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의 춤 비판세계문학 3
오까 루스미니 지음, 이연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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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적인 표지가 춤을 춘다. 인도네시아의 작가 우까 루스미니. 사실 잘 모르는 작가다. 그도 그럴 것이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아시아의 작가들의 책은 단편으로 엮인것 정도만 읽었으니까..요즘 부쩍 베트남, 일본, 인도네시아, 인도, 대만등의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이 간다. 동양적 정서? 호기심? 그런 것이라고 뭉뚱그려 말할 만큼의 기초지식도 없는까닭에 딱 잘라 말하긴 뭐하지만..잘 읽힌다. 마치 한국만의 고유한 무엇인양 말하는 '한(恨)' . 그 한을 다양한 나라의 언어로 읽는 느낌이랄까? 물론 번역되어 한번 걸러진 것일테지만 말이다.

작가의 글은 투박하고 때론 엉성하다. 그렇게 느끼는 건 아직 완성도를 기대할 만큼의 공력(?)이 있는 작가는 아닌듯 싶다는 짐작과, 작가가 이야기하는 것들에 독자가 쉽게 동화되지 못할만큼 정보가 적다는 한계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게 되고 응원하게 되고 더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이 아시아 문학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춤 추는 여인들, 카스트 제도, 신분 상승, 여성, 신의 축복, 차별, 희생, 복종, 거부.. 이런 단어들이 두서없이 들어박히는 책이다.

읽는 내내 '짙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무슬림들이 많은 인도네시아에서 유난히 발리에는 힌두교가 자리 잡았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이어지는 시험문제 보기에서 골라야 했던 계급의 이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람들, 요즘 말로 태어나보니 브라만이었어..태어나 보니 수드라였어..라는 상황에 수긍하며,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노력. 혹은 자신을 위해 신분을 버리는 선택을 하는 춤추는 여인의 이야기라면 흥미롭지 않을 이유가 없다.

수드라 출신이지만 브라만의 남자와 결혼한 엄마 스까르, 귀족의 신분을 얻었지만 여기에도 순수 귀족이냐 신분 상승한 귀족이냐에 따라 이름 앞에 붙이는 수사들이 달라진다. 어쨌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뜰라가. 귀족으로 태어난 뜰라가는 결국 귀족의 신분을 버리게 된다. 온전히 수드라의 여성으로 되돌아가는 딸.

이야기의 흐름은 그렇다.

춤이 매개가 되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무희의 피를 이어 받은 뜰라가. 단순히 재능이 아니라 그것을 신의 축복으로 여기는 사람들. 신의 선택이 있어야 사원에서 춤을 출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덕분에 작품 속에는 다양한 발리의 춤들이 소개된다. 어떤 춤일까, 상상하다, 급기야 동영상을 찾아보고 그 매력에 흠뻑 빠지게 만든다.

아름다운 춤. 날렵하고 유연하며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춤을 그저 관광상품이 아닌 신께 드리는 제사로, 저 춤을 추기까지 무희들의 기도와 노력을 되짚으며 보게 된다.


계급이란게 뭘까?

그것이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간에 계급이 유지되었던 사회에서 계급, 신분차별을 철폐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후세로 갈수록 차별과 계급성은 모호해지겠지만 그것이 과연 사라지고 평등한 관계라는 것이 가능한가? 라고 말이다.  차별과 신분은 다양한 변종으로 모습을 바꾸며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얼마전 읽은 고용신분 사회에서 공감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고용형태가 신분이 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으니까..

삶 전반에 깊숙하게 파고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계급을 인정하고 복종하게 되는건, 혹은 자신의 신분과 계급을 지키고자 (그것이 지금은 기득권이라는 말로 표현되겠지만) 온갖 술수를 쓰게 되는 건. 이 관계가 쉬이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반증처럼 읽힌다.

그 어떤 사상이나 이념보다 강고한 것이 어쩌면 계급 아닐까. 그런 구분이 시작된 때로 돌아간다면 계급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


신의 선택을 받아 춤을 추는 이 조차 계급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존중하며 살아내는 삶.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의 춤이 있었을까. 어쩌면 뜰라가의 춤은, 발리의 춤은 구분하는 것으로 우위를 점하는 인간사회의 부조리를 딛고 일어서 신과 직접 소통하는, 그렇게 소통하고 온전히 자신을 쏟아낼 수 있는 관계에 대한 희망같은 것은 아닐까.


좁고 어두운 방에서 관습처럼 옷감을 짜는 늙고 야무진 손마디가 떠올려지는 작품이다. 씨실과 날실 사이를 교묘하고 날래게 움직이며 춤추듯 붉고 푸른 옷감을 짜내는 몸짓. 눈길이 닿지 못한, 손길이 미처 잡아채지 못한 코가 투박하게 몇군데 빠지거나 연거푸 짜여 볼록하지만 그래서 더 마음이 가고 보드랍게 쓰다듬다 부드러움이 지루할 즈음 손끝에 걸리는 매듭이 있는 옷감을 마주한 것 같은 작품이다.

귀족사원에 거드름을 피우며 제사를 올리는 콧대높은 이들의 몸을 감싸기 보다 폭폭한 훍먼지가 날리는 길 위에서, 혹은 녹음이 우거진 숲속 신전에서 기도하듯 축제를 하듯 나풀대는 여자애가 입을만한 밝고 아릿한 옷감 같은 작품이다.

짙고, 짙은 영상들이 눈 앞에 자꾸 어른거린다. 꽃잎 같기도 하고 햇살 같기도 한..발리 의 춤조각이 자꾸 나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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