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의 자기 시험을 위하여 Bridge Book 시리즈 2
쇠얀 키에르케고어 지음, 이창우 옮김 / 샘솟는기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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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없이 깊은 명상 속에서 자신과 마주할 때 비로소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자신의 무지 한계 바깥의 것을 범주적으로 적대하며, 현명한 사람은 무지에 직면하여 비로소 겸손을 배우고 (감히) 영원을 응시하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도 극한의 공포와 무력감 끝에 신을 대하는 다른 방법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데,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도 널리 읽혀 온 키르케고르(키에르케고어.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름) 역시 그의 저술 행간 곳곳에 그런 깊은 경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의 저술들)는 꼭 중등교육 윤리 교과서에서 배워서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한국 독자들이 (믿는 종교에 무관하게, 혹은 무교라도) 교양과 품격 있는 대화를 위해 필독서로 읽혀 왔습니다. <잠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같은 책은 꽤 유명했었으나 근 한 20년 사이 무슨 곡절인지 필독서 범주에서 사라져 버린 듯합니다. 여튼 파스칼의 <팡세>처럼, 그의 청아하면서도 맑고 정직한, 그리고 심오한 고독은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들에게 폭 넓은 호응을 얻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래, 그러나 성경은 원어로 쓰여 있다니까."
이 말은, 성경 한번 꼭 읽어 보라고 권하는 여자친구에게, 남자가 대꾸하는 대목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읽을 생각 없어." 같은 메시지를 에둘러 표현하는 거죠. 원어(헤브류어, 헬라어)를 내가 어떻게 읽느냐며 엄살을 피우고 사실상 거부하는 건데.... 키에르케고르의 시대 덴마크는 물론 신교(新敎)를 받아들인지 꽤 오래 지난 시점이었습니다만 본디 세속적인 이들 국민들은 서서히 교회 다니는 빈도를 늦춰 가고 있었죠. 당연히 넉넉히 세속화한 풍토 속에, 따분한 성경을 뭐하러 읽느냐는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올 만했습니다. 지금은 복지 국가 시스템이 잘 자리잡혀 세계적으로도 넉넉한 삶을 누리는 그들이지만, 이 책 출간, 그리고 저자의 죽음 십 수 년 후에는, 유럽 열강으로 부상한 프로이센과 전쟁에 휘말려 영토를 잃고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여러 모로 격동을 앞둔 전환기, 많은 방황을 그 국민들이 겪고 있었을 무렵이었겠네요.

이 간단한 (가정 속의) 대화를 보면, 왜 키에르케고르가 시대를 초월하여 세계 곳곳에서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는지 그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끝없이 깊은 사유의 세계를 구축한 인물이지만, 독자들과 대화할 때 한없이 낮은 레벨로 내려와 격의 없고 솔직한 소통이 가능한 특별한 능력까지를 지녔던 것입니다. "당신의 소박하고 속된 고민, 내가 이미 다 이해하고 있다." 성경 읽기 싫고 도덕을 묵상하기 버겁지만, 그래도 이대로는 곤란하겠다 싶은 많은 이들의 고뇌와 망설임, 죄책감, 갈증 등의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 깨끗한 언어로 빚어내었기에, 그의 책은 올 타임 스테디셀러로 우리 곁에 남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 몰랐다면 그건 이미 구세주도 아니고 독생자도 뭣도 아닙니다. 지금은 기적을 행하기에 군중들이 몰려 들어 그를 환호하지만, 곧이어 더 강고한 세속 권력이 들이닥쳐 그를 어떤 식으로건 징죄하고 처형하려 들 줄(그리고 이 어리석운 군중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를 향해 침을 뱉고 조롱하리라는 미래를) 그는 이미 알았습니다. 요나 역시 현명하고 선택받은 이였기에, 그의 운명을 내내 피해다녀 마침내 고래 뱃속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죠. 그저 예언자일 뿐이었던 요나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점에서까지 차이가 났던 것입니다. 그는 매순간 자신의 운명을 명확히 깨닫고 있었으며, 한 순간도 이를 거부할 마음을 품은 적 없습니다.

"그래, 그분은 피할 수도 있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처음 깨달을 무렵 무한한 환희와 선택받았다는 벅참이 느껴진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곧 무거운 책임감, 나아가 세상과의 충돌 때문에 닥쳐올 엄청난 갈등의 예감으로 바뀌며, 이때 선택받은 자는 현명하기에 이 모든 예감이 곧 필연임까지 깨닫습니다. "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나의 재능은 곧 십자가이기도 하며, 이미 피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는 것을 말이죠."

"이 길이 그리스도의 길이며, 이 길은 너무도 좁은 길이다. 이 길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 좁아진다."

역시 지난시절 키에르케고르의 수상록 만큼이나 널리 읽히는 베스트셀러였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도(제목부터가 "좁은 문"입니다. 영어인 Strait is the Gate로도 유명하고, 불어 원제인 La Porte Étroite로는 말할 필요도 없죠. "좁은 문"이 올바른 번역인데 불어 맛을 살리려고[혹은 문학적 전통 한 자락에 기대어] 영역은 저리 이뤄졌습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이 출전) 천국에 이르는 험난함을 비유적으로 이른 바 있습니다. 올바른 길은 좁고도 험하나, 또 그 길의 끝에 다다라 본들 결국 죽음을 맞을 뿐이나(필멸의 존재이므로), 이 길을 피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처럼 순명해야 함(그가 모범으로 보인 것처럼)을 그와 그의 독자(즉 우리들)은 마음으로부터 수긍하고 순종합니다.

대체로 인지(人智)가 무지몽매했던 과거에는 도무지 통제가 불가능한 자연, 예측할 수 없이 다가오는 자연 재해 때문에, 그저 간절히 흉을 피하고 길함을 바라는 마음으로 종교를 미신처럼 믿었을 겁니다. 이후 자연과학과 각종 공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구태여 종교에 기대어 화를 피할 필요가 없음을 영악하게 깨달았습니다. 고등 종교와 미개한 미신이 이 지점에서 갈리는 건데, 물질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정신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괴로움과 위기를, 바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겪습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이제 혹한과 혹서(혹서는 좀...ㅋ), 기아와 질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악의와 음모와 사악한 감정 등이 빚는 관계로부터의 질병입니다. 암에 걸리는 이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은 영양이 부족해서, 타고난 유전병의 사슬에서 못 벗어나서가 아니라, 바로 타인이 주는 스트레스를 못 배겨내어서입니다. 그럴 때, 180년 전의 현인 키에르케고르가 권하는 여러 처방이 있습니다. 꼭 종교를 믿지 않는다 해도(솔직한 말로, 종교 믿어서 더 암 걸릴 것 같다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어디 교회 안이라고 사람 사이의 질시, 불화, 갈등이 없겠습니까?) 이 책을 읽고 본디 인생이 고해(告海)임을 깨달은 후 묵묵히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청신한 삶의 본령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전이 고전인 건 다 이유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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