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쉬워 하진 말자고. 저 친구는 저 친구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았다 하지않나. 우리도 그럴 수 있게끔 기도도 해준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 앞길을 함께 걸어나가게나” 백인은 굳은 결의를 품은 표정으로 동료에게 말했다.
이에 말이 잘 없던 아랍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저 친구는 이제 가족도 보고 저 자리에서 잘 지내면 될 것이니 걱정은 어서 빨리 거두는게 좋겠어. 어서 우리에게도 하루빨리 우리가 찾는 의미에 닿아야 할 텐데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그 둘은 말없이 묵묵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여정의 초반에는 깜짝 놀라며 신기해 했을 이상하게 생긴 모공, 각질, 털이 있어도 그들은 그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걷고 또 걸었다. 더이상 정취를 느끼지도 -- 물론 내게는 너무도 당연하고 보잘 것 없는 뷰이지만 -- 감상같은 것을 위해 쉬어가는 것도 줄여가며 앞으로만 계속해서 나아갔다.
다시 창 밖에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그에 따라 그들의 시간은 훨씬 더 빨리 흘러갔다. 잠시 혼란스러워진 틈을 헤치고 다시 그들을 찾아 내 시점을 요리조리 움직였다. 그들은 내 유륜 근방에 도착해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패턴과 같이 그들은 좀 전보다 훨씬 더 늙어보였다. 좀처럼 선명히 나타나지 않던 주름살이 깊게 패였고 피부가 조금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칸두라와 히잡으로 몸을 꽁꽁 싸맨 그들에게서 보이는 것이라곤 얼굴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정보가 되어주었다. 대충 짐작으로는 쉰 살은 족히 넘어보이는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유륜 근처에 캠핑 사이트를 설치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아랍인이 텐트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책을 읽는 동안 백인은 조금의 짐을 대충 짊어지고 길을 따로 나섰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했더니 그는 내 유륜 부근을 돌아보기 위해서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랍인은 원래 텐트를 설치한 곳에 가만히 앉아 휴식을 취하다 텐트에 들어가 잠도 자기도 하고 하는 반복적인 생활을 보는 십몇 일이 되는 그들의 시간동안 백인은 꼼꼼히 내 유륜의 테두리를 따라 걸으면서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고 내 유두 가까이까지 걸어가 튀어나온 내 유두를 올려다보기도 하며 여러 각도로 내 웃기게 생긴 유륜을 관찰했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려대며 기어코 한바퀴를 다 돌아낸 백인은 아랍인이 쉬고 있던 원점으로 돌아와 그가 미리 준비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여, 다녀왔나?” 아랍인은 전보다 확실히 무거워진 톤으로 그를 반겼다.
“다녀왔지.”
“뭘 좀 찾았나?”
“찾았지.”
별로 기대하지 않던 아랍인은 그의 대답에 화들짝 놀라 백인을 향해 돌아앉았다. “무엇을 찾았다는 건가?”
“의미를 찾았네. 이 여정. 우리가 해온 걸음. 이 긴 여행 속에서 난 드디어 의미를 찾아냈다내. 바로 이 큰 보라색 대지를 앞에 두고 말이야. 이것이 틀림없어. 역시 그 때 그 친구와 함께 남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길 참 잘한 것 같아.” 백인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해 계속 이어갔다.
“친구, 도대체 그 의미란 뭔가? 자네가 찾은 그 의미 말일세.”
“눈 앞에 보이지 않는가. 이 보라색 원형의 대지가 다 말해주고 있다네. 자네도 잘 들어보면 들릴수도 있겠지. 이 곳이 자네에게 그 ‘의미’를 쥐어주지 않는다면 아마 그건 다른 곳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말이야. 자네에게 나와 함께 여기에 남아달라고 애원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물론 자네가 나와 같이 이 땅에 가족들을 데려와 살 생각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어떤가, 자네 생각은?”
아랍인은 백인의 그런 제안에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잠깐만 시간을 주시게나” 하더니 다시금 혼자 저멀리 동떨어져 앉아 생각에 생각을 이어갔다. 얼굴만 봐도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이루어지고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갈 정도의 표정이었다. 그렇게 그들 특유의 짧은 주기의 몇 날 며칠을 새고 고민을 이어가던 아랍인은 드디어 결심을 했는지 백인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깔끔하게 결심을 한 사람의 표정이라기보단 단순히 주어진 선택지들 중 그나마 제일 덜 불확실한 보기를 정답으로 고른 학생의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나아가야겠네. 솔직히 말하면 자네가 말해오던 그 어떤 믿음이랄까 하는것이 동해서 이런 선택을 한 것도 아닐세. 단순히 이전 친구와 같이 자네 또한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 이 길 위에 나를 위한 의미란 것은 있고 아직 난 그것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결론밖에는 나오질 않았네. 어찌된 일인지 온 몸이 이 논리적으로 도출된 정론을 반대하려 했지만 나는 이성적으로 내 앞길을 가기로 결정했네. 이렇게 말하는 순간 마저도 그닥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 부끄럽군.”
“아니야. 자네 말이 맞아.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분명 자네는 아직 자네에 걸맞는 의미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라네. 계속해서 길을 걸어나가게나. 내 이자리에서 반드시 그대를 위해 매일같이 기도하겠다, 약속하지. 이 곳으로 오게 될 우리 가족들과 함께 말일세.”
그 다음엔 서로간의 적막이 찾아왔다. 각자 자신이 내뱉은 말에 관하여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긴 적막을 먼저 깬 건 백인이었다. “그럼 떠나기 전에 나를 위해 함께 한 잔 거하게 들이켜주지 않겠나?”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가방에서 술을 빼들고 그에게 말했다.
인도인은 아직 생각이 정리가 다 안 된 모양이었지만 그렇게 근사한 미소를 보인 백인을 두고 어쩔 바가 없었는지 “그거 좋지” 라고 크게 외치며 자신의 의자를 들어다 그의 옆으로 가져가 앉았다. 거기서 그들은 둘 사이에 불을 피워놓고 자신들이 봐온 길을 떠올리며 각자 인생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각자의 가족과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지금 가장 하고싶은 일은 뭔지, 하지만 백인은 그것을 참아가며 여기까지 왜 버텼으며 인도인은 왜 앞으로 더 참아가면서 의미를 갈구해야하는지에 대해 쉼없이 논했다. 처음 동양인 친구를 두고 걸을 때와 같이 동이 틀 때 까지 그들은 때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때로는 놀란 표정으로 하지만 대부분 환하게 웃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들을 공유했다. 그리고 각자의 축사를 마지막으로 건배를 하고는 시원하게 마지막 잔을 들이켰다. 그들의 술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그들은 서로를 위해 각자 소중히 아끼는 물건을 하나씩 교환하고는 제각기 다른 노선을 시작할 다음날을 준비하기 위해 텐트에 들어가 잠에 들었다.
이런 그들을 가만히 보고 있는 나는 여전히 그들이 귀엽지만 어리석고 안타깝지만 딱히 도울 방법은 찾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술을 마시고 내 유륜을 (그들의 단어를 빌려쓰자면 ‘보라색 대지’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한 편으론 정말 부럽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나에 비해 한낱 사이즈도 작고 내 몸 위에서 의미를 찾겠다느니 말겠다느니 하는 미개한 생물들을 앞에다 두고 부럽다는 감정이 들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부러움은 내 가슴 한 편 크게 자리를 잡고 앉아 도무지 나갈 의사를 비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살면서 그런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일 것 이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누구와 대화를 나눈다거나 술잔을 나눈다거나 한 적은 있었지만 이들처럼 열정적으로 또는 솔직하게 그들을 나와 동일선상에 두고 무언가를 나눈 적은 없었던 것만 같았다.
나는 왜 친구가 없지? 가족한테 연락은 왜 안했지?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어가면서 나는 도대체 뭘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하고 그들이 텐트에서 나오기 전까지 혼자 골똘히 깊은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