 숭엄하게 정리하고, 주변에 적잖은 배려를 베풀며, 어쩌면 생전 그 어느 시점보다 더 인간적인 자신을 찾아가는, 가장 대하기 편안하고(막 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존엄한 존재들입니다(저자에게는요). 우리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도 흐트러지고, 어린아이처럼 자제력도 잃고, 무엇보다 배변 등의 습관에서 최소한의 품위도 잃은 채 동물에 가까워지는 추한 존재들... 이런 생각을 가져선 안 되겠으나 이게 우리의 정직한 태도나 실정에 가까운 표현일 것입니다. 저자분은 최소한, 자신의 직무와 환경, 그리고 환자들을 이와는 정반대의 자세, 소명의식으로 대하는 분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에는 아마도, 양친 모두가 메디컬 닥터였던, 흔치 않은 성장 환경에 크게 힘입은 바 있을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게 마련이죠. 부모는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깊은 지적 소양과 확고한 도덕성으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법입니다.

이런 저자에게도, 처음 부임해 왔을 때 이미 이 시설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고양이들이 크게 살갑게 와 닿지는 않았나 봅니다. 처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다 대고도 절을 한다는데(우리말 속담은 참 표현이 실감나죠 ㅎㅎ), 어디까지나 오차 없는(혹은 드문)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생리 현상을 그 오랜 시간 동안 공부한 닥터로서, 무슨 고양이가 예지력을 갖는다느니 하는 "미신"에 대해서라면, 아예 고양이를 실물로 만나기 전부터 나쁜 선입견을 가졌을 만도 합니다. 허나 그 역시, 많은 환자들의 케이스를 다루고 나서, 실제로 죽음이 임박한 이들의 상태를 고양이가 용케 알아채곤 하는 "능력"의 타당성을, 자기 자신이 직접 다룬 환자의 통계로 실감하고 나서야 다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었네요. 척척 맞추는 데야 뭐라고 트집을 잡겠습니까. 이를 "신비"의 영역으로 몰고가지 않으려면, 고양이의 센서(감각 능력)에 여태 인간이 알아내지 못한 어떤 특별한 기제가 존재함을 해명하는 수밖에 없죠. 설명이 이뤄지지 말라는 법도 없지만, 문제는 "죽음이 임박함"을 어떻게 정의할지 의학계에서도 아직 완전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장기 기능의 현저한 둔화? 세포 상태의 질적인 단계 변이? 무엇으로 정의하든 간에, 고양이가 "감지'하는 그 어떤 바이털 사인의 크리티컬함이 기준이 되면 대단히 실용적이긴 할 것 같네요.

그러나 우리가 호스피스 고양이의 신통함을 절감하게 되는 건, 그 현저한 비사교성(ㅎㅎ 이 이상한 성격 규정에 대해서는 책을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차원에서 환자와 나누는 그 신비한 정서적 교감입니다. 사람 중에는 뇌의 손상이나 불구 상태 때문에 타인과 정서적 교류를 선천적으로 못 나누는 이가 있다는 게 최근의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 연구 결과를 터무니없이 왜곡하는, 진성 교감 불능자들이 부쩍 늘어나 뭔가 한 마디씩을 떠드는 것도 희극적 풍경 중 하나입니다만, 사람이 타인의 감정을 알아채고 빨리, 혹은 적절히 반응하는 능력 자체가 아직까지는 미지의 베일에 싸여(쌓여 X) 있는 게 또한 사실입니다. 이 책에 실린 우리 새침한 오스카의 신기한 능력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면, 역으로 우리 인간의 교감 메커니즘에 대해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니, 어쩌면 그저 우연의 일치이거나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착각의 영역으로 남겨 두어야, 은근한 기대를 몸에 받은 고양이들이 제 할 일(?)을 더 열심히, 더 효율적으로 해낼 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사물과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척 남겨 두는 게 더 현명할 수도 있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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