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가지 레시피 - 집 떠나는 아이에게 전하는 가족의 식탁
칼 피터넬 지음, 구계원 옮김 / 이봄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아빠, 저예요. 바쁘신 거 아는데 죄송해요. 지금 볼로네제를 만들려고 하는데 간단하게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끊지 말고요."

"물론이지." 당연히 끊을 생각은 없었다.

"다행이다. 볼로네제 만들 때 제일 좋은 고기는 뭐예요?"

"글쎄, 집에 뭐가 있는데?"

"지금 사러 가려고요."     p.159

언젠가 소설가 공지영이 매우 간단한 요리법을 상황에 맞춰 딸에게 소개하면서, 엄마로서 자식에 대한 애정과 조언을 담고 있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물론 레시피 책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간단한 요리법들 투성이었지만, 재미있는 건 그 책을 읽다 보면 요리에 관심이 없었던 이들이라도 "맛있겠다, 나도 한번 만들어볼까'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수많은 실패와 시련들을 겪어 나가야 할 자식에게 자신만의 요리법을 전해주는 엄마라니, 너무도 뭉클하고,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책은 셰프인 아버지가 집을 떠난 아들에게 레시피를 알려주는 책이다. 더 전문적이고, 구체적이지만 군더더기 없이 우아하고,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유머러스하며, 감동적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소재의 레스토랑셰 파니스의 셰프 칼 피터넬은 본격적인 저녁 영업이 막 시작하려는 바쁜 와중에 뉴욕에 아들의 전화를 받는다. 볼로네제 만들 때 고기는 뭐가 좋아요? 로스트 치킨은 어떻게 만들었죠? 등등.. 큰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집을 떠난 뒤, 그렇게 레시피를 묻는 전화를 받게 된 아빠는 아들에게 재미있고 쉽게 요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 주게 된다. 셰프들이 정작 집에서는 요리를 거의 안 한다는 일종의 불문율과 달리 그는 집에서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자주 해주었던 아빠였지만, 정작 아이들에게 요리하는 방법을 알려준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주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레시피들을 적어 보낸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다. 간편하고 맛있는 요리를 제대로 완성하고, 요리에 실패했을 때 최대한 수습하고, 요리 실력을 한 단계 높이고자 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설명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러니 요리 초보자를 위한 가이드북인 셈이지만, 사실 요리를 매일 같이 하는 숙련자들에게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정보와 팁들이 가득하다.

세상에는 진심으로 아끼는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그 음식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음식들이 있다. 심지어 그게 내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황금색 폴렌타 덩어리가 손도 대지 않은 채 접시에 남아 있는 광경은 너무나 분명한 물증인데도 나는 우리 아이들이 폴렌타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단지 아이들이 아직 잘 몰라서 그럴 뿐, 끈기를 가지고 계속 시도하다보면 언젠가는 폴렌타를 맛있게 먹게 되리라.   p.219

제목은 '열두 가지 레시피'이지만 사실 열두 가지 방법의 요리 레시피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토스트, 달걀, , 샐러드, 파스타, 채소, , 그릴 구이 등의 보편적인 식재료와 요리 방법이 크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 열두 가지이고, 그 속의 내용들을 토대로 무한대로 변주해서 요리를 만들 수 있다. 가장 기초적이고, 너무도 간단한 레시피들이지만 이것만 충분히 습득하면 다른 복잡한 요리들도 무난하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주요 레시피 뿐만 아니라 기본 요리를 변형한 레시피들이 여럿 소개되어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사랑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레시피를 담고 있는 요리책임에도 불구하고, 대화체 형식의 에세이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요리책에서 순서대로 방법과 사진이 구성되어 있는 레시피들보다도 훨씬 더 쉽게 와 닿아 직접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셰프 만의 비밀스러운 팁들도 가득하다. 사실 건조한 상태로 판매되는 허브들은 누구라도 손쉽게 사용해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마른 허브는 죽은 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신선한 허브를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쓰지 않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애호박은 늘 찌거나 볶아서 먹었는데, 레몬과 올리브유만 있다면 생 애호박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집에서 채소 튀김을 할 때는 항상 요구르트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 오늘 저녁에 당장 시도해보고 싶은 튀김 요리 방법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엄마에게 전수해주고, 또 엄마가 딸에게 전해주는 레시피에는 그 가족만의 특별한 삶의 풍경이 담겨 있다. 아이들은 어느 순간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게 마련이고, 그게 결혼이든 학업 때문이든 간에 난생 처음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되면 가장 먼저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어려움 중의 하나가 바로 요리일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직접 해볼 수 있는 레시피 뿐만이 아닌 것이다. 처음으로 혼자 제 발로 세상에 서게 되는 방법,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어른이 되는 방법,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는 관계라는 의미와 가족이라는 것의 소중함 등등이 모두 담겨 있는 책이니 말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 한 끼, 샐러드 200 - 몸이 가벼워지는 습관
에다준 지음, 김유미 옮김 / 로지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샐러드가 필요한 계절이 돌아왔다. 채소랑 별로 친하지 않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맛있는 샐러드라면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샐러드의 종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 드레싱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렇다고 매번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샐러드를 사먹기엔 비용이 아까운 것도 사실이다. 사실 샐러드에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요리 과정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가격은 꽤 비싼 편이니 말이다.

이 책은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샐러드를 아주 간단한 레시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 매일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가볍지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샐러드 레시피북이다.

이 책에 소개된 샐러드는 무려 160가지이다. 거기다 드레싱 30가지, 토핑 10가지의 레시피라, 이렇게나 샐러드 종류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손님 초대 요리로도 제격인 양식 샐러드, 부드럽고 담백한 맛의 일식 샐러드, 화끈하고 매콤달콤한 한식과 중식 샐러드, 감칠맛과 스파이스의 풍미를 즐길 수 있는 에스닉 샐러드, 달콤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과일, 채소 샐러드로 크게 다섯 가지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다.

채소는 생으로 먹으면 재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고, 굽고, 볶고, 찌고, 절이는 등 조리법을 바꾸면 맛과 식감이 각양각색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걸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레시피들이다.

그리고 샐러드를 맛있게 만드는 노하우들과 건강한 맛을 지키는 채소 보관법도 소개되어 있다. 채소는 무엇보다 신선도가 생명이라 아무리 맛있는 드레싱과 재료를 넣어도, 정작 채소가 신선하지 않으면 맛있게 먹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사용하고 남은 자투리 채소를 알뜰하게 보관하는 팁도 있는데, 모든 요리가 그렇겠지만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다 보면 항상 재료가 조금씩 남게 마련이다. 지퍼백에 담아 냉동 보관한 채소는 국물 요리나 볶음 요리 등에 사용이 가능하니 활용도가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재료에 따라 냉동 보관이 불가능한 것들도 소개되어 있어 유용한 팁이 되었다.

드레싱을 만들거나 구입하더라도 최대 다섯 가지 종류가 넘었던 적이 없는데, 이 책에 소개된 드레싱 종류는 무려 30가지이다. 당근 드레싱, 대파 무 드레싱, 매실 누룩 드레싱, 청귤 흑식초 드레싱, 두유 아보카도 드레싱, 명란크림 드레싱 등 정말 처음 보는 드레싱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 당장 만들어 보고 싶어지는 것도 많았다.

게다가 칼로리가 낮은 다이어트 용 샐러드뿐만 아니라 한끼 식사로도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샐러드 레시피와 특별한 날에 내놓아도 손색없어 요리처럼 멋진 샐러드까지 소개되어 있어 상황에 맞춰, 취향대로 골라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과 함께라면 몸은 건강해지고, 속은 든든해지는, 맛있게 먹으면서도 가벼워질 수 있는 식단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루에 한 끼 정도는 평범한 식단 대신 샐러드를 먹어보면 어떨까. 일상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다이어트 방법이자, 영양가 가득한 식습관이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몰빅 - 작은 성공을 반복하라
제프 헤이든 지음, 정지현 옮김 / 리더스북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간절히 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 해도 '' 보다는 '어떻게'의 힘이 훨씬 더 중요하다. '어떻게'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많이 할 것이다. 우선은 이 사실을 알아두자. 하루 일과를 제대로 실행하고 작은 발전이라도 있으면 동기부여는 물론, 자신감도 커지고 행복도 커진다. 그러면 계속하기도 쉬워진다. 그 과정이 되풀이되면 실력과 자신감, 동기부여도 나날이 커진다. 그것은 스스로 얻어낸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목표는 존재의 일부가 된다. 불꽃 위를 걸으며 동기부여를 되새긴다고? 그런 것은 이제 집어치우자.   p.42~43

누구나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직장을 바꾸고 사업을 시작하고 악기를 배우고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지속적이고 의미 있는 성공은 결코 쉽지 않다. 사업을 하고 싶은가? 정말로 사업을 성공시키려면 자유 시간 따위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직장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가? 워라밸 어쩌고 하는 소리에 현혹되지 마라. 엄청난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니까. 마라톤을 완주하고 싶은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준다는 60일 단기 훈련 따위는 잊어라.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름길은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을 재미있게 만들 방법은 많다. 이 책은 행복과 성공으로 가는 길이 같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공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행복하다. 이 책을 읽는다면 그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하니, 기대가 되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사실 그만큼 시작이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목표에 다가가게 해주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면 점점 과정은 쉬워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동기가 부여된다. 동기부여는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과라는 말이다. 그러니 동기를 부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땀을 흘리는 것이다. 신체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땀을 흘려야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제프 헤이든은 일반적은 통념과 달리 목표 달성에는 영적인 각성도, 어느 날 갑자기 번개처럼 떨어지는 영감도 필요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오직 명료하고 반복적인 루틴이 성공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루틴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목표 달성에 필요한 일을 반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루 일과처럼 그 일을 일상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목표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는 잊고 일주일 동안 그저 루틴만 성실하게 따라가 보자. 그 일주일이 끝날 무렵에는 작지만 진전이 있을 테니 말이다.

 

 

의지가 필요하지 않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한 번에 이루려는 목표의 개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뜻이다. 동시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목표를 이루면 된다. 이 목표를 이룬 뒤에 저 목표를 이룬다. 한두 가지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고 해서 다른 목표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두 가지 목표에 집중한다는 것은 그 목표를 실제로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나중에 다른 목표들도 이룰 수 있다.

의심스럽다면 "루틴을 방해하는 일인가?"라고 질문해본다. 그런 일이라면 하지 않는다. 루틴이 가장 중요하다. 하루 일과가 가장 중요하다. 그 무엇도 이를 막아서는 안 된다.    p.166~167

'동기부여'와 목표달성'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는 점에 있어서 이 책은 매우 놀라운 자기계발서이다. 뻔한 이야기들만 늘어 놓아 지루한 여타의 자기계발서와 뚜렷이 구분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과정이 제일 중요하다. 그저 '오늘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성공적인 과정을 만드는 단계를 살펴보자.

 

1.목표를 정한다.

2.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하루 일과를 선택한다.

3.필요하다면 매우, 매우, 구체적인 루틴을 설정한다.

4.일정표를 다듬는다.

5.하루 계획을 세워라.

6.실행에 옮긴다, 비교하지 않고.

7.루틴의 문제점을 개선한다.

8.성과에 따라 변화를 준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아주 부담 없이 30일 도안 5키로를 감량할 수도 있고, 웹사이트에 올리는 글의 한 달 조회 수를 100만이 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책을 한 권 써낼 수도 있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도 있다. 목표는 '비현실적'으로 세우되,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 목표는 현실적인 목표가 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스몰빅 프로젝트'는 늘 끝까지 핸지 못하는 의지가 약한 이들과 나만의 목표 달성이 절실한 이들을 위한 최고의 습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실패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에게 가볍게 시작해 작은 성공을 쌓아가며,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법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지금 당장 작고, 가볍고, 사소하게 시작해 보자. 작은 성공이 당신의 인생을 바꿀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래도 즉효성을 요구하는 요즘 사회에서 그렇게 여유로운 자세로 살다 보면 가끔 스스로가 바보 같아지곤 한다. 목청 높여 누군가를 통렬히 매도하는 편이 훨씬 똑똑해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보다 비평가 쪽이 똑똑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설령 어떤 창작자가 가끔 어리석어 보인다 해도(또 실제로 어리석다 해도), 제로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품이 들고 고된지 나는 너무나 잘 알기에 그걸 두고 한마디로 '저 녀석은 쓰레기다. 이건 똥이다'라고 매도해버릴 수는 없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창작자로서 지켜갈 삶의 자세의 문제이자, 나아가 존엄의 문제이기도 하다.   p.80~81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의 에세이 시리즈 그 마지막 권이다. 1998, 2007년에 각기 다른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고, 이번에도 역시나 다른 제목으로 새로운 옷을 입고 출간되었다. 기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던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으로 출간되었던 다섯 권을 잇는 시리즈로 나와 표지도 더 세련된 느낌이다.

보통 단편집이나 에세이의 경우 소제목을 전체 제목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의 경우 매번 출간될 때마다 그 제목이 달랐다는 점도 흥미롭다. 처음에 출간되었을 때는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흘러간다'였고, 두 번째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비밀의 숲'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다. 하루키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작년 여름 세상을 떠난 우리 집 장수 고양이 뮤즈의 영혼에 바치고 싶다'고 했고, 책 속에서 뮤즈에 관련된 에피소드도 여럿 등장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 뮤즈가 하루키의 집에 왔을 때가 생후 육 개월이었는데, 무려 스물한 살까지 살았던 고양이였다. 인간으로 따지면 백 살을 넘긴 셈이니, 정말 오래 살았던 '장수 고양이' 였다.

하지만 출산하는 고양이와 한밤중에 몇 시간씩 마주하고 있던 그때, 나와 그애 사이에는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서 어떤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고, 그것을 우리가 공유한다는 명확한 인식이 있었다. 언어가 필요하지 않은, 고양이니 인간이니 하는 구분을 넘어선 마음의 교류였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하면 사뭇 기묘한 체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의 멋진 고양이가 대개 그렇듯이- 뮤즈도 마지막까지 평소에는 우리에게 곁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p.140

이 책에는 뮤즈와의 에피소드들 뿐만 아니라 공중 부유 꿈에 대한 여러 가지 타입을 이야기하고, 한낮의 회전초밥 가게에 숨어 있는 함정, 이상한 러브호텔 이름에 대한 탐구, 컴플레인 편지 쓰는 방법, 학교의 체벌 문제, 문학전집에 실리는 것을 거절한 이유, 취미로 하는 번역의 의미 등등.. 엉뚱하고, 유쾌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하루키가 이 글들을 쓸 즈음은 <노르웨이의 숲< <태엽 감는 새>로 대중적인 성공과 문학적 성취를 함께 거두고, 옴진리교 지하철 테러사건 피해자를 취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한창 작업중이던, 소설가로서 터닝 포인트에 속하는 시기였다. 밀리언셀러를 내는 인기 작가이면서 문단의 주류에서는 벗어나 있는 자신의 고충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는 이야기도 있어 흥미로웠고, 특유의 관조적인 화법과 위트 섞인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일상생활 속의 소소한 발견들도 너무 재미있었다.

하루키가 여행을 갈 때마다 선택하는 책과 그 작품이 왜 여행에 최적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 또한 흥미로웠다. 나 역시 여행 계획을 세울 때면 제일 먼저 하는 고민이 어떤 책을 가져갈까인데, 이렇게 하루키 처럼 조목조목 명확한 이유를 따져 가면서 고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거라면 언제 어떤 여행이든 오케이'라고 생각하는 만능 책이 한 권 있다면 인생이 편해질 확률이 높다는 하루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능하면 사생활에서 익명성을 보장받고 싶지만 간혹 길에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겪는 고충들도 재미있었고, 자신에게 딱히 이상형이라고 할만한 건 없지만, 그래도 긴 인생에서 번개를 맞은 듯 극적인 만남이 두 번이나 있었다는 고백 아닌 고백도 너무 귀여웠다. 정말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풍경들, 이렇게 사소해도 되나 싶을 만큼의 평범한 생각들이 주는 여유로움이 하루키 에세이만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게, 아무 페이지나 쓱 펼쳐서 아무렇게나 읽어도 곧 킬킬대고 웃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순수의 시대! 수천만 명의 사망, 폐허가 된 유럽, 강제수용소는 여전히 뉴스에 오르는 화제일 뿐, 아직 인간 타락의 보편적 상징이 되기 전이었다. 순수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진이다. 동결된 내러티브라는 아이러니 탓에 사진 속 주체들은 모두 앞으로 변하거나 죽으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순진무구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미래다. 오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신이 모든 것을 알듯이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누구와 결혼할지, 언제 죽을지- 알고서, 언젠가는 누군가 우리 사진을 들고 있으리란 생각은 못한 채 그들을 바라본다.   p.51

준과 버나드는 어느 작은 마을의 기차역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기차는 늦어졌고, 역에는 앉을 데라고는 전혀 없었다. 버나드는 철로 뒤쪽으로 철쭉이 수풀을 이루고 있는 것을 지켜보다가 특별히 크고 아름다운 고추잠자리를 발견한다. 그는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여행용 키트를 찾아 살충병을 꺼낸 다음 잠자리를 병에 넣으려고 한다. 굉장히 아름다운 놈이라 집에 가져가고 싶다는 버나드에게, 준은 이상한 표정으로 묻는다. '이걸 죽이겠다는 말이네... 아름다워서 죽이고 싶다?' 날도 무척 더웠고 곤충의 권리에 대한 윤리적 토론을 할 생각이 없었던 버나드에게, 준은 별안간 화를 내며 펄펄 뛴다. 이 불쌍한 곤충에 대한 태도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상을 대하는 당신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버나드가 냉정하고 이론적이고 오만하다고 말이다. 버나드는 생각한다. '내가 결혼한 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날 미워하는구나. 이런 끔찍한 실수가 있나!' 그리고는 곤충학자로서 자신의 취미를 방어하기 시작한다.

그 날의 논쟁은 적당히 마무리되었지만, 갈수록 두 사람은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준은 어떤 형태로든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버나드는 철저한 합리주의자였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로 함께 출발했지만,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곤충학자였던 버나드는 평생 과학의 제한적인 확실성과 당당함을 굳게 믿었다. 준은 신혼여행에서 검은 개 두 마리를 만나 죽을 뻔했던 그 날 이후로, 신의 존재에 대해 깨닫게 된다. 바로 두 마리 개의 형태로 나타난 악과의 조우를 통해서.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다. 서로의 말을 한 번도 귀담아들은 적이 없었고, 서로를 같은 이유로 비난했으며, 결국 서로 말도 거의 섞지 않는 관계가 되어 각자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되었지만 말이다.

버나드는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하게 된다. 두 사람이 물병의 물을 마시는 동안 버나드에게는 최근 끝난 전쟁이 역사적, 지정학적 사실이 아니라 다수의 문제로, 무한에 가까운 개인들의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먼지처럼, 홀씨처럼 온 대륙을 뒤덮은 사람들 사이에 미세하게 나눠지는, 그러나 작아지지는 않는 가없는 비통이었다. 개체로서 그들은 영영 무명의 존재로 남을 것이며, 전체로서 그들이 상징하는 슬픔은 누구 하나 이해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남편과 형제 둘을 잃고 검은 옷을 입은 여인처럼 수십만, 수백만 명이 침묵 속에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p.234

이야기는 존과 버나드의 사위인 제러미에 의해 진행되며, 각자의 서로 다른 기억과 생각들이 보여지고 있다. 여덟 살 때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난 이래, 언제나 타인의 부모에게 관심이 많았던 제러미는 장인과 장모에게 강렬하게 매료되어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다. 합리주의자와 신비주의자, 인민위원과 요기, 활동가와 기권자, 과학자와 직관론자인 한 쌍의 양극단인 존과 버나드. 이들은 어째서 평생 반목하면서도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채 기이한 결혼생활을 계속하게 된 걸까. 제러미는 준이 입원한 교외 요양원에서, 장벽 붕괴 소식에 흥분한 버나드와 동행한 베를린에서 그들 각자에게 이야기를 듣는다. 하나의 경험을 다르게 기억하거나 정반대로 해석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삶이란 매 순간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누구에게나 삶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때로는 우리가 믿고 살아왔던 것들의 기준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 작품 속에서 준의 앞에 나타난 검은 개 두 마리 역시 그러한 순간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이렇게 단 한 가지 사건을 통해, 평범하고 납득할 만한 일에서 놓칠 수도 있었던 것을 표현할 수단을 찾게 된다. 그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억하는 사유의 순간들도 매혹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너무도 정확하고 아름다운 단어와 문장들, 그리고 평범한 순간들 조차 매우 치밀하게 잘 짜인 드라마로 만들어내는 이언 매큐언의 마법이 멋진 작품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 중심에, 그 내면의 존재에 가 닿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언 매큐언을 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