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 열 받아서 매일매일 써내려간 임신일기
송해나 지음, 이사림 그림 / 문예출판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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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송해나


입시, 보습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생부터 고등학교 3학년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과 그 학부모를 상대하며 단단한 다짐을 마음에 새겼다. 내가 나중에 한국에서 결혼을 할지 안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앞으로 한국에서 계속 거주할지도 말지도 불확실하지만) 설령 살더라도 이 나라에서만큼은 아이를 양육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데 매일 힘을 쏟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우울증과 불안 발작 및 공황 발작은 내 삶과 뗄 수 없는 지병이 되었고, 그건 자기혐오로 아주 쉽게 이어졌다. 이 자기혐오는 또다시 우울증을 불러오는 악순환의 고리였다. 이런 내 생애에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란 상상조차 쉽지 않은 대업이었다.

반드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한다는 생각도 해본 적은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아이를 입양해서 키울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네 핏줄이 그래도 중하다'면서 나중에 결혼해 보면 달라질 거라고, 제 배 아파 낳은 자식이 더 소중한 법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내가 열 달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나는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런 말을 들어도 자신감은 생기지 않았다.

그 와중에 대한민국 사교육의 현장에 푹 담겨 있었다. 양육자들은 자식들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랐고, 제 몸을 깎아가며 아이들의 교육에 열을 올렸다. 맞벌이로 입에 풀칠하며 살면서, 집에서 아이를 돌볼 수 없으니 학원 여러 군데를 뺑뺑 돌리기도 했다. 학원에 내몰린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잘하는 것은 뭐고 못 하는 건 뭔지, 그래서 나중에 뭐가 되고 싶은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 따위 없이 매일 주어진 삶만 살아냈다.

나는 학생 때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학교 공부는 당연히 지겨웠지만, 어떻게든 대학만 가면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을 테니까, 현재의 시간을 깎아서 미래의 내 행복을 마련해보려고 애썼다. '요즘 애들은 안 그래'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고, 나 때도 내 이전에도 분명 나 같은 학생만큼 그렇지 않은 학생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학생이 늘어나는 추세라는 이야기가 서글펐다.

꿈을 빼앗긴 세대. 꿈꿀 기회조차 주지 않는 사회. 이 사회에서 나는 양육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이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트위터에서 '임신 일기'라는 계정이 화두가 되었다. 작년 일이었고, 그맘때쯤 나는 트위터를 하지 않고 있었다. 건너 건너 소식만 듣다가 '임신 일기' 계정주의 책이 발간되었고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출간 전에 책을 받아 읽을 수 있었다.

읽기는 완료했지만 나는 어떤 글을 쓰면 좋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어떤 말을 얹어도 임신 경험이 없는 나는 그냥 말을 얹는 것 정도 밖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의 글은 어딘가에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야기를 보태고자 했다.

한국은 저출생이 문제라고 떠들며 정작 제도는 미비하다는 건 계속 말하기도 지겨울 정도다. 사회적으로 출생을 장려하며 가임기 여성지도 따위나 만드는 헛짓거리를 하며 정작 임신한 개인을 위한, 그리고 출생한 아이와 아이를 키우는 가족을 위한 대책은 그다지 없다. 단지 개인의 선한 의지에만 의존해 사회를 억지로 굴린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아마 비슷한 시기에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미국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일 것이다. 사회 제도적으로도 그렇고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임산부에 대한 인식도 그 격차가 너무 커서 기함을 토했다.

그래, 우리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지금 내가 아이를 낳아 키울 이 시대에는 요원한 일이겠구나, 하는 절망감이 다시 온몸을 휘감았다. 내 다음 세대는 좀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에 적극 저자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어서 나는 탈조선(한국을 벗어난 곳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는 것)을 다시금 꿈꾼다. 도망치는 거, 맞다.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으니까.


육아휴직 제도를 악용한 사례를 살피면 정말이지 욕이 안 나올 수 없었다.

P. 146~147 놀랍게도 육아휴직 기간에 아기를 동반하지 않고 장기해외여행 혹은 어학연수를 가거나 대학원에 진학한 공무원들이 발각되어 휴직 중 다른 활동에 대해 엄격한 확인이 행해졌다고 한다. 아니, 그 바쁘다는 육아 중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정말 있었다고? 다양한 기사를 확인해보니 놀랍지도 않게 대부분 남성 육아휴직자들이 벌인 일이었다. 육아를 핑계로 휴직계를 낸 후 아기의 양육은 모두 아내에게 맡긴 채 본인의 승진과 여가를 위해 시간을 이용한 남성들 때문에 진짜 아기를 양육하는 사람들만 피해를 입게 됐다.
행정도 참 그렇다. 육아휴직을 악용한 남성들을 제대로 처벌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탄탄한 장치를 구축하기보다는 모든 육아휴직자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려는 행적적 나태함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자의로, 타의로 육아를 떠맡게 된 여성을 더 집에만 가두고 말았다. 고민하지 않는 행정가들은 이 죗값을 어떻게 치르려고 그러나.


저자는 임신 일기를 쓰면서 임신 주수에 맞춰 고민이 다양화하고 확장하는 스스로를 목도하기도 했다. 임신 초기와 후기는 분명 다르고, 사람은 자신이 이미 겪었지만 지나고 나면 본인이 힘들어했었다는 것조차 잊기도 한다. 그런 고민이 담긴 소중한 일기를 읽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아이가 생긴다면, 나도 나의 경험을 일기로 써 내려가며 또 다른 임신 일기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한국에서는 절대 아니야.

이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단어도 있었다. '질식분만 Vaginal delivery'이라는 단어인데, 흔히 말하는 '자연분만'을 뜻했다. 네이버에 '질식분만'을 검색하면 그 단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고, 자연 분만에 대한 설명만 구구절절 나와있다. 아직도 단어에 대한 인식은 가야 할 길이 멀다.

메모도 해놨는데, 동음이의어라는 것은 알지만 '질식'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보다 올바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되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P. 296 사람들은 엄마라면 그저 모두 그렇게 산다고 말한다. 너 역시 그렇게 컸고 아기를 맞이하는 건 원래 그런 거라고 말이다. 엄마는 다 그런 거란 말, 모두 다 그렇게 살았고 너도 그렇게 살 거란 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 이 말은 아기와 양육자 모두에게 너무 폭력적이다. 이런 말들은 아기를 의무감이나 죄책감으로 돌보라는 이야기의 변주이고, 임신과 양육에 관심 없는 사회를 용납해줄 뿐이다. 실제로 임신과 출산, 산후 회복을 위한 몸조리, 양육까지 긴 과정을 경험하면서 한국에서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몫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임신에 대해 신비화하고 신성시하면서 정작 현실은 들려주지 않고 쉬쉬하며 감추는 것, 그것은 저자의 말마따나 아기와 양육자 모두에게 폭력적이다. '내가 널 이렇게 고생해서 낳았으니 너는 나에게 잘해라'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하는 많은 양육자들이 떠올랐다. 오롯이 개인의 몫의 고통을 감내하면 그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좀 더 많은, 다양한, 임신 일기가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모성 서사 하나하나가 다 여성의 이야기니까.





*본문 참고 기사

https://www.yna.co.kr/view/MYH2019021101480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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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99
줄리아 피어폰트 지음, 만지트 타프 그림, 정해영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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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페미니스트 99

줄리아 피어폰트 글

만지트 타프 그림


어떤 판사가 "여성은 임신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며 관계를 가질 권리가 없다"라고 단언했던(P. 212)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피임약을 유통하는 것이 죄가 되었고, 여성이 피임을 요구하는 것 역시 터부시 되었다. 그러한 때에 "모든 여성이 삶과 자유를 누리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첫 단계는 엄마가 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엄마가 되는 것은 여성의 생존권과 자유권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다."라고 말하던 여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바로 미국산아제한연맹(ABCL)을 설립한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다. (P. 211)


어릴 적에 우리 집에는 위인전 전집이 있었다. 어린이 세계 명작 전집과 더불어 책장을 가득 채운 세계 위인전집과 한국위인전집은 처음에 내 흥미를 그렇게 끌지는 못했다. 가나다순으로 정렬되어 있던 전집을 여러 차례 도전했지만 늘 강감찬 이상은 읽을 수가 없었다. 차례로 읽기를 포기하고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골라 여러 번 읽기를 했고, 나는 곧 신사임당과 유관순, 마리 퀴리와 헬렌 켈러 그리고 나이팅게일과 잔다르크 같은 인물들과 친해졌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가 위인전 전집에서 발견한 몇 없는 여성 위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많이 꼽아 주어도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는데, 위인전 전집은 세계 위인들 50명과 한국 위인들 50명으로 이루어진 총 100명의 이야기인 것을 감안하면 절망스러운 수준이다.

여성들의 이야기는 곧잘 평가절하 되었다. 애초에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 적이 별로 없고, 그 실낱같은 확률을 넘어서 뛰어난 기량을 뽐내어도 쉬이 무시되곤 했다. 역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기록한 대로 전해져 내려왔고, 역사적으로 권력은 항상 남성의 것이었다. 업적을 이루어낸 여성들의 삶은 그 자체로도 고단했을 테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평가절하 당하거나, 남성의 이름이 덧씌워지거나, 기록되지 못하고 흩어져버리기도 했다. 그 영향으로 후대의 여성들은 이렇다 할 롤모델이 없이 어렵게 연명해나갔다.

페미니즘의 붐이라면 붐이 일면서 그렇게 흩어져 사라질 것 같았던 흔적들을 모은 책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이 와중에 가히 희망적이다. 여성 위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린 여자 아이들이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 99>는 원제가 <The Little Book of Feminist Saints>인데, 직역하자면 '페미니스트 성인들에 대한 작은 책'이다. 이는 저자가 가톨릭의 성인들과 그들을 기리는 축일이라는 개념을 본떠, 페미니스트들과 그들을 기리는 축일을 정하고 짧게 설명한 책들이다.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다 보니까 깊이 있는 이야기보다는 간결하고 짧은 성과에 집중한 책이다. 다 읽고 나면 어쩐지 여성 위인들에 대한 상식의 폭이 한층 깊어진 것 같은 정도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여성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를 페미니즘 이념 자체를 인지하거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 하지 않았더라도, 이를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낸 사람들이라고 아주 많이 넓게 정의를 하더라도, 이 정의에 부합하지 않은 여성들도 많았다.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인명사전이라고 하기보다는, 부제로 붙은 '세상을 바꾼 위대한 여성들의 인명사전'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책은 '페미니즘'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이유를 지금껏 모르고 지나쳤던 이야기들을 꺼내어 기록한 것에 의의를 두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다. 여성 위인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고, 게이 남성이지만 드랙퀸으로 이 책에 등장한 마샤 P. 존슨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책 본문에는 '여장 남자이자 게이 해방 운동가'(P. 19)라고 소개가 되었는데, '여장 남자'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 같다. 한국어에서 '여장 남자'의 함의는 '드랙퀸'과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에는 정말 수많은 여성 위인들이 등장한다. 내가 알고 있었던 이들보다는 몰랐던,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여성들이다. 책을 읽으며 즐거웠던 지점 중 하나는,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면 책에 나온 그림보다 더 정확한 인물의 사진을 찾아볼 수도 있고 그 인물의 다른 업적들도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마돈나의 'Like a Virgin'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서 검색해서 감상하면서 그녀의 말을 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세상은 결국 그런 측면만 본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들이 여러 측면을 가지고 있죠. 경력이 길어질수록 우리가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노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 안에는 수백 가지 모습이 있는데, 지금 세상이 그중 어떤 모습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P. 39) 또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소개를 읽으며 그의 작품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도 있었다.

P. 47~48 재판관은 성폭행 피해자인 그녀에게 엄지 압착기(엄지손가락을 끼우고 나사를 돌려 조이는 고문 기구: 옮긴 이)를 쓰도록 명령했다. 그녀가 진실을 말하는지 확인한다는 구실이었다. 또한 그녀가 본인의 주장대로 정말 처녀성을 잃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법정에서 부인과 검사가 이루어졌다. 수치스러운 재판은 6개월 동안 이어졌고 그 기간 동안 아르테미시아는 결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가 그녀의 그림 선생으로 고용한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과거에도 성폭행 전력이 있었던 타시에게 징역 1년이 구형되었으나 그는 결국 실형을 살지 않았고, 그녀의 아버지는 아르테미시아를 조용하고 신속하게 결혼시켜 피렌체로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의 진짜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읽지도 쓰지도 못했지만 그림은 그릴 줄 알았다. 그리고 그림을 그렸다. 강한 여성들, 복수를 꿈꾸는 여성들을 그렸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는 구약 성서에서 아시리아의 장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대인 과부 유디트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그녀가 유디트의 얼굴로 그린 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고,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아고스티노 타시의 것이었다. 타시가 지금도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이 작품 때문이다. 그는 원래 그녀의 그림 선생이 되어야 했으나 대신 그녀의 작품 소재가 되고 말았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


물론 이 책에도 한계는 있다. 여성 위인들이라고는 하나 구색 맞추기 식으로 흑인과 동양인들 몇몇을 끼워 넣은 것 같은 느낌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미국 출신의 위인들이다. 읽어 내려가면서 자꾸 미국 사람들만 등장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직접 세어보니 미국 사람이 총 55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아마 저자의 한계가 이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저자는 400명 중에 추려낸 것이라고 했지만, 그 400명의 리스트에서도 비율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인종&국가 비율이 균등한 400명의 리스트에서 의도적으로 미국 사람들을 과반수 이상으로 채웠다는 뜻인데, 이러나저러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으며 인물들의 출신 국가를 메모했다. 그 결과.

그럼에도 이 책이 많은 곳에 소개되어서 읽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브론테 자매가 에밀리와 샬럿 이렇게 둘만 있는 줄로 알았다. 사실은 <애그니스 그레이 Agnes Gray>라는 책을 쓴 '앤 브론테'를 포함해 세 자매였던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야밤에 허름한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나치 침쟉자들에게 총 2만 3천 톤의 폭탄을 투하한 소련의 여성 조종사들로 이루어진 '밤의 마녀들'에 대한 활약에 대해서도 읽을 수 있었다. 장애를 딛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으로 끝이 났던 헬렌 켈러 위인전의 다음 이야기로 그가 나중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과 반전 운동을 했으며, 미국 시민자유연맹(ACLU)의 창립자가 되었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서야 알았다.

그래서 이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와 같은 여성 위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고 글을 끝맺고 싶다.


P. 245 "아아, 우리 같은 나이 든 여성들이 많이 배웠더라면,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피할 수 있었을까요!" - 후아나 아녜스 델라 크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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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엔 카프카를 - 일상이 여행이 되는 패스포트툰
의외의사실 지음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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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엔 카프카를

의외의사실


문학 읽기란, 나에게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면밀히 살피는 시간이다. 고전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살아본 적 없는 오래된 시간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문학작품이다. 문체가 다소 딱딱하고, 중언부언에, 사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조차 안 되는 문장들이 이어지는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역시 오래전에 쓰인 글들이 현대까지 읽히는 데에는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고전문학을 읽으며 깨닫게 된다.

<퇴근길엔 카프카를>은 글과 그림이 버무려진 고전문학 에세이다. 에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은 고전문학에 나오는 글귀들을 그대로 옮겨오며 작가의 생각을 간간히 표시하는데 그치는데, 그래서인지 읽어보지 않은 작품들에 대해서는 나의 견해를 덧붙일 수가 없었다.

작품 내의 세계관만 겉핥기 식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문학작품을 읽은 작가가 생각한 명장면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해 놓기도 했고, 작품의 작가에 대해 조곤조곤 알려주기도 했다.

소개된 열세 편의 문학작품들 중에, 읽어본 이야기보다 읽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는 사실에 어쩐지 패배감을 느꼈다. 책을 많이 읽었던 편이라고 자부했는데, 사실은 단 0.1%의 작품도 읽어보지 못한 애송이라는 생각에 속상함을, 그리고 더 열심히 많이 읽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면 바보 같을까?


문학 에세이를 읽는 것은 문학 작품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자세가 된다. 문학 작품은 작품 속 각각의 인물들에게 내가 말을 걸어보는 것이라면, 문학 에세이를 읽는 것은 제삼자가 작품 속 인물들과 나눈 대화를 엿듣는 것과 같다고 느껴진다. 문학작품과 그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그 작품을 읽은 다른 사람의 세계를 함께 엿보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고 나의 감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원래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작품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듣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즐거움이다.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에 대한 타인의 감상은, 그래서인지 조금 가려듣기도 한다.)


P. 408~409 책 한 권이 담고 있는 의미와 맥락은 얼마나 많은가, 읽고 또 읽어 얻을 수 있는 감정의 종류는 또 얼마나 많은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을 읽어보는 것도, 예전에 한 번 읽어 봤던 혹은 이미 여러 번 읽어본 책들을 다시 읽어보는 것도, 빠르게 훑어나가듯 읽는 것, 문장과 문장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를 꼼꼼히 살피며 읽는 것. 다양한 읽기와 다양한 감상을 짧은 시간에 가능하게 하는 것은 분명 문학 에세이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덮고 나니, 나도 어쩐지 오늘 읽은 이 책을 그림 한 장으로 그려보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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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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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그의 어머니를 사랑하도록 자라지만, 딸은 그의 아버지를 증오하도록 자란다.

요컨대 이런 말이다. 나이가 어느 정도 찬 아들은 어머니를 이상적인 아내상으로 그리지만, 딸은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없는 남편을 찾고자 (혹은 결혼을 하지 않고자) 한다. 아들과 딸에게 최초의 이성(異姓)이란 각자의 부모인데, 가부장적인 가정 속에서 부모의 역할은 각자 다르게 나타난다. 아들에게 어머니는 가족을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헌신하고, 그래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지는 반면에, 딸에게 아버지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며, 성차별을 가정 속에서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하여 아들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도 경쟁자로 여겨 어머니를 혹은 어머니와 비슷한 여성을 사랑하도록 자라나고, 딸은 어머니를 동정하지만 그와 다른 삶을 꿈꾸고 싶어 하고 아버지를 또는 아버지와 비슷한 남성을 증오하도록 자랐다.


나는 평생을 가부장 가정에서 '딸'로 자라서인지 오이디푸스의 부친 살해와 모친과의 동침 이야기는 너무나도 생경했다.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기는 아들,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 프로이트는 이를 모든 남자가 품고 있는 잠재적 욕망이라 해석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이름까지 붙여줬다. 현대의 가부장 사회에서도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현실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여성 혐오적인 관점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남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의 서사에 아버지에 대한 동경,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빼면 스토리 진행이 어려운 지경이다.

배트맨과 슈퍼맨을 화해하도록 도와주는 두 아들의 엄마, 마사. 이 장면에서 얼마나 짜게 식었던지....

오르한 파묵의 '빨강머리 여인'이라는 책에 대한 설명도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부터 시작했다. 아버지의 부재, 그 와중에 우물 파는 마흐무트 우스타를 도우며 그를 아버지로 여기지만 결국엔 다친 그를 내버려두고 도망치는 소년, 젬의 이야기이다. 젬은 자라면서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그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내 아이쉐와의 후사가 없자 건설회사를 세우고 아들로 여겼는데, 어린 시절의 딱 하룻밤을 통해 태어난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 그 아들에게 사로잡힌다.

아버지의 부재에 관한 젬의 고민.

젬은 서양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동양의 쉬흐랍과 뤼스템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부친 살해와 자식살해 속 비슷한 점들을 짚어낸다. 두 이야기는 가해자와 피해자만 달라졌을 뿐 많은 점들이 닮아 있었다. 특히 부자간의 서로의 얼굴을 몰랐다는 점이 죄질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면죄부로 주어진다는 점을 하나로 짚어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젬의 이야기는 이 둘 중, 오이디푸스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빨강머리 여인에게 매혹되어서 자신이 아버지라고 여기던 마흐무트 우스타를 죽음의 위기에 처하도록 만들었다. 이 빨강머리 여인, 귈지한은 또 다른 비밀을 품고 있는데 (이는 책을 읽고 직접 확인하며 더 좋을 것 같다!) 훗날 귈지한은 젬의 아들을 데리고 다시 등장한다.


시종일관 젬의 시점에서 진행되던 이야기가 3부에 넘어가서는 귈지한의 독백으로 이어진다. 귈지한은 젬의 이야기에서 철저한 '주변부'의 사람이었지만, 사실은 젬의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나가던 하나의 큰 '운명'이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예언을 피하지 못한 것처럼, 젬 역시도 그에게 닥친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젬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귈지한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끝내는 그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버린다.

터키의 좌익 운동가들도 과거에는 여성을 배제하는 운동을 했다.

주변부에서 태어나 주변부로 자란 딸은 어머니가 됨으로써 비로소 이야기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고전 속에 (사실은 의외로 현대의 이야기까지도) 남성의 서사는 지겹도록 많지만, 여성의 서사는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한없이 자애로운 어머니, 성녀 - 혹은 타인을 악으로 물들이는 창녀와 같은 모습 이외의 여성 서사를 찾아보기란 꽤 쉽지 않다. 그게 아니라면 성녀인 줄 알았지만 창녀였던 여성의 이야기가 이제까지 여성의 이야기 전부였다. 결국 중심적인 역할은 남성들에게 넘겨주고 주변부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오르한 파묵의 '빨강머리 여인' 역시도 이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다만 3부에서 귈지한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며, 단순히 성녀-창녀로 구분될 수 없는 여성의 모습을 (비록 성녀에 좀 치우친 이야기긴 했지만) 보여주어 주변부에서 조금은 중심으로 옮겨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했다.


오르한 파묵은 2006년 터키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문학계 미투 이후 노벨 문학상에 대한 신뢰가 곤두박질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과거 수상자들의 명성까지 떨어뜨릴 수는 없던 모양이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이번 기회에 처음 읽었는데, 터키의 고전과 그리스의 고전을 잘 버무려서 이야기를 진행한 지점이 흥미로웠다. 터키, 이스탄불이 세월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정교하게 그려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어쩐지 그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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