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의 분실물센터
브룩 데이비스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오랜 예전에는 질병으로 고통을 겪거나 흉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자체가, 어떤 죗값이나 치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고도 하죠.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고 아픈 게 환자의 책임은 아닌데, 예를 들어 나병환자 같은 이들은 천형(天刑)을 받은 이들이라 해서 일반인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학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엔 의학과 사회 안전망이 발달하여 이런 무지몽매한 말썽이 일어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당한 학대와 비인도적 처사가 사회에서 아주 없어진 건 아닙니다.

질병이야 혹시 당사자의 부주의, 부덕(不德)이 그 원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육체가 늙고 쇠약해져 생산에 참여할 수 없고, 정신 능력이 감퇴하는 건 인간인 이상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노인들이 사회에서 괄시를 받고, 심지어 제 친자식들에게도 버림 받는 모습은, 양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그게 설사 나와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분들의 사정이라도 보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편, 이제 갓 취학을 준비할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라면 어떨까요. 아이들이야 아주 예쁘거나 덜 예쁜 차이만 있을 뿐, 어린 것만으로도 사랑을 받는 존재이니 별 걱정이 없지 싶지만, 그 아이가 예컨대 고아라든지, 혹은 범죄의 피해자라든지 하는 뒷사정이 알려지면 쓰다듬던 손을 괜히 치우는 게 보통 어른들의 심리 아닐까요. 그래선 안 되는 거죠.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아이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사정을 두고 유형 무형의 불이익을 주는 건, 그게 어른으로서, 또 양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닙니다.



이 소설에는 이처럼, 딱히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여러 이유로 상처를 받고, 그 상처가 덧나고, 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온갖 소동과 낭패스런 말썽이 벌어지다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흉진 자리를 봉합하게 되는 긴 사연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신이 성치 못하며 그 부작용으로 성깔이 아주 괄괄해진 할머니(애거서), 정신은 오히려 젊은이들보다 더 말짱한 듯하나 깊은 상처 때문에 노망의 가장을, 반 강제로 행하게 되는 할아버지(칼), 철없고 엉뚱한(그 또래들보다 더)데다 연이은 이별, 상실, 죽음을 접하고 지금 극히 혼란스런 지경에 빠진 여자아이(밀리), 이 셋의 "탈출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탈출"이라 함은 탈주자의 의지와 주체성의 산물인데, 이들이 행하는 탈주는 사실상 "정상인들로부터 떠밀려나는 축출"에 가깝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감정과 양심, 진정에 따를 뿐인데, 얽히고설킨 여러 오해와 갈등이 그들을 자꾸 주변, 경계 밖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아픔에 대처하겠다는 최소한의 바람조차 사회에 의해 기각되어, 급기야 범죄 수배자 신세로까지 전락하는 웃지 못할 풍경에까지 끌어들여지고 있습니다.

세 사람이 뜻하지 않게 공동으로 나서게 된 기이한 여행은, 이 책 표지에 나온 대로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읽기로는, 이 세 명은 "우연한 상실"에 의해서만 아픔을 겪게 된 게 아닙니다. 칼은 아내를 잃고, 비정한 아들(과 며느리)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혹은, 버림을 받기 직전 자발적으로 집을 나왔죠). 늙은 과부 애거서는 마을 사람 모두에게 미친 노파 취급을 받았습니다. 밀리는... 책을 몇 십 페이지 넘기고 나서야 명시적으로 경위가 밝혀지니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역시 "잇단 상실 이후, 상실을 넘어서는 큰 시련"을, 사려 밝지 못한 "누구"에 의해 겪게 된 피동적 비운의 주인공입니다. 까놓고 말해, 이 셋은 "무엇인가를 잃은 이들"일 뿐 아니라, "누구에게서 버려진 이들"이란 뜻입니다.

원제목을 보면 "LOST, FOUND"입니다. 영어의 lost는 뜻이 모호한데, 1) 누군가에 의해 잃어버려지고 다시 찾아지길 간절히 바라게 되는(missed) 경우가 있겠고, 2) 그냥 유기된(abandoned) 경우가 따로 있겠습니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3) "갈 곳을 잃은 채 헤매는"의 뜻을 언제나 가지겠고요. 이 소설의 "3인조"는 2)+ 3) 입니다. 소설 종반쯤에 가면 밀리(밀리선트 버드)의 입에서 "유기"라는 말이 그대로 나옵니다. found는 그럼 무엇인가, 이들이 참된 가족, 혹은 동반자를 따로 구하기라도 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3인조 개개인은 너무도 취약한 지위에 있는 이들이라, 심지어 서로가 서로에게조차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찾아진 건", 매니(이게 뭔지는[...] 책을 직접 읽어 보십시오)를 저 해안 절벽 밑으로 던져 버리고, 고독과 상실, 소외의 공포를 정면으로 바라보겠다는 달관의 마음가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소외되고 핍박받아온 그들에게 온전한 보상과 희망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의는 소설 결말에 가서도 실현된 건 아닙니다.



상처는 과연 "힐링"될 수 있을까요? 크게 흉이 진 피부에 세월이 많이 지나도 웬만해선 옅은 자국이라도 남는 것처럼, 마음의 상흔은 말끔히 치유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힐링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망각이 그를 대신할 뿐입니다. 우리 잘못이든 아니든, 상처는 일생을 통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 상처가 영혼의 다른 부위에 건강한 자극을 주어 성장시켰다면, 그 상처는 인격의 개성으로 승화될 수는 있습니다.그렇지 못하다면, 그 상처는 유기체 전체를 괴사시키는 겁니다. 흔히 쓰는 비유로 "껍질이 깨지는 아픔"이라든가, "조개가 진주를 품기 위해선..." 같은 것들이 다 이런 피치 못할 우회적 성장 경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 "3인조" 역시, 상실과 소외를 그 자체로 받아들였을 뿐 어떤 대체품을 필사적으로 구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구할 수 없는 걸 구하려 해 봐야 자기 상처만 도질 뿐입니다.

캘굴리(중학교 사회 시간에 금 산지로 유명한 도시라고 우리가 배운)로 가는 도중 우연히 만난 착한 버스 운전수 스텔라가 이 세 사람을 도우려 듭니다. 하지만 셋은 우연찮게도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거나, 사실상 거부하고 또다시 작은 엑소더스를 벌입니다. 스텔라 아니라 그 누구도 이들을 도울 수는 없었던 것이며, 이는 자신의 시련은 결국 스스로의 노력 말고는 어떤 외부의 힘도 기댈 수 없다는 걸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다닌 학교가 공부 말고 자신의 개성을 키워주는 시스템이었다면', "내가 다니는 회사가 애플처럼 직원을 존중하는 조직이었다면.." 다 남탓, 환경탓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능자들의 현실 도피 주문에 불과합니다. 이 책에는 애거사의 입을 빌려, "우리 때에는 (방황과 탈선의 시기라는) 틴에이저란 말이 없었지! 네 살 이후면 요람을 박차고 나와 제 앞가림을 해야 하는 법이거든!"라고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물론 웃자고 삽입한 대사이겠습니다만, 속보이는 언사로 자기 합리화를 하려 드는 불성실분자들에게는 경종을 따금히 울리는 의의가 충분합니다.

개인적으로 요즘 호주 출신 작가들의 역작을 많이 읽게 됩니다. 중견작가 리언 모리아티의 <허즈번드 시크릿>과 이 소설(젊은 여성 신예의 데뷔작입니다)은 두 군데 닮은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성 버스 운전수가 조역으로 등장한다는 점(^^;:), 다른 하나는 결말에서 전지적 작가가 주인공들의 미래 사정을, 느닷, 주루룩, 후다닥, 그리고 묵시적으로, 읊어 준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시련이 있고 장애가 발을 밟아도 "삶은 계속되기 마련"입니다. 한국어 번역제목은 보시다시피 <밀리의 분실물센터>인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이 이렇게 옮겨진 데 대해 다소 코믹한 느낌마저 듭니다. 인생을 어떻게 달관하고 조망할 것인지, 천진한 눈, 노망한(...)눈이 교차하며 리사이트하는 긴 여행기, 한번쯤은 주목하고 넘어가야 할 인생의 이면 그 (의외로) 진지한 진단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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