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빛깔들의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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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의 변주


조안과 희중을 축으로 주변의 사람들이 겪게 되는 혼란과 상실, 두려움과 공포 슬픔과 상처를 냉정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아이와 함께 기차 사고를 당한 조안은 아이를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차창 밖으로 던진다. 그로인해 아이는 죽고 조안은 살아남게 된다.

아이를 잃은 어미의 상실과 슬픔의 온도는 더없이 차고 그 차가움으로 얼어버린 존재감은 그 존재를 비추어 낼 세상조차 얼게 한다. 세상도 없고 어미도 없다.

다만 슬픔과 그리움과 자책만이 없어진 것들의 자리를 채운다.

아무리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그 위로가 스며들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단단한 자책. 굿 윌 헌팅의 그 유명한 "It’s not your fault" ​의 통하지 않는 용서되지 않는 사건이고 사고였다.

조안과 조안의 동생, 조안과 조안의 남편, 조안과 이웃..희중과 조안, 희중과 상윤, 백주..

하나의 사건과 사건 이후의 일들을 함께 겪어내는 이들을 이웃이라 불러도 좋을까?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잔혹한 일이다.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않는..치유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상처가 더 깊이 파고들어가는 것일 뿐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표면이 괜찮아 보인다고 나아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때로 위안이 되기도 하니 그렇다 치고 넘어가자.

뼈 속까지 파고든 고통은 오로지 상처입은 자의 몫이다. 그렇게 치유되었다 믿게 되는 주변과 더는 이해하지 않겠다고 앙다문 입술 앞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은 유난이며 짜증을 유발하는 촉매가 될 뿐이다.

죽음은 별일 없음으로 무장하고 사는 일상에 떨어지는 무자비한 돌덩이 같은 것은 아닐까? 한참을 일렁이게 하고 희미하게 오랫동안 파동을 남기는..파동의 힘이 약해져 이제 다 되었다 싶어졌을 때 다시 발견되는 흠뻑 젖은 옷같은..다 말랐다 싶어졌을 때 다시 보이는 파동의 잔상..잔상이 잦아들 즈음에 다시 맺히는 눈물..이런 무한의 변주가 이어지는..



#2. 죽음의 그늘


책을 읽는 내내 "자살의 전설"을 떠올리며 읽게 되었다.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한 작가가 적어낸 화해와 위로와 자살의 이야기들. 한 번 쯤은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살아간다는 것은..

그 죽음의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아낼 것을 강요 받는게 문제다. 아픈것을, 잃은 것을 그리워하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

'네 슬픔, 충분히 이해하는데..'

'너만 아픈게 아냐, 나도 참고 있어'

'산 사람은 살아야지..언제까지 이럴래?'

이 모든 말도 안되는 폭력적인 말들을 듣고, 하게 된다. 아무도 이해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죽음의 파편들은 저마다의 삶의 양상과 맞물려 고유의 파장으로 진동하는 것이다.

너의 슬픔을 나의 슬픔이 위로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거대한 죽음의 그늘 속에서 다양한 변주는 가능하다. 조안의 변주와 희중의 변주..어느 것이 더 참혹하고 처절한지에 대한 평가는 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된다.

지난 4월..

우리는 생중계로 죽음을 목격했다.

'던지지 말았어야 했어' 라는 조안의 말과..

'보내지 말걸 그랬어..'했던 어떤 엄마의 말이 묘하게 겹쳐 하모니가 된다. 비슷한 음조였던 것이다.



#3. 평범한 이들의 평범한 상처.


살고 죽는 건 지극히 평범한 일이다. 그 죽음에 어떤 사연이 얽히는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순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죽음에게 다가간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면, 그 발걸음을 어떻게 멈출지를 누가 결정하는 것이 맞는지를 잠깐 생각했다. 자살을 시도하는 조안을 보면서 더더욱 ..

멈춘것이다. 조안은 자신의 걸음을 거기서 멈추고 그 자리에서 아이와 마주하려는 것이다. 그 정신나간(?) 짓들이 다행스럽고 수긍이 간 것이다.

생사여탈권이라는 어마무시한 말을 생의 주인이 쥐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것이 사고이건, 자연사이건, 스스로 생을 마감하건..중요한건 걸음을 멈춘이는 자신이라는 것. 자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자살하지 않을 사람도 없다..라고 폭력적으로 정의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지금 그가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은 조안처럼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이다. 조안처럼 겨우 오층에서 뛰어내리는 게 아니라 그것도 화단의 관목 위로 떨어져 겨우 몇 군데 부러지고 깨지고 마는 게 아니라 십오층, 오십오층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곧장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다 부서져버리는 것이다. 희중은 산산조각이 나고 싶었다. (p75)"


"살인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어떤 교집합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살인에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살인의 밤마다 절규....아니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욕망이 있다. 죽이고 싶은 욕망보다 더한 것, 더 근본적인 것....그것은 죽고 싶은 욕망이다. 말하자면 살인자가 죽이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살인자 자신이다. 그의 연쇄살인은 자신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일이다. (p144)"




#4 서러웠다.

책을 읽는 내내 서러웠다. 살아있는 것이, 죽음을 목격하고도 못본 척 지내고 있는 것이 말이다. 화해와 용서따위가 개입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매개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또는 그 죽음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 단정지을 근거는 얼마나 될까?를 생각했다.

뼛 속 깊이 파고 들어 드러나지 않는 상처를 다 나았다고 착각하며 자기 최면 속에 사는 것은 얼마나 비굴한가도 생각했다.

김인숙이라는 작가의 이름.

모든 문장들이 있어야 할 곳에서 그려야 할 그림을 그리게 하는 탁월함이 있구나를 생각했다.

결국 삶으로 걸어들어가는 이들. 다시 멈춤을 선택하지 않을 이들이 다 나은건 아니지만, 절대로 낫지 않을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아도 좋을 근거들을 제시한다.


뜬금없이 아놀드 뵈클린의 <죽음의 섬>을 떠올렸다.

라흐마니노프의 죽음의 섬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이거 틀어놓고 책 읽을 껄..


산다는 건, 수없이 만나는 죽음들과 친해지거나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그 죽음 앞에 처철하게 서러워보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빈틈없는 서술에 꼼짝없이 사로잡혔던 시간이었다.


http://youtu.be/dbbtmskCRUY 

-Rachmaninov: The Isle of the Dead, Symphonic poem Op. 29 - Andrew Da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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