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팝스 이근철씨가 로맨티스트는 콩글리쉬라 했다. Romantic에 명사로 '로맨틱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단다. 나도 사람들도 로맨티스트라는 말을 잘도 썼는데, 애초에 잘 못 만들어진 말이란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과 '확인'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랑'에 의해 유발되는 이 두 행동은 '사랑하는 행위'를 같은 목적으로 둘 것인데 말이다. '표현'이 '확인'을 포함하는 것일까? '확인'의 과정에 '표현'이 종속된 하나의 단계일까?















엄청나게에서 가장 흥미로운 커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할아버지는 로맨틱 - 우선 이 글에서부터 로맨티스트를 로맨틱으로 써보자 - 이고 나쁜 남자이고 할머니는 지고지순의 고통받는 여인이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한 것 같다. 그래서 할머니는 매일 방에 앉아 종이를 쌓아두고 소설을 쓴다.

할머니는 눈이 거의 안 보인다. 할머니는 소설을 쓰는 척한 것이다. 그렇다, 몇 개월인가 쓴 분량이 모두 백지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글을 쓰고 있다는 '행동'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독자는 할머니에게는 측은함을, 할아버지에게는 분노를 느낄 것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쓰는 시늉만 하는 것을 알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아는 것조차 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눈물 겹기도 하고 가슴 아프기도한 상황은 -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많이 만들어 낸다 - '표현'이 만들어낸 것일까? '확인'이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만들어낸 것일까?















로맨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대상'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 '대상'이 곁에 있든, 화석이 되어 과거의 유물이 되었든. 단 한 번의 사랑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영화나 소설을 통한 간접경험만으로도 그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다시 처음으로 '대상'이 있어야 로맨틱한 삶은 존재할 수 있을까?

옥스퍼드의 Romantic에 대한 그 네 번째 뜻의 삶을 위해서 말이다.

having an attitude to life where imagination and the emotions are especially important; not looking at situations in a realistic way (초딩 번역: 어떤 상황에서 현실적인 것보다는 생각이나 감정이 더 중요하게 살아가는 것)

















부조리는 두 세계의 대면에서 생긴다고 한다. 어긋나 도저히 맞출 수 없고 맞춘다는 것도 의미가 없어 보이는 그 대면의 틈에서, 카뮈는 '희망'을 말한다. 어쨌든. 나는 부조리만 열심히 탐독했는데, 그래서 희망을 찾지 못했는데.















그저 또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그 무상함과 덧없음만이 가득 느꼈는데, 아니 그 부질없음을 논리적인 이론으로 더 채워 넣어 버렸는데.


그런데 궁금하다. 다시 책을 펴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참존가의 결말이 희극이었는지 비극이었는지.

아니,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점심이 한참 지나간 소리가 들린다. 로맨틱한 삶을 잠시 또 접어두고 현실적인 삶으로 전환해 본다. 시지프가 굴러간 돌을 다시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기 위해 그 언덕을 내려왔듯이.

거기에서 카뮈는 영감을 얻어 부조리 셋트를 시작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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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1 18: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딩님의 글을 읽고 영어사전을 검색해봤어요. romancist와 romanticist가 있던데, 각각 발음이 ‘로맨시스트’, ‘로맨티시스트’였어요. 오늘 로맨티스트가 콩글리쉬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

초딩 2016-09-02 00:31   좋아요 1 | URL
그리고 romanist 라는 단어는 로마 카톨릭 교회 사람들을 폄하하는 뜻이라네요. 비슷하게 생겨서 봤습니다 :-) 언제나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