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카프카 문학의 기원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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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나 <성>을 읽고서 도대체 이 작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졌던 독자라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더없이 요긴한 자료이다. 작가가 육성으로 고백하고 있는 아버지와의 관계(나는 이것이 그의 문학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는데)는 너무나 적나라해서 그의 '벌거벗은 영혼'을 훔쳐보는 듯한 죄의식(!)마저 느끼게 한다. 거기에 비하면 카프카 문학의 온갖 해설서들은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의 문학이 부조리한가? 그의 '원체험'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런 장면은 어떤가. 아주 어린 나이의 카프카는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달라고 칭얼거린다. 하지만, 엄한 자수성가형 아버지는 그를 파블라취(복도)로 끌고 나가 혼자 세워두는 벌을 준다. '한밤중에 물을 달라고 졸라댄다는 것이 터무니없게도 보이지만 저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만한 일로 집밖으로 내쫓겨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는 것, 저로서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까지도 저는 고통스러운 관념 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26쪽) 바로 여기에 <법 앞에서>의 카프카, <성> 앞에서의 K의 모습이 아른거리지 않는가. 이러한 체험의 제시는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얼핏 그의 문학 전체를 싱겁게 만들어버린다(적어도 덜 신비롭게 만든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카프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란 자신이 아버지가 되든가 가능한 멀리 아버지로부터(아버지란 자리로부터) 도주하는 것이었으리라.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애가 생기면 낳고, 그애들이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잘 건사하고, 나아가 바른 길로 좀 이끌어주기도 하는 등의 일은 한 인간이 대체적으로 해낼 수 있는 최대한'(130쪽)이라고 그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의 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는 일은 '아버지가 이루신 최고의 것'이었기 때문이고, 그 자신은 그 아버지를 결코 능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결혼은 '아버지의 고유한 영역'(148쪽)이므로 그에게는 막혀 있는 것이다. 그의 가슴 저미는 상상을 보라.

'때때로 저는 세계 지도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아버지가 사지를 쪼가 뻗고 누워 계신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마치 저한테는 아버지가 가리고 계시지 않거나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역만이 저의 생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져요. 그런 지역을 결코 많을 수 없으며 무엇보다 결혼은 그런 지역에서 벗어나 있습니다.'(148쪽) 그리고 그 많지 않은 지역이 바로 문학의 공간이었으며, 그 공간을 방어하기 위해 카프카는 전력을 기울이고 많은 것을 희생한다. 이러한 고백을 담고 있으니 일컬어 '카프카 문학의 기원'이라 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일은 저의 의무입니다. 아니 그 일을 지키고, 제가 막아낼 수 있는 어떠한 위험도, 나아가 그런 위허의 기미조차 그 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제 인생의 성패가 걸려 있다고 할 수 있지요.'(151쪽) 그의 일기들도 곧 완역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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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웰컴 투 진화심리학!
진화심리학 하룻밤의 지식여행 4
딜런 에반스 지음, 이충호 옮김, 오스카 저레이트 그림 / 김영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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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심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독자가 있을까? 그러한 관심이 정작 프로이트나 라캉을 읽는 일에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하더라도, 하여간에 자신의 '생짜' 겸험을 토대로 우리는 적당한 민간심리학 정도는 들먹일 수 있다. 걔는 그런 콤플렉스야라든가, 쟤는 그런 심보(심사)였던 거지, 하는 식으로. 하지만 별로 믿을 거 없어 보이는 이런 심리학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니 우리는 타고난 심리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심리적 상태라는 것은 우리가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의 DNA 속에 각인돼 있는 것이다.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논리적으로 객관화시키는 것이 바로 진화심리학의 작업이 아닌가 싶다.

그 진화심리학에 대해 저자는 '미래에는 그것을 더이상 진화심리학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심리학이라고 부르게 되겠지요'(172쪽)이라고 결론적으로 자신있게 말한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게 아니라는 걸 독자들은 이 책을 '하룻밤'만에 읽어가면서 깨닫게 된다. 원리는 단순하다. '유전적 이득'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여 잘 계산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왜 잘 생기고 예쁜 남자/여자를 좋아하며 배우자를 선택하기 위해서 어떤 점들을 고려하는가 하는 것이 일목요연하게 계산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구체화된 게 불과 10년 정도의 기간이라는 게 놀랍다. 아마도 진화심리학은 다윈의학, 사회생물학과 함께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지적 자극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결말 부분에서 저자는 진화론과 진화심리학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간단하지만 요령있게 해명하고 있다. 문제의 원흉은 다윈이 아니라 허버트 스펜서를 대표로 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이라는 것. 그런 점에서 보면 나치에 의해 곡해되었다는 점에서 다윈은 니체를 빼닮았다. 이젠 그들에게 들씌어진 오해의 거죽들을 들춰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진화심리학을 비판한 사람들이 진화심리학을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틀린 것이지만,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170쪽) 이젠 그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해해야 할 차례가 아닐까? 한편으로 이러한 류의 교양 시리즈들은 구미의 출판역량을 한없이 부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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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철학자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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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푸줏간에서 한 여인이 좋은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끔찍한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하고 싶었습니다.'(17쪽) 마그리트의 말이다. 그의 그림들이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유가 절반은 숨어있지 않을까? 나머지 절반은 장담컨대, 저자인 수지 개블릭이 책임지고 있다.

그녀는 마치 '당신이 마그리트에게 알고 싶었던 모든 것, 하지만 차마 옆사람에게 물어보지는 못한 것'에 대해서 답해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마그리트와 그의 철학과 그의 회화에 대해서 폭넒고 깊이있게 쓰고 있다. 그래서 뒷표지에 실린 '확실히 마그리트 연구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타임스의 서평이 허사만은 아니지 싶다.

의미심장하게도 책의 시작은 '철학과 해석'이다. 사실 재현을 거부하는 그의 그림들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개념들의 낯선 병치와 그것이 거두는 효과이다. 이런 사실은 그가 일생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걸 알게 되면 아주 자연스레 이해된다.

요컨대 '회화작품에서 그는 거의 천부적인 싫증을 보여 주었으며, 권태, 피로, 혐오감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꾸며냈다'(9쪽) 그에게 회화가 가지는 의미? '그에게 있어서 회화란 정신이 지닌 두세 가지 기본적인 문제들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으로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란'(9쪽)이었다.

그는 일생을 두고 자신의 생각(정신)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화가의 특이한 유형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특이한 유형에 속한다. 넓은 의미에서 초현실주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브르통 등과 결별했던 것도 그런 기질상의 차이가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데 키리코와 시인 로트레아몽을 들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은 팝아트와 마그리트의 관계에 대해서도 요령있게 설명한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보다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회화에서의 '재현의 위기'를 주제화하고 있는 마그리트 회화의 특징과 그 전략이다. 그녀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밑에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아 어깃장을 놓는 그의 심보(?)를 아주 유려하게 해설해 보이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전략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138-140쪽) (1)회화에서 단어는 이미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단어=이미지) (2)회화에서 오브제는 단어나 이미지와 동일하지 않다(오브제≠단어, 이미지) 그리하여 이제 더이상 재현적 회화란 가능하지 않으며 유효하지도 않다.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회화적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무엇을 그린다는 것이 더이상 가능하지도 의미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는 무언가를 그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으로부터 현대 회화의 희소한 가능성과 과제가 동시에 산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비단 마그리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현대 회화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도 아주 유익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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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마음 - MIT 경제학 소설
러셀 로버츠 지음, 김지황 옮김 / 월드컴M&C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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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보는이로 하여금 로라의 오빠가 그랬듯, 샘과 한바탕 논쟁을 벌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이 책은 자유주의를 따뜻하고 논리정연하게 옹호했으며, 상당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이 글은 그렇지 않은 부분, 즉 논쟁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거두 절미하고, 내가 눈여겨 본것은 극중 샘이 사례로 들었던 옐로우스톤 공원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샘의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중의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옐로우스톤 공원에는 고라니와 늑대와 비버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늑대가 근처 농가를 침범하여 양을 잡아먹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이에 대해 주민들이 항의하게 되었고, 정부는 늑대를 모두 쫓아내었다. 그 결과 숲에는 고라니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가끔 숲에 놀러오는 관광객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소식이다. 무서운 늑대가 사라져 다칠 위험도 사라지고, 귀여운 고라니는 늘어나 숲 어디서나 고라니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버를 포함한 생태계 전체 입장에서는 비극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고라니수가 급증하게 됨에 따라 그들이 비버가 먹어야할 풀까지 모두 뜯어먹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굶어죽는 비버수가 늘어나고, 생태계 전체의 균형도 무너지게 된 것이다. 처음에 이 문제는 고라니와 늑대만의 문제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실상은 생태계 전체가 관여되는 좀 더 복잡한 문제라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샘은 이 사례를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로서 사용한다. 생태계에 대한 온정적 간섭이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균형을 깨뜨린 꼴이 되었듯이,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도 부분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지만 거시적으로는 사회전반의 균형(물론 샘이 말하는 균형은 좀 더 복잡한 개념이다.)을 깨뜨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샘의 핵심 주장이다. 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너희가 뭔가를 개선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정책을 세워서는 안돼. 정말 도움이 될 정책을 세워야지. 그리고 너희가 뛰어난 경제학자가 되려 한다면,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고 노력해야 해.”


그러나 샘의 이러한 유비적 추리에는 매우 논쟁적인 부분이 있다. 키워드는 “뭔가를 개선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정책” 정도 되겠다. “뭔가를 개선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점이 중요하며 이것이 내 주장의 핵심 근거로서 사용될 것이다. 사실 늑대를 쫓아낸 행위는 ”뭔가를 개선“한것처럼 보이는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고라니와 양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외부의 어떤힘이 간섭하지 않으면 누군가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생명을 구하는 행위가 샘의 눈에는 ”정말 도움이 될“ 행위가 아니라 개선된것처럼 착각되는 행위의 수준으로밖에 인식되지 못하는 것인가.


물론 앞에서도 논의했듯이 고라니를 보호하는 선택을 할 경우에 생태계의 균형의 붕괴라는 결과는 받아들여야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자. 생태계의 균형이 유지되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균형에 대해 강박증세를 보이는가? 고라니 혹은 늑대 혹은 비버의 생명의 소중함 때문인가? 생태계의 균형을 통해 궁극적으로 달성되어야 할 것이 이러한 생명의 소중함인가? 결코 아니다. 생태계는 낱개의 생명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낱개의 생명체가 살든지 누군가에게 잡아먹혀 죽든지 관심이 없다. 위의 물음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은 "생태계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당연히 그래야지."와 같은 식의 추상적인 형태로 이끌어질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서 자연세계에서 생명의 소중함과 같은 가치를 들먹이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자연세계는 철저하게 집단주의적으로 움직인다. 자연세계를 주관하는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일반적인 원숭이 집단에는 관심이 있어도 낱개로서의 원숭이 한마리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이 신은 철저하게 생물학적으로 접근할것이다. 그는 어떻게하면 종의 개체수를 유지할 수 있을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을뿐이다. 누가 죽으면 다른 녀석이 살아남아 빈자리를 채우면 그만이다.


이렇듯 매우 잔인하게, 경제학적으로 철저하게 환원되어 움직이는 곳이 자연세계이다. 자연세계에서는 쥐가 독수리에게 잡아먹히는 살육의 현장이 자연법칙의 하위 범주로서 매우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풍경이며,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사냥의 풍경은 가끔은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매가 저 높은 상공에서 뛰어난 시력으로 쥐를 포착하고 급강하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정말 아름다운 장면 아닌가.


위와같은 논의를 통해 우리는 “전체적 균형”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지 알게 되었으므로 자연세계의 법칙을 인간세계로 유비시킨 샘의 논리에는 논쟁의 여지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나의 주장을 반박할만한 샘의 논리를 책에서 찾을 수 있다. 샘은 헬스넷이라는 기업이 오하이오주의 마탈론 공장을 없애고, 멕시코에 공장을 신축하는 사건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샘의 논리는 이렇다. 마탈론 공장이 이전하면서 실직자들은 단기적으로는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하지만, 장기적 견지에서 조지 서덜랜드의 자식세대는 따분한 공장일로부터 해방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따라서 좀더 창의적인 일에 종사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멕시코의 노동자들은 직장을 구하게 될 것이다. 즉 헬스넷 사장인 찰스 크로스도 만족하고 조지 서덜랜드도 만족하며(자식세대에게 좋은일이므로) 멕시코 노동자들도 만족하는, 모두가 행복해질만한 결과를 시장이 만들어줄 거라는 샘의 이상주의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서덜랜드 자식세대의 만족할만한 삶이 현실에서 검증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십년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장기적이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도대체 서덜랜드로서는 그의 자식세대가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맞이할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서덜랜드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는 직장을 잃기는 했지만 목숨은 붙어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자식세대의 미래를 지켜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반면에 장기적 관점을 얘기하려 할때 이미 죽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양이나 고라니로서는 장기적으로 세계가 어떤식으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느니 하는 얘기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라니와 양에게 있어서 단기적관점의 고수는 목숨을 지키는 것과 같은 수준에서 이해되야 한다.


이처럼 샘의 비장의 무기인 “장기적 관점”은 자연계에서는 유용할지 몰라도 인간세계에서는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자연계에는 약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없다. 그러므로 늑대가 고라니와 비버를 적당히 잡아먹어서 그들의 개체수를 조절하고, 그럼으로써 식물의 양도 적정수준에서 유지되고, 그럼으로써 생태계는 장기적으로 균형을 유지한다. 하지만 인간세계에서는 약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며, 이 시스템은 장기적으로 인간사회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목적의 견지에서는 매우 부적절하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자면 샘의 말이 옳다. 헬스넷은 오하이오주의 마탈론 공장을 없앰으로써 더 많은 이윤을 올릴것이고, 이것은 주주들을 만족시켜줄것이며, 멕시코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여(샘이 기분 나빠할 표현이긴 하지만)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소비자들도 만족시켜줄 것이다.


호랑이에게 발톱과 이빨을 빼줄것을 요구하는 것은 호랑이에게도 아픔인 동시에 생태계 전체의 아픔인 것처럼, 헬스넷에게 마탈론 공장을 유지하길 요구하는 것은 헬스넷의 아픔인 동시에 인간사회 전체의 아픔이다. 다행히 호랑이는 위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할 것이며, 헬스넷도 마찬가지로 행동할 것이다. 고루하기 짝이 없는 변화없는 세상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세상을 옹호하고 싶은 샘의 입장에서는 위의 일들은 자연스런 현상이므로 이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는것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죽어나가는것은 오하이오주의 서덜랜드와 그 밖의 마을 사람들이다. 이렇게 낙오된 이들은 가난하게 생활할 것이고, 소비활동도 별로 안함으로써 인류적 관점에서 봤을때는 상당량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며, 삶의 의욕을 잃고 자살을 하든가 많지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하면 인류의 개체수도 적절한 수준에서 유지되니 전체적 균형을 위해서 얼마나 바람직한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상황을 결코 두고보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장기적 관점이 단기적 관점보다 우월하다는 샘의 생각은 인간세계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인간이 약자를 보호하고 생명은 소중하다는 도덕법칙을 발명한 순간에 이미 인간세계는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것이며 모순과 딜레마로 점철될 역사를 예약해 놓은 것이다. 인간세계에서의 낱개의 생명의 가치는 자연세계에서와는 달리  매우 소중한 것이며, 인간세계를 움직이는 제1원인일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세계에서 전체의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자연세계에서와 같이 “모두를 위해서”와 같은 추상적인 형태가 아니다. 그 이유는 명백히 구성원 “개개인”의 행복이다. 소수 혹은 하나의 생명 또는 삶의 질을 희생해서 장기적으로 전체의 균형을 이룩하자는 발상은 민주주의의 제1원리인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엄하다”는 정신을 훼손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간은 앞으로도 모순투성이 삶을 살아갈 것이지만, 제2 제3의 조지 서덜랜드들이 출현했을때 이에 대해 결코 묵과하지 않을것이며, 시장을 견제하고 비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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