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셜록 1
박상규.박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사고의 틀이 경직된 것일까.

요즘 들어 읽는 것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읽힌다. 껌 하나를 나누는 일조차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대화하고 조정하는 정치행위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변호사라고 하면 기자라고 하면 어느 한 때 선호하는 직업이었다. 소위 사짜 사윗감 세 손가락에 꼽힐 부류였으며 박식함과 정의로움의 상징이었던 부류였다.

엘리트라고 불리워지는 이들의 철옹성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아니며 거짓말장이이거나 앵무새로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되어갔다. 어째서일까?

사실을 보도해야 할 기자들은 권력의 입이 되어갔고, 억울하게 누명을 쓴 가난한 피고를 변호하는 이는 사라져갔다. 가난한 이를 위한 변론을 열정적으로 펼치는 정의의(?) 변호사는 소설 속에서 읽혔고, 온갖 위협 속에서도 정론을 써내는 기자들은 미디어 밖에서 서성이게 되었다.

정의는 있는자들, 강한 자들의 것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억울함은 '없는 게 죄지' 라는 자탄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가장 바른 잣대는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때가 탄 채로 불쏘시개로도 쓰지 못할만큼 외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스토리펀딩으로 만나게 된 '파산 변호사'의 이야기는 그래서 놀라웠다.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딸 '김신혜' 한사코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도 결국 무기수가 된 딸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화가 치밀었다. 어째서..법은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 온 보통의 주부가 읽어내기에도 허술하기만 한 조서와 수사의 과정은 화를 삭이기 어려웠다. 말도 안되게 짜맞추고 조작된 증거와 조서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진행하는 자들과 그 구조에 화가 난 것이다. 협박과 회유와 강압으로 만들어낸 죄인. 무고한 사람이 범죄자로 낙인 찍히는 것이라는 걸, 짓지 않은 죄의 댓가를 치르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 저지르는 경찰, 검찰의 뻔뻔한 작태. 그 속에 속수무책으로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던 순한 사람들.

사실, 조작과 강압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해방 이후 줄곧 이어져온 사상범들이 그랬고, 반북 이데올로기의 프레임 속에 무고하게 잡혀들어가 옥고를 치른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살아보겠다는, 살려달라는 외침조차 불법이라 했고, 좌익 용공, 외부세력, 반국가행위따위의 낙인을 찍기 일쑤였지 않은가. 얼마 전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돌아가신 백남기농민의 사망사건만 보아도 자신의 잘못보다는 피해자를 깎아내리려하고 가족을 몰아세우며 파렴치한 일을 서슴치 않았던 것을 오롯이 기억한다.

단 한번도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사법기관이라 부른다.

'법과 원칙에 따라' 라고 주문처럼 이야기하는 그들의 법과 국민의 법은 사뭇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곳에서. 기껏 조작하고 범인을 특정하고 끝나버린 일을 다시 파헤치며 억울함을 풀어내려 애쓰는 사람. 그런 사람이 생겨나는 게 가능한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무죄주장을 믿고 사건을 다시 파헤치고 누명을 벗겨내는 일.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일. 속된 말로 돈이 되지 않는 일을 기꺼이 수행하는 변호사.

나는 이 사람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았다.


치밀하게 짜여진 조작의 구조가 믿어지지 않았고 그 구조에 맞선 작고 돌맹이 두어개가 전부인 다윗같은 사람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정의는 살아있다'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일게다.


책은 세가지의 재심사건을 이야기한다.삼례 나라 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 약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완도 무기수 김신혜사건.

언뜻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느 날 뉴스에 보도가 되었고 '세상에..'라는 탄식을 쏟아낸 기억이 있는 사건들이었다. 사건은 그 후 자극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져 간헐적으로 들렸고,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이 그랬다. 소년이 그랬다. 딸이 그랬다. 라는 짧은 결말과 함께 사라졌다.

뉴스를 보며 '그래도 범인이 잡혀서 다행이네'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들은 범인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범인은 커녕, 진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진범이 자신이 저지를 일이라고 저들이 아니라고 눈물을 흘리며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사람들은 억울한 죗값을 치러야했다는 것이다.


비협조와 압박 속에서도 그 어렵다는 재심을 끌어내고 기어이 무죄를 증명해내는 일은 더이상 정의를 지연시킬 수 없다는 신념이라고 멋지게 말하는 것도 좋지만 글을 읽는 내내 나는 연민과 '사람'에의 존중을 읽는다. 장애가 있건, 약자이건, 스스로 무죄를 증명할만큼의 힘이 있건 없건 간에 '무고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어떤 사람도 불의하게 구속당하고 억류될 수 없다는 사람에 대한 존중. 그것이었다고 읽었다.

미드에서 나오는 쿨하고 샤프한 변호사가 아니라 피의자들과 똑같이 빈 손이며 그 태생조차 남루한 변호사.

그 변호사와 기자가 서류를 뒤지고 펀딩으로 힘을 모으며 하나씩 풀어가는 무죄투쟁. 말그대로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기 같이 읽힌다.

너무나 순해서 눈물이 나다 어째서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고만 있는지 화도 나다..나였어도 이들처럼 주눅든 채 조작의 제물이 될 수 밖에 없었겠다 싶어지기도 했다.


결국은 관심으로 지원으로 일궈낸 일일지도 몰랐다. 파묻어두려는 거짓을 들춰내고 공론화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모아 그것에 의지하며 풀어낸 정의

이 사건들의 무고함을 믿고 지원해 준 사람들의 힘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정의를 간절히 바라는 때. 그것만큼은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들을 이 무모한 싸움에 밀어넣고 있는지도..


국조특위를 보며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틀어쥔 것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탐욕에 눈 먼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러다보니 조작과 거짓으로 만들어낸 무고는 일도 아니었겠다 싶어졌다.

다 드러난 거짓조차 아니라고 우겨대는 사람들.

그 파렴치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구조.


정의는 특정한 이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가 아니라 모두가 일궈내고 지켜내야 할 당위겠다 싶어진다.

더는 약하고 없어서 사회의 틀에서 내몰린 자라서 감내해야할 고난 쯤으로 불의를 인정해서는 안되겠다.


이들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기로 한다.

숱한 폄훼의 말들이 이어질것이고, 정의가 두려운 자들의 공작이 시작될 것이다.

정의는 늘 그렇게 누더기의 몰골로 시선 밖으로 내몰리곤 했으니까..

정의가 희미해지는 곳에서 '사람'은 얼마나 존중될 수 있으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반문해본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표지에 쓰인 문구를 다시 읽는다. 반복해 읽는다.

정의의 지연을 좌시하지 않는 것. 거기서부터 출발해야겠다.

법이 지배하는 사람이 아닌 사람의 정의가 관통하는 법을 세워야 한다.

법은 지배수단이 아닌 자유와 정의의 수호수단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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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7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회 문제나 현상을 정치적으로 보이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치가 대화 주제로 환영을 받지 못해요. 오히려 정치를 주제를 대화를 한다 해도 생각이 앞뒤로 막힌 사람들과 만나면 더 피곤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