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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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독서를 하는 이유는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다.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모험을 하기 위해서. 내가 독서를 하는 이유는많은 사람이 되어보기 위해서…’라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아마도더 많은 측면에서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더 과감하고, 더 다채롭고, 더 솔직하고, 더 교활하고, 더 깊고 더 다면적인 나 자신 말이다(그러고 보니 이건 거의 정신 함양이 아닌가?).     p.75~76

사실 나의 로망은 단 며칠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한 번쯤 가져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하루를 시작할 때부터, 늦은 새벽 잠이 들 때까지 거의 단 한 순간도 별 생각 없이,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이 없으니 말이다. 하루에도 열 몇 개씩 알람을 해두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을 채워 넣어 바쁘게 달려가는 것이 내 일상이다. 여행을 가서도 먹어야 하는 것, 보아야 하는 것, 해봐야 하는 것들을 하느라 일정 내내 좀처럼 쉴 틈이 없다. 소위 '멍 때린다'는 표현이나 '무위도식' 한다는 말을 한 번도 체감해보지 못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진짜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다양한 문학 장르를 넘나드는 글을 쓰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로버트 디세이가 진정한 휴식에 대해, 삶을 더 현명하게 즐기기 위한 게으름의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요시다 겐코의 <쓰레즈레구사>, 시트콤 '핍 쇼'와 다큐멘터리 '스시 장인: 지로의 꿈' 그리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경유하여진정한 휴식이라는 키워드를 편안하고 위트 있게 풀어내고 있어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무슈 귀스타브가 로비 보이 제로에게 했던 말, 무엇을 하든 아무 소용이 없다던 말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끝나거든.... 그러고 나면 사후 경직이 시작되지." 바쁜 남자가 할 법한 그런 말이다. 봄날의 말벌처럼 바빴던 무슈 귀스타브는 좀 더 빈둥거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가 미처 삶을 알기도 전에 삶이 날아가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당신은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서 행복해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 게으름을 피워야 하는 게 아니다.   p.142~143

정신 없이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휴식을 위한 시간이 너무도 필요하다.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의미인 워라벨(Work-life Balance)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실천하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다. 성공지향주의, 완벽함에 대한 갈망, 스마트폰 등의 대중화는 점점 일과 개인의 삶을 분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시간이 곧 돈인 세상에서 목적 없이 걷는 것은 낭비처럼 보이고, 늦잠 자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인맥에 상관없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불필요한 일 같고, 인터넷에 접속하는 대신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정보화 시대에서 나만 뒤처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올해 70대 중반을 맞이한 저자는, 빈 시간에 무언가 실용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여가를 즐긴다는 것은 사실 삶을 즐기는 것, 삶 속에서 뛰노는 것,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 깊이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점점 늘어나는 여가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했을 때 우리 삶에 깊이가 생기고 행복으로 가까워진다고 말이다. 여가란, 결코 물질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 순전히 그 즐거움을 위해서 자유로이 선택한 것,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단장하고, 취미 활동을 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을 두루 아우를 때 쓰는 단어라는데, 우리는 그 동안 그 뜻을 너무 모른 채 앞만 보면서 살아온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느긋하게 있을 때, 가장 치열하고 유쾌하게 인간다울 수 있다는 말이 궁금하다면, 워라밸의 시대, 황금 같은 휴식 시간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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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보는 그리스신화 - 오늘, 우리를 위한 그리스신화의 재해석
박홍순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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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이카로스의 실패한 시도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찾으려는 것일까? 중용을 벗어난 무모한 도전이 초래한 비극적 최후라는 교훈과 달리 왜 그의 도전에서 희망을 발견하려 할까? 다이달로스가 경고한 위험 요소인 태양의 열기와 바다의 습기는 자연의 보편적 질서에 해당한다. 인간 세상에 적용하면 사회의 질서가 된다. 신화는 도전하더라도 자연이나 사회의 보편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 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극단으로 향하거나 지나칠 경우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경고다. 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수준의 교훈임에도 왜 사람들은 이카로스를 기다릴까?    p.127~128

그리스신화는 3천 년도 더 된 유서 깊은 고전이다. 대표적인 신화의 줄거리나 인물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시절부터 그리스신화를 접해 왔다. 하지만 그리스신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줄거리를 암기하는 방식이나 비유로 사용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적, 철학적 맥락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각 신화가 갖는 의미를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섬세하게 적용해서 통찰하고, 반드시 현대적 재해석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 그리스신화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글이나 말을 통해 거듭 거론되는 것은 이것이 현대의 인간과 사회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이 책은 현대 서구 문명의 중요한 축인 그리스신화의 주요 골자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흥미롭게 풀어내고 있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소포클레스, 베르길리우스 등 고대 그리스의 저작을 중심으로 신화의 의미를 분석하고, 관련된 미술 작품을 통해 이해를 돕고 있다. 서양 미술사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화가의 작품들 중에 신화의 이해와 재해석 과정에 필요한 그림들을 엄선했다고 한다. 미술과 인문학으로 읽어내는 그리스신화라서 더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문화로부터 콤플렉스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콤플렉스로부터 문화가 만들어진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근친상간을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 욕망이 없다면 구태여 금지할 이유가 없다. 근친상간이 금지되고 있는 것은 금지라는 문화적·사회적 조치 이전에 이미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실제 행위에 뒤이어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명령과 법이 만들어진다. 금지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대한 억압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렇듯 문화라든가 존재 이전에 욕망이 있고, 이에 대한 억압이 생긴다. 욕망은 외부적인 조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부로부터 나온다. 그 핵심에 성적인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p.322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되자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장수를 누렸다. 그리고 그 벌로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신화에서 신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을 워낙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내용이어서 많은 화가들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해 작품으로 남겼다. 그런데 대부분의 화가가 신화 내용에 충실하게 바위를 굴려 올리는 방식을 그린데 비해, 타치아노는 독특하게 무거운 바위를 등에 지고 나르는 모습으로 신화의 이미지와 살짝 다르게 묘사했다. 저자는 타치아노의 관심이 시시포스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는지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어딘지 '고뇌'로 향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한다.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시시포스의 고통을 안쓰러워하기보다는 그를 보면서 깊이 있는 생각에 잠기기를 권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영원히 되풀이되는 '반복' 자체가 당장의 육체적 고통 이상의 형벌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시시포스의 형벌 이야기와 타치아노의 그림을 가지고 시시포스 처럼 쳇바퀴에 갇힌 현대인의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재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 책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왜 저주였던 것일까. 권력은 왜 질서를 선이라 강조할까. 이카로스의 이야기는 무모한 도전일까, 무한한 도전일까. 전쟁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선과 악을 딱 잘라 구분할 수 있는가. 욕망은 곧 타락의 화신인가. 오이디푸스의 비극에 담긴 터부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등등... 그리스 신화 속에서 인간과 세계, 문명과 국가, 이성과 감성, 여성과 남성 이라는 네 가지 테마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흥미로웠다. 미술과 인문학으로 새롭고 신선하게 해석하는 그리스신화, 지금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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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그 섬에서
다이애나 마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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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만, 그 사람들이 내게 뭘 바라나 싶어서요. 저한테 뭘 기대하는 거 같아요?"

"누구나 바라는 걸 바라겠죠. 자기들 이야기를 알아줄 사람을 바랄 거예요. , 그리고, 그 이야기라는 게 당신 이야기의 일부가 될지도 모르죠."

그는 내가 놓친 걸 콕 집어줬다. 내 이야기라니.     p.53

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신비한 아홉 개의 섬, 아조레스 제도. 한여름 투우와 축제가 끊임없이 열리고, 연보랏빛 수국 덤불과 푸른 초원,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섬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조레스 제도'라는 이름 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곳이 실제로 어떤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구글에 이미지 검색을 해봤더니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자연이 줄 수 있는 극강의 아름다움과 그 속의 사람들 모습 자체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가끔 모든 걸 털어버리고 떠나고 싶을 때, 바로 그런 순간 달려가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저자인 다이애나 마컴은 취재차 캘리포니아 외곽에 정착한 아조레스 이민자들을 만나면서 아조레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취재기자이자 퓰리처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녀의 자전적 에세이로 아조레스와 그곳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폭풍 같은 한 주를 보내며 온갖 일을 겪어 몸과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피곤할 때, 잠시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순간에 위로가 되어주고, 삶을 돌아보며 휴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방장은 나처럼 아조레스에 아무런 인연도 없는 사람이 이곳에 이렇게 매료되었다면, 거기에는 분명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목적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주변을 좀 보세요. 화산이며, 바다며, 꼭 잃어버린 시간 속에 들어온 것 같잖아요. 누군들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걸 꾹꾹 참으며, 입을 앙다물고 초 치는 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부름 받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좋아서였다.    p.144

이 책을 읽으면서 '열 번째 섬'이라는 개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조레스 이민자 중 한 사람인 알베르투는 이렇게 말했다. "열 번째 섬은 마음속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라오. 모든 게 떨어져 나간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죠." 라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든 떠난 적 없는 장소'라니 얼마나 든든한가. 나만의 비밀 공간, 내 영혼이 머무는 곳, 그리고 깊은 그리움이 되는 그런 곳 말이다. 저자에게 아조레스 역시 점점 그런 장소가 되어 갔을 것이다. 직업적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뜻하지 않게 아조레스에서 세 번의 여름을 보내면서, 자기 안의 상실과 갈망을 마주하고 스스로 바라던 많은 것들을 찾아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긍정적인 섬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 역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과거를 기억하고 슬픔을 간직하되 오늘을 잃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앨리스의 거울, 나니아의 옷장, 해리포터의 9 4분의 3번 승강장, 또는 무엇이 됐든 소설 속 주인공을 원래의 현실 세계로 돌려보내주는 통로를 통해 '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여지없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곳에서 경험했던 모든 순간들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본 기억이 우리의 발목을 움켜잡고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의 냄새를 맡고 바람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대항해시대의 첫 번째 행선지이자 화산 폭발의 자연재해를 입은 곳이기도 하며, 독재와 냉전시대를 겪어낸 역사가 숨 쉬고 있는 섬. 나도 언젠가 꼭 한번 그곳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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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의 죄 - 범죄적 예술과 살인의 동기들
리처드 바인 지음, 박지선 옮김 / 서울셀렉션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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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작고 행복한 공동체였다.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그랬다. 젊은 남녀가 어울려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일하고 20블록 떨어진 가장 가까운 식료품점까지 떼 지어 갔다가 누군가의 로프트에서 맥주를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파티를 벌였다. 그 뒤 머드 클럽이나 터널로 가서 밤늦게까지 유흥을 즐겼다.   p.53

뉴욕의 소호, 몇 블록에 걸쳐 프라다 플래그십 스토어를 비롯한 명품 브랜드의 매장이 밀집해 있어 흔히 뉴욕 패션의 메카라 부르는 곳이다. 하지만 본래 소호는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예술의 거리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대공황 이후 도산과 폐업으로 황폐해진 소호 거리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아틀리에를 만들기 시작했고, 감각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갤러리와 개성 넘치는 숍이 속속 생겨나 예술의 거리로 거듭났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소호가 세계 예술계의 중심이었던 시절에 벌어진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호의 이름난 미술품 컬렉터 어맨다 올리버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그녀의 남편 필립 올리버는 거실 의자에서 피범벅이 돼 죽어 있는 아내를 발견하자마자 가까운 경찰서로 가서 얼빠진 상태로 자수한다. "제가 아내를 죽였어요." 끔찍한 살인 사건의 최초 발견자가 배우자일 경우, 자연스레 용의자가 되는 것이 수순이다. 그런데 남편이 자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좀처럼 범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울프심 증후군이라는 치매성 뇌질환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립의 개인 변호사는 사립 탐정 호건을 고용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부부의 지인이자 탐정의 친구인 미술품 딜러 잭이 함께 용의자들을 추적해나간다. 

 

"퍽이나 감동적이군요. 하지만 너무 뻔해요." 호건은 지루하고 짜증 난 표정이었다. "난 주로 아내가 버스에 치이는 상상을 하죠."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를 떠도는 듯했다. "다들 배우자의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덫에서 멋있고 깔끔하게 빠져나오는 상상을 하는 거죠. 그런데 결혼에는 교묘한 데가 있어요. 한번 빠져들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p.107

이 작품의 작가는 세계적 미술 매거진 《아트 인 아메리카》 편집장으로 일평생 예술계에 몸담아 온 리처드 바인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데뷔작에서 일평생 예술계를 누비며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고스란히 그리고 있다. 소호의 전성기를 구가한 예술가들과 그 주변인들의 삶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용의자를 추적하는 것이 주요 플롯이지만 일반적인 범죄 소설의 분위기와는 꽤 다르다. '광기와 공허함에 사로잡힌 예술'이라는 것은 직접 그것을 경험하거나 주변에서 체험해보지 않는 한 머릿속 상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리처드 바인은 실제 그 바닥에 수십 년을 있었던 경험으로 매우 색다른 범죄 소설을 탄생시켰다. 뉴욕 미술계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본격 예술 스릴러'라는 칭호가 다소 이상하면서도 그럴듯 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누가, 왜 그녀를 죽였는가? 용의자는 여기저기 널려 있다. 남편의 젊은 내연녀와 이혼 당한 전 부인, 그리고 의문의 남자와 자백한 남편까지... 잭슨 폴록과 앤디 워홀의 작품만큼 세련되고 화려해 보이는 예술가 집단의 어둡고 은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소호의 갤러리와 미술관, 뉴욕의 힙한 레스토랑과 바, 아트페어와 페스티벌, 페티시로 점철된 퍼포먼스 등 뉴욕의 내로라하는 명소와 현장을 누비는 묘사도 인상적이었고, 고급 문화로 인식되어온 현대 미술의 저급하면서도 경박한 단면을 통렬하게 꼬집고, 그 추악한 이면을 보여주는 것도 이 작품 만이 주는 매력일 것이다. 물론 펄프픽션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단정한 느낌이고, 후반부의 충격적인 결말에 이르기까지 다소의 지루함을 견뎌야 하긴 하지만,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뉴욕 미술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색다른 범죄 소설이 궁금하다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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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조사관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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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에 환상을 갖지 마요. 인권이라는 게 사실 나쁜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왔거든요? 완전 쓰레기 같은 놈들, 사회악들이 살맛 나는 인권세상을 만들어온 거 몰라요?"

간이벽으로 구역을 나눈 옆 회의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남자치고는 가느다란 고음에 잔뜩 뻐기는 목소리였다. 호응해주는 몇몇 청중과 함께 있는 모양인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한바탕 들렸다.   p.77

국내 자동차업계 연매출 1위 기업인 오성자동차노조 간부가 여자 조합원을 성희롱했다는 보도가 인터넷에 쫙 깔린다. 오성자동차노조는 파업을 예고한 채, 사측과 단체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적인 파문만큼 도덕성에 직격탄을 날리는 이슈는 없을 것이다. 선정적이고, 눈길을 끌고, 싸잡아 비난하기 좋으니 말이다. 그리고 성희롱 사건은 인권위가 하는 수많은 업무 중 하나에 속했다. 그렇다면 인권증진위원회, 줄여서 인권위란 무엇인가.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에 대한 진정을 접수하고 조사하여 구제조치를 권고하는 독립적인 국가기관이다. 그 자체가 국가기관이면서 다른 국가기관을 감시하고 조사하는 독립기관으로 유엔 같은 국제인권기구와 개별 국가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조직이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인권증진위원회 조사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경찰도, 탐정도 아닌, 다소 생소한 직업이지만, 인권침해와 차별행위를 다루는 준사법기관의 공무원들이라 공권력을 동원할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주요 멤버는 이렇다. 매사에 너무 신중한 나머지 누가 봐도 뻔한 사건의 사실관계를 계속 곱씹는 우유부단함에 강단도 배짱도 없는 소심쟁이지만, 경찰사건 조사관으로 일한 지 겨우 1년 남짓 만에 '베테랑' 이라고 평가 받을 정도로 뛰어난 조사관 윤서, 남의 일도 내 일처럼 여기며 감정 이입하는 열혈 아줌마 조사관 달숙,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독단과 정의 사이를 오가는 다혈질 성격의 홍태, 사법고시 출신으로 변호사 특채 사무관으로 인권위에 입사했지만 조사관들 사이에선 영 푸대접을 받고 있는 지훈. 이 작품은 이렇게 성격도, 사고방식도, 조사 스타일도 너무 다른 이들 네 명의 성실하고 공정한 다섯 건의 사건 기록을 담고 있다.

 

사실 인권 조사관이라는 역할이 윤서는 늘 두려웠다. 빨리 다른 일을 찾고 싶었다. 이 일은 지금 옆에 있는 배홍태 같은 사람이 더 잘 맞았다. 국가가 너무나 많은 권력을 가지고 남용해왔던 시절부터 쌓인 힘과 관행 때문에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거라면,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반대쪽으로 기울어진 힘의 의지가 필요한 것 아닐까. 이왕이면 약자의 편, 국민의 편을 들어주는 독단과 배짱이 인권위에 필요한 균형 감각이 아닐까. 중립을 표방하는 소심한 논리는 기울어진 미끄럼틀의 가운데에 안전하게 머물겠다는 비겁한 태도가 아닐까.    p.179~180

검은숲 독서클럽 3주차 도서로 만나게 된 작품은 곧 드라마로 방송될 예정인 송시우 작가의 <달리는 조사관> 이다. 이 작품은 추리 소설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경찰도 탐정도 아니고, 변호사나 법 관련 종사자도 아닌, 다소 생소한 직업인인권증진위원회 조사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런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거나, 알고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지는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일테니 말이다. 송시우 작가의 첫 작품 <라일락 붉게 피는 집>을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번 작품도 기대가 되었다. 이 작품은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황금가지, 2012)에서 선보인 바 있는 단편소설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를 개작, 이야기를 확장한 소설집인데, 왜 드라마로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과 현실성 있는 이야기들로 시리즈로서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드라마 속에선 냉정하리만큼 중립을 유지하는 캐릭터 한윤서 역을 이요원 배우가 한다고 하는데, 이미지만으로도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 궁금해진다. 그녀와 정반대 성격으로 등장하는 다혈질 배홍태 역의 최귀화 배우도 캐릭터의 매력을 잘 살려주실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전반적으로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가 침해되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대목은 이들 인권위의 조사관들은 유죄냐 무죄냐를 판단하거나, 범인을 단죄하지 않고, 그저 그 과정에서 절차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었는지 만을 살펴본 뒤 보고서를 작성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다.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숨겨진 진실을 밝혀 낼 수도 있고, 국가권력에 대한 분노와 피해자에 대한 연민이 앞서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오는 딜레마와 인물들이 빚어내는 갈등이 이 작품의 재미를 더해주고, 바로 그러한 부분들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정의의 실현 방식과 그 본질에 대해서 독자들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서 다음 주부터 OCN에서 방송될 드라마도 챙겨 볼까 한다. 드라마는 16부작이니 소설에서 만났던 이야기 외에 다른 스토리는 어떨지, 인물들은 어떤 모습으로 화면을 채워줄 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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