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생각한다. 모자 기술자의 속병을 낫게 한 것은 약도 기도도 사랑도 아니었다. 갈대밭에서 그의 외침이었다. 응어리를 꺼내자 병이 나았다. 페터 한트케의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도 모자 기술자처럼 응어리를 꺼낸다. 

소설은 액자구조로, 약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다. 버섯을 찾아다니고 매일 중세 서사시를 읽는 약사가 있다. 실어증이 있는 그는 부인과 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다. 약사는 저명한 시인과 스키 영웅을 만나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그 둘은 고향에 가고 싶어 한다. 가는 길에 시인과 스키 영웅한테 고통스러운 일이 계속 일어난다. 압권은 시인과 아이의 재회이다. 시인이 아이와 재회하자 아이는 경찰에 끌려간다. 그런데 그것은 약사의 사건이기도 하다. 약사는 아들이 절도를 하자 때리려 했던 적이 있었고, 아들은 약사를 떠났던 것이다. 여행을 계속하지만 시인과 스키 영웅이 청년들과 싸우자 약사는 그들과 헤어진다. 헤어지는 순간 스키 영웅과 시인은 노래를 부른다. 자기 안의 상실, 외로움, 고통, 수치심에 대한 것이었다. 스키 영웅과 시인은 약사와 겹친다. 성찰하기 전 약사의 모습이었다.

혼자가 된 약사는 스텝 지역으로 걸어 들어간다. 자신의 도플갱어가 총에 맞는 것을 보고 다시 아들을 떠올린다. 아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때 나타난 한 여자는 그에게 실어 상태를 떨쳐버리라고 말한다. 실어 상태는 기억을 파괴하고. 당신도 파괴할 것이라고.


“그러니 당신은 새롭게 말하려는 시도를 해야 해요. 새로운 단어를 찾아내고, 문장을 새로 만들고, 큰 소리로, 아니 소리라도 내보세요. 당신의 말이 비록 얼토당토않고 터무니없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당신이 다시 입을 연다는 사실이에요.”p198

이후 약사는 달라진다. 스텝지역을 떠나며 “되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을 테다!” p199 소리친다. 자기 안에 상처로 남아 있는 가족을 위하여 살겠다. 다짐하고, 아내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반성한다.

약사의 행위가 여행을 기점으로 바뀌는 것이 재밌다.(여행 전에 버섯 따러 다니고 중세 서사시 읽다가 여행 후에 하지 않는다.) 버섯은 실어증을 치료하려는 목적이면서 자기 내부로 여행을 떠나게 하는 매개물이었다. (약물에 중독된 것처럼 약사의 여행이 환상처럼 서술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약사는 중세 서사시를 읽었지만 여행을 떠나서는 읽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다시 읽으려 하지만 고통을 느껴 읽지 않았다. 중세 서사시가 여자에게 약물을 먹여 여자를 구속하는 것, 사랑으로 위장된 폭력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드러난다. 중세 서사시 앞에서 괴로워하는 것에서 약사가 성찰을 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약사는 ‘나’에게 부탁을 한다. ‘나’에게 들려 준 이야기를 글로 옮겨달라는 것이다. 이제 약사는 중세 서사시를 읽는 대신 자기가 말한, 자기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말하기(쓰기)’는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하고 밖으로 쏟아내게 한다. ‘읽기’로 감정은 전이된다. ‘말하기(쓰기)’와 ‘읽기’는  이해, 치유, 성찰로 사람을 변화시킨다. 약사는 바뀌었다. 

한편으로는 약사의 여행이 중세 서사시같기도 하다. 고통에 빠져 있던 약사가 여행을 떠나서 여러 사건을 겪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기사가 지옥에 내려가서 모험을 하며 보물을 얻는 것을 연상시킨다. 보물을 얻기 위해선 반드시 지옥에 내려가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이 소설이 모호한 것도 재미있다. 과거의 이야기인지 현재의 이야기인지, 환상인지 실재인지 뚜렷하지 않다. 심지어 지시대명사와 문장부호도 딱 구분되지 않는다. 약사가 버섯을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문장이 이어지는데, 이것을 페터 한트케가 가지고 있는 독창적 언어. 즉 문학적 실험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같다. 어쩌면 자기 안의 고통을 여러 시각으로 보기 위한 방법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 안의 문제는 단 한 가지 원인으로 일어난 게 아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보는 시각도 다양해야 하니 말이다.

어렸을 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읽고 따라했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소리를 질렀다. 때로는 외마디 비명일 때도, 때로는 하나의 문장, 하나의 이야기일 때도 있었다. 억울함, 미움, 짜증, 슬픔, 미안함, 짝사랑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눈물이 핑 돌고 마음이 풀렸다. 이후로 옥상에 올라갈 수 없게 되자(누가 밤에 소리를 지른다는 소문이 돌아 경비 아저씨가 옥상 문을 잠갔다.) 일기를 썼다. 손은 아팠지만 마음이 풀렸다. 그러다 누가 내 일기를 본다는 생각이 들어 (서랍 속 일기장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았다. 쓸 걸 그랬나? 그랬다면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었을까. 동생을 때리지 않았을까. 친구한테 말을 매섭게 하지 않았을까. 일기를 다시 써야겠다. 약사가 그러했듯이 나도 나를 쏟아내고 싶다. 내 주위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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