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깨져서 버리고 하나가 남은 와인잔에 두 번째 와인을 따랐다. 두 번째 잔이다. 1887을 2/5 정도 마시면 내일 아침 어떤 상태인지 정리해서 보고라도 해야 할 듯이 두 번째 잔을 채웠다. 와인잔을 따를 때면 항상 강박관념처럼 잔의 1/3을 채워야 하는데 밑이 불룩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그리고 씻을 때 부주의하면 손잡이가 똑하고 부러뜨려질 것 같은 이 잔의 1/3은 어디쯤일지 쫓기듯이 궁금하다. 그리고 와인병을 돌려야 하는데 손목부터 이미 부자연스럽다. 두 번째 잔이라서 안압이 높아진 거 같고 머리와 어깨 가운데 어딘가가 무직해지면서 평소와는 다른 감각이 몸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억눌려졌고 또 이런저런 핑계로 그리고 다짐으로 하지만 어떤 진척도 없는 것들을 당장이라도 해야겠다는 그런데도 무기력한 의지가 튀어 오른다.
알라딘 블로그의 편집 창은 왜 아직도 이렇게 촌스러울까를 생각하지만 별수 없이 그 편집 창을 연다. 연역법이니 귀납법이니 가설검증이니 그런 수식일 뿐인 피상적인 장식의 어떤 법들은 이미 평소와는 달리 두 개의 초점을 가지기 시작한 눈이 모니터 건너편으로 보내버렸고, 대신 울프의 의식의 흐름과 같은 긴 뱉음이 자리 잡아 쓰기를 종용한다.
비약이다.
연산군은 아닌 것 같다. 광해군이 맞다. 군 중에서 억울한 군이.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왕 중에 군으로 끝나는 몇 안 되는 연산군으로 생긴 편견으로 더 억울한 혐의 (allegation)을 받는 왕은 광해군이 맞다.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기도 하고 우리 역사를 좀 더 알고 싶기도 해서 '광해군'을 본다.
어떤 책이었더라.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은 사실 그 파도의 정점인 마루에 마련해둔 그 자리에 올라갔든 떠밀렸든 위치한 적당한 보통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말한 책이. 번역이 정직해서 힘들었던 '역사란 무엇인가' 였던 것 같다.
어떤 전개의 방법을 제쳐버리고 결론처럼 말하면, 광해군을 대체하기 위해 인조반정이 일어났지만, 서인은 광해군의 금에 대한 노선도 반정의 기치 중 하나였지만 그대로 답습했고, 산림을 우대하고 붕당을 교섭하지 못하는 정계도 변화시키지 못했으며, 백성들의 피폐와 혼란도 방관했다. 그래서 광해군은 안타까울 뿐이다.
인조반정은 어쨌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고 어쨌든 동생인 영창군을 죽였고, 어쨌든 애석한 후금을 사대주의로 어리석게 받들지 못했고, 전쟁과 전 국가 수준의 무리한 토목 공사를 병행하면 반듯이 망한다는 그 궁궐 건축을 왕권수호를 위해 소심함으로 더 집착해서 강행한 광해군을 탄핸했다.
역사는 '무엇을' 그리고 '왜'라는 몇 가지의 피상적인 편린으로 압축 서사하기에는 우리의 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하고 조밀한 삶 속을 일기로 모두 서사할 수 없는 것처럼 턱없이 부족하고 '편향'을 일으킬 뿐인 것 같다.
철학은 그리고 그 철학 속에 외계인처럼 아고라의 광장에서 하루 종일 서 있었던 소크라테스나 몇백 킬로미터이든 걸어 다녔던 루소와 같은 철학자는 '무엇'과 '왜'가 아닌 '어떻게'에 대해 사유한다고 하지 않던가. 죽을 때도 '닭을 바쳐야 한다고' 의문만을 남기도 떠나는 그 '철학자'들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는 번역의 문제인지 부족한 것 같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와 그 존재의 운동을 '무엇'과 '왜'로 사유하기에는 부족해 '어떻게'를 끌어드렸지만, '어떻게' 또한 '어떻게'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턱없이 부족한 것 같다. '어떻게'. 나비효과처럼 아주 사소한 것들이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고, 공리처럼 맹신했던 비중을 차지하는 몇몇 권위 있던 이유와 이미 정략결혼 한 '어떻게'가 그저 말 만들기일 뿐인 경우도 허다하다. 어쩌면 인간이 내뱉은 모든 '무엇'과 '왜'와 '어떻게'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또 다른 장소의 이젤에서 그린 정물화일 뿐일 수 있다. 인간의 작문 시간에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또 발명된 하나의 단어일 뿐일 수 있다. 나는 지금 파도를 옹호하고 있다.
와인잔 손잡이에서 배어 나온 것 같은 와인을 마시다 '발명'을 보고 꺼내서는 안 될 테슬라 자서전이 생각났다. 게다가 부처님 오신 날은 발명의 날이기도 하다.
f = ma
이 방정식으로 자신의 '발명'을 인류를 위한 일로 연길 시키는 연금술사 같은 테슬라가 생각난다. 인류를 나아가게 하기 위해 질량을 높여야 하니 (m) 식량이 풍부해야 하고, 그 풍부한 식량을 위해 많은 비료가 필요하고, 그 방법으로 공기 중의 질소를 이용해서 질소 비료를 만들어 갔던 -정말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고 한다 - 테슬라. 그리고 마찰력을 줄여야 하는데, 인류 발전에서 마찰력은 전쟁이고 그 전쟁은 막을 수 없으니 전쟁 중 인명피해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해서 무인 무선 조종 보트를 만들어 시연해 사람들의 혼을 빼놓은 테슬라. 전자 기기도 익숙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테슬라는 무인 보트를 위해 기계 학습도 예측했다.
파도의 정점인 마루는 곧 자신을 숨기며 계속 파동 하여 골로 내려갔다 어느새 또 마루가 되는 역사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테슬라는 역사가 의도를 가진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 그 파도에 서프보드를 타고 이리저리 마음껏 휘젓고 다니다 자신의 모래사장에 닿았다.
다시 광해군으로 돌아와 보자.
임진왜란 때 둘째였지만 왕세자가 되어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이 항거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었고, 조선 왕 중 주변 정세에 가장 밝아 명과 금을 잘 살펴 정보력이 뛰어난 외교 정책을 펼쳤고, 명이 그토록 탐냈던 그래서 후금과의 전쟁에 강제로 동원해 대부분 전사시킨 조선의 소총부대가 반이나 되었던 정예병을 양성했고, 피폐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했으며, 왜란 때 불탄 건축물을 복원하고 흩어진 역사서를 다시 모았고 소실된 문서들을 다시 인쇄하는 등 걸출한 업적을 남긴 광해군은 왜 몰락했을까? 그리고 조선이 자주 국가가 되기 위해 누구보다도 애썼던 광해군이 왜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졌을까?
서인, 남인 등의 신하들을 포용하지 못했고 - 파격적으로 등용한 반대파인 서인 출신 신하들 결국 인조반정의 주된 인물이 되었다 - 무리한 궁궐 건축으로 나라 살림이 매우 어려워졌고, 소심한 - 다소 삐뚤어진 - 성격으로 적기에 결단을 내리지 못해서일까?
물론 소심과 결단력 부재에 대해서는 서양의 햄릿이 견줄 만 할 것이다. 하지만 햄릿의 우유부단함은 아버지를 잃고 그 원수와 재혼한 어머니 그리고 불투명한 왕위로 인한 '우울증' 때문이라고 하지 않던가.
조선은 이미 망해가고 있었다.
'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는 조선이 너무 오랫동안 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망해야 했던 조선의 싹은 광해군 이전 선조 아니 그 선조 이전부터 매우 강하게 싹트고 있었던 것 같다.
룬샷에서 혁신은 누군가 갑자기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마법처럼 실체화시키고 선전 (Propaganda)처럼 세상에 적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군인과 예술가로 조직을 나누고 현재의 밥벌이와 미래의 먹거리를 위해 일하는 두 조직을 조화롭게 운용해야 혁신을 꾀할 수 있다고 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물과 기름처럼 갈리지만, 광해군이 아주 잘했어도 아주 못했어도, 그리고 광해군이 아니었어도 '광해군'도 '인조반정'도 너무 오래 끌었고 빨리 망했어야 하는 '조선'도 여전히 또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광해군을 끌어내린 서인들에 의해 편집 당한 '광해군일기' 밖에 볼 수 없다. 다행히 실수 같지만, 실록 중 유일하게 중초본이 남아서 진실을 덮은 흔적을 알 수는 있지만, '광해군일기'는 덧칠된 유화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재위 기간이 15년 2개월이다. 왕세자로 오랫동안 전국을 다니며 고군분투했고 명이 인정하지 않아 마음고생을 했고, 폐위되어 재위 기간보다 긴 19년의 유배 생활을 했고 말년에는 시중 드는 여자아이에게도 면박을 받았다.
광해군은 여느 사람처럼 열심히 살기도 했고, 냉소하기도 했고, 영민하기도 했고, 소심하기도 했다. 그의 의도와 의지와는 다르게 어떤 때는 파도의 정상인 마루에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바닥인 골에도 있었다.
인조반정 직전에 그를 아기 때부터 돌보던 보모이고 광해군도 따르던 김개똥이라는 궁녀는 그의 약점을 잡았는지 이괄 등의 모반 준비를 미리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을 무마시켰다. 그 대목을 보고 광해군이 유배지로 떠나며 그의 가족들이 하나씩 죽어갈 때, 피르자다씨가 생각났다.
광해군은 피르자다씨처럼 그리워하는 (그리워하는 또는 잃어버린 missing 이라고 릴리아는 말한다) 항상 이름 순서를 헷갈리는 일곱 딸과 같은 정다운 가족이나 친구가 있었겠느냐고 생각되었다. 동파키스탄 독립전쟁이 있었을 때, 피르자다씨가 피를 말리며 애타게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려 먼 미국 땅에서 항상 정장을 입고 그 어떤 기쁨도 슬픔도 맞이할 수 있게 그렇게 정장을 입고 애타게 있다. 결국 돌아가서 그의 이층집이 무사하고 가족들이 안전하게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을 알게 된 기쁨과 행복 같은 인생의 '희'를 광해군도 그의 생에서 맛본 적이 있었을까?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도 희로애락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함께한 혈육과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그린 이젤 위의 캔버스는 심하게 덧칠되어있었고, 그 이젤마저 왜곡된 장소에 세워져 있었다.
그의 억울함을 선심 쓰듯이 조금이나마 풀어주기라도 한 듯이 광해군을 시작했지만, 결국 세잔까지 마시고 잠든 후 상쾌하게 일어나버린 나는 어느새 내 인생의 지나온 파도와 현재의 어느 위치와 앞으로의 파동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