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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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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웨이드 부인." 마침내 내가 말했다. "내 의견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런 일은 날마다 일어나니까. 정말 터무니없는 사람이 정말 터무니없는 범죄를 저지르죠. 인정 많은 할머니가 온 가족을 독살하기도 해요. 단정한 젊은이가 몇 번이나 강도질을 벌이면서 총질까지 해요. 20년 넘게 완벽한 근무 기록을 자랑했던 은행 지점장이 알고 보니 오랫동안 공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죠. 그리고 성공해서 인기도 많고 마냥 행복해 보이는 소설가가 술에 취한 채 아내를 때려 입원시키는 일도 있어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짐작하기 힘들어요."     p.156

 

이 작품은 15년 전에 6권짜리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으로 출간되었을 때 읽었고, 이번에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로 다시 출간이 되어 정말 오랜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1939년 <빅 슬립>을 시작으로 <안녕 내 사랑>, <하이 윈도>, <호수의 여인> <리틀 시스터> 그리고 1954년 <기나긴 이별>로 이어진다. 그 뒤로 1958년에 출간된 <Play back>과 같은 해에 집필하기 시작했지만 그가 1959년에 생을 마감하면서 미완성작이 된 <Poodle Springs>가 있다. <플레이백>은 영화 시나리오로 썼다가 영화화되지 못하고 나중에 소설로 고쳐 쓴 것이라 분량도 짧고, 문체도 단순하며, 말로도 좀 가볍게 행동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어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반응이 좋지 못했고, <푸들 스프링스>는 단 네 챕터만 쓰고 이후에 다른 작가가 완성 시켜 한참 뒤에 출간되었다.

 

사실상 <기나긴 이별>이 필립 말로 시리즈의 마지막인 셈인데, 그래서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인 이 작품이 전작들에 비해 페이지 수도 두툼한 편이고, 필립 말로의 개인적인 내면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챈들러가 이 작품으로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와의 이별을 보여주려고 작정하고 쓴 것처럼. 사건의 플롯들을 전체적으로 짚어 보자면, 필립 말로가 친구와, 여자와, 의뢰인들과 '기나긴 이별'을 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필립 말로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빅 슬립>에 등장할 때 33세의 나이였다. 지방검사 수사관으로 일하다 명령불복종으로 해고 당했고, 사무실을 운영하며 제대로 사설탐정으로서 일하게 되는 것이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하이 윈도>였다. 다섯 번째 작품인 <리틀 시스터>에서는 38세, 그리고 여섯 번째 작품인 <기나긴 이별>에서는 42세로 나온다. 냉소적이고 혈기 넘치던 청년에서 이제는 40대 중년 탐정의 원숙한 모습이 된 것이다. 물론 냉소적이고, 고집 세고, 강자에겐 강하고, 할 말 다하는 시니컬한 모습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만약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가 궁금하다면, 그런데 시리즈가 6권이나 되어 고르기가 어렵다면, 바로 이 작품을 읽으면 된다. <기나긴 이별> 한 권만 읽더라도 전설적인 탐정 필립 말로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사설탐정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딱히 평범한 날은 아니었지만 아주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사람이 이런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부자가 될 수도 없는 데다 재미도 별로 없다. 때로는 두들겨 맞거나 총질을 당하거나 유치장에 처박히기 일쑤다. 드문 일이지만 죽기도 한다. 두 달에 한 번씩은 이 일을 그만두고 그럴싸한 직업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가 제멋대로 흔들거리기 전에. 그런데 그때마다 초인종이 울리고, 내실 문을 열고 대기실로 나가면 새로운 얼굴이 새로운 골칫거리와 새로운 슬픔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나서 약간의 돈을 내민다.    p.238~239

 

필립 말로는 고급 클럽 <댄서스> 앞에서 테리 레녹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상태라 함께 온 여자에게도, 클럽의 주차원에게도 무시 당하고 있던 참이었다. 말로는 그를 자신의 집에 데려다 재워줬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가끔 만나며 우정 비슷한 것을 나누는 관계가 된다. 레녹스는 억만장자의 딸과 결혼했다 이혼한 상태였는데, 곧 재결합했다는 소식을 들려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레녹스는 장전된 권총을 들고 와 간밤에 아내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말하며 말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말로는 그를 멕시코의 국경 도시까지 차로 데려다 주고, 집에서 그를 기다리던 경찰과 맞닥뜨린다. 하지만 경찰의 무례한 태도와 엄포에 말로는 그들에게 아무런 진술도 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결국 구치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된다. 친구를 밀고한 탐정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이유로, 레녹스를 배신하지 않은 대가로 갖은 고역을 당하지만, 사건이 갑자기 종결되어 버려 석방이 된다. 레녹스가 자술서를 써놓고 권총으로 자살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은 어쩐지 찜찜한 구석이 있었고, 변호사, 조폭 등 관련자들이 말로에게 사건에서 손을 떼는 것이 좋다는 경고를 하는데, 말로의 고독한 싸움은 계속된다.

 

대실 해밋, 로스 맥도널드와 더불어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레이먼드 챈들러는 8편의 장편소설과 21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 로스 맥도널드의 <움직이는 표적>, 그리고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이 하드보일드 3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이다. 챈들러의 작품들은 불필요한 수식을 배제한 간결한 문체, 냉혹하고 비정한 현실 묘사, 생생한 거리의 언어로 이루어진 거친 대사들과 시니컬한 유머 등을 특징으로 한다. '말로도 늙어 가고, 독자들도 나이를 먹어 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지나치게 많은 (수상쩍은) 돈을 변함없이 거절하고, 부자들의 허영과 기만을 부러워하지 않고, 어차피 더 강하고 높은 자들에게 굽실거릴 것이 분명한 권력자들의 허세 앞에서 기죽지 않고, 누군가와 가정을 꾸려서 뒤늦게라도 <남들처럼> 살아 보겠다는 희망을 품지 않고, 혼자서, 천천히, 비열한 밤길을 걸어간다.(작품 해설)' 는 표현이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게 아닐까 싶다. 독자들이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언젠가는 챈들러의 미완성작인 <Poodle Springs>도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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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이 떠난 거리 - 코로나 시대의 뉴욕 풍경
빌 헤이스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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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 팬데믹 시대의 한복판에 있는데 지난 행적을 되짚어보며 내가 그때 이 팬데믹 시절의 어느 시점, 어느 곳에 있었나, 전염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던가 아니었던가, 하는 식으로 생각해보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짧은 기간 동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빨리 변했다. 2020년 달력을 들여다본다... 나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랬듯이 1월과 2월 내내 완벽하게 정상적으로 살고 있었다. 헬스클럽에 가고, 1.5킬로미터씩 수영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나는 얼마나 한 치 앞도 못 보고 있었던 건가. 불과 며칠 안에 삶 전체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우리 모두 얼마나 모르고 있었던 건가.  p.37~38

 

올리버 색스의 연인으로 알려진 뉴욕의 작가이자 사진가인 빌 헤이스는 팬데믹의 정점을 지나는 도시 뉴욕의 풍경들을 글과 사진으로 포착해냈다. 미국 전체 확진자 수의 3분의 1이 뉴욕에서 나왔을 정도로, 다른 주에 비해 인구 밀도가 높고, 대중교통 이용자가 많은 도시이다. 교통체증도 심하고, 유동인구도 많고, 관광객도 많았던 곳이다. 이 책의 표지 사진이기도 한 8번 애비뉴의 풍경은 2020년 4월 6일에 찍었다. 낮 시간인데도 거리가 턴텅 비어 있고, 가끔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수술용 마스크로 얼굴을 덮고 있다. 저자가 거주하고 있는 18층짜리 아파트 건물도 반 이상이 비었다. 많은 입주민들이 별장으로 떠났고, 젊은 사람들은 부모와 같이 지내려고 떠났고, 몇몇 이웃들은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거의 매일 누군가가 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팬데믹 이후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왔던 많은 일상들이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다시 여행을 하게 될까, 낯선 사람과 악수를 하고, 헬스클럽에 가고, 영화관에 가고, 아무 두려움 없이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거닐고, 아무 걱정 없이 마스크를 끼지 않고 밖에 나갈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은 대단한 의지를 가지고 행할 수 있던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일상들의 기억이 까마득하기만 하다. 불과 몇 달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이 책은 코로나의 상처가 가장 큰 도시 뉴욕에서 사태가 시작된 후 백 일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저자는 한 사람의 삶이 문자 그대로 하룻밤 새에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전하고 싶었고, 지금의 이 끔찍한 상황으로부터 의미 있고, 아름답고, 솔직하고,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당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중인 것 같아.”
“아냐. 안 잃어버렸어. 난 여기 있어.” 내가 말한다.
우린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부두에서 만나기로 한다. 우린 어떤 규칙도 어기지 않는다. 사람들이 걷고, 운동하고, 공공장소 에서 만나는 건 허가된 일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키는 한. 기다리고 기다린다. 마침내 그가 블록 저쪽 끄트머리에서 후디에 코트를 걸쳐 입고 발을 끄는 듯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p.118

 

발 밑에서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는 마른 풀들을 모아 화환 모양을 만드는 젊은 여자, 위기 상황에 대비해 뉴욕으로 와서 운동 중인 미국육군사관학교의 위생병들, 한 명도 타지 않아 텅 빈 러시아워의 지하철 풍경, 팬데믹 초반 코로나에 걸렸다가 항체가 생겨 연구용으로 혈장을 기부한 뉴욕대학병원의 마취과 레지던트들, 한순간에 동료를 잃은 야외관리업체 직원, 소독제와 장갑을 지닌 채 거리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은 노숙인 등 이 책에 수록된 흑백 사진 속 풍경들이다. 저자가 사진을 찍고, 이 책에 수록될 글을 쓰고 있었던 올해 3월에서 5월 중순 사이의 어느 날, 뉴욕에서는 며칠째 하루에 800명씩 죽어가고 있었다. 사망자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계급이 몰려 있는 브롱크스와 퀸스 구역에서 나왔다. 800명이라는 수치는 구체적으로 체감되기 어려운 숫자이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도시의 모든 것이 바뀌고 있으며, 우리는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전대미문의 팬데믹 이후 우리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살아있는 동안 삶을 조금씩 잃어버리는 이상한 시절'인 셈이다. 카메라를 들고, 마스크를 쓰고, 손 세정제를 주머니에 넣고, 이 사태의 증인이 되고자 거리로 나선 빌 헤이스의 사진과 글들이 뭉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바로 그 혼돈의 중심에서 일상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구의 거의 절반이 죽었던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처럼 언젠가 2020년을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대로 기억하게 될 거라는 사실이 슬프다. 그래서 더욱 이런 책이 필요하다. 이 시기를 함께 통과하면서 우정과 존중을 나누고, 연대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에게 다정한 안부를 건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거기, 당신 잘 지냈나요? 요즘 지낼 만한가요? 그리고 강요된 고독과 고요 속에서, 우리 생애의 어떤 순간들을 돌이켜보자. '말해진 것들과 말하지 않은 것들, 행해진 것들과 행하지 않은 것들, 표현된 사랑과 표현되지 않은 사랑, 네가 받은 그 모든 감사한 일들, 네가 느낀 그 모든 감사함.(p.880' '의지와 노력만으로 언제든지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불안과 우울의 날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바로 그런 당신을 위한 안부와 위로를 안겨주는 근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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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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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렇게 불길한 걸까? 시간은 멈추지 않고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며 인생은 완벽하게 밀폐된 방에서도 계속 움직이면서 가장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변화할 것이므로? 현재 모든 것이 완벽하므로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분명 나쁜 쪽의 변화일 거라는 불안감. 그래, 그거였다. 행복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아서 차라리 얼음을 깨트리고 찬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물에 빠질 때까지 불안해하며 하염없이 기다리느니 차라리 찬물에 빠져서 물에서 나오려고 싸우는 편이 나았다.    p.99~100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라고 소설이 있는 것이니까. 매번 책장을 넘길 때면 우리는 어떤 세상 안에 살게 된다. 다시 또 책장을 넘기면 또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 작가는 한 문단, 한 문구, 흔한 단어 하나로도 독자들을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갈 수 있다. 단어가 쓰인 방식, 경계를 무너뜨리는 상상의 힘, 탄탄한 플롯과 매혹적인 인물 등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요 네스뵈는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발코니에 선 남자'를 읽고 스톡홀름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 역시 해리 홀레 시리즈를 8년 째 읽으면서 오슬로와 사랑에 빠졌다. 내가 본 적 없는 것, 가 본 적 없는 곳들이 매우 사적이고 익숙한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작품 속 인물이 실제 사람이 되어 페이지 바깥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더라도 내겐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해리 홀레는 최악의 상황을 연이어 겪으며 지치고 피폐했던 모습이었다. 눈동자는 충혈됐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 빡빡 깍은 금발 머리에 192센티의 거대한 몸은 비쩍 마른 북극곰처럼 살이 빠져 근육질 몸에 지방만 쏙 빠진 상태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알콜 중독 상태였다. 그럼에도 사건 수사에 있어서 만큼은 융통성 제로, 고집 불통, 그리고 진실을 향한 무조건 적인 직진, 시니컬 하고 반항적이고, 무심한 듯 보여도 살인 사건 앞에서는 언제나 세상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계산 없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해리 홀레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막무가내식, 독불장군식이지만 사람 냄새 나는 캐릭터성에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오히려 불안정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정말 살아 숨쉬는 캐릭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박쥐>에 등장하는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형사인 해리 홀레는 32살이었다. 풋풋하고 열정 넘쳤던 그는 노르웨이 여성이 호주에서 사체로 발견되어 호주로 출장을 가게 되고, 출발전 금주 상태였으나 호주에서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바퀴벌레>에서 33살의 그는 찌는 듯한 더위의 방콕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철벽방어를 뚫고 노르웨이 대사의 살인 사건을 수사했다. <레드브레스트>에서 35살의 그는 미국 비밀경호원 총격사건으로 경위로 승진해서 국가정보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네메시스>에서는 은행 강도 사건과 전 여자친구의 자살 사건에 전작에서 죽은 동료에 대한 의혹을 수사하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기도 했다. <데빌스스타>에서 36살의 해리 홀레는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로, 경찰청의 외톨이이자 심각한 알콜 중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미 자기파괴적인 성향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우리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의 모습까지 상상해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오슬로 3부작을 거치면서 그는 외톨이에 술고래,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로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리디머>에서는 해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두 인물이 사라지게 되는 시기를 거치며, 그가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고독에 빠지게 되는 과정이 그려졌다.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를 거치며 전대 미문의 연쇄 살인범을 만나 손가락을 하나 잃어 버리고, 얼굴 절반이 찢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이 연쇄 살인범 손아귀에 들어가기도 하고,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운명의 연인 라켈 역시 도망치듯 그와 헤어지게 된다. <팬텀>에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상처받고, 사상 최악으로 망가지는 해리 홀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폴리스>에서 해리 홀레는 경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오랜 연인 라켈과 마침내 결혼을 한다. 그리고 3년 뒤의 이야기가 이번 신작 <목마름>이다.

 

 

“모르겠어. 내가 아는 거라고는 살얼음판 같은 행복 위를 걸을 때 무섭다는 거야. 어찌나 무서운지 어서 끝나기를, 그냥 물속에 빠지기를 바라지.”
“그래서 우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한테서 도망치는 거예요.” 카트리네가 말했다. “술. 일. 무심한 섹스.”
우리가 쓸모 있는 일, 해리는 생각했다. 그들이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동안.  
"우린 그들을 구할 수 없어요." 카트리네가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들도 우리를 구할 수 없고요. 오직 우리만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어요."      p.491

 

혼자 사는 여성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목에는 물린 자국이 있었고, 시신에선 피가 모자란 상태였다. 쇠이빨로 피를 마시는 범인을 언론에선 일명 '뱀파이어병 환자'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데이트 앱인 ‘틴더’로 남자를 만난 여자들이 살해되기 시작한다.  경찰청장 미카엘 벨만은 곧 법무부장관 자리가 내정된 상태였기에, '뱀파이어 살인마' 사건을 빨리 해결하고 싶다. 그래서 지금은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를 찾아간다. 라켈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경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살고 있는 행복한 해리 홀레의 모습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시리즈가 거듭될 수록 해리는 언제나 소중한 뭔가를 잃어 왔고, 그러면서 점점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왔으니 말이다. 미카엘은 해리를 협박해 수사를 맡게 하고, 해리는 결국 전대미문의 살인마와 마주하게 된다.

 

 

행복한 해리 홀레의 모습은 작가에게도, 독자들에게도 낯설었지만, 해리 자신도 얇은 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말할 정도로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그 행복이 깨져 버릴 까봐 더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는 것도 있었다. 해리 역시 그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고, 가족과 평온한 일상을 지켜내고 싶다. 시리즈가 지속되는 내내 고통받고 분노하고 상실감에 휩싸였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던 그였는데,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지켜내야 하는 존재가 생겼고, 그것을 잃을 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뼛속까지 경찰인 해리에게는 범인을 잡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고, 뱀파이어 살인마는 그 안의 목마름를 일깨우고, 불을 지핀다. 그 불은 꺼질 때까지 계속 타오르면서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이다. 그 동안 그래 왔듯이. 해리는 이번에도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과 자신과 주위 사람들이 희생을 치를 줄 알면서도 살인자를 쫓는 일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해리는 자신이 겨우 찾은 행복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가 범인을 잡고 사건을 해결하리라는 것에는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지만, 해리의 평온한 일상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 지에 대해선 독자로서 불안했다. 피를 갈망하는 범인의 목마름만큼이나 범죄에 이끌리는 해리의 목마름은 강렬하다. 우리는 누구나 뭔가를 갈망하면서 살아 간다. 단지 그 대상과 정도만 다를 뿐이다. 누군가는 그것에 목숨을 걸고, 자신을 던지기도 할 것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해리에게는 행복 추구가 삶의 원동력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뭘 위해 살아 가는가. 어쩌면 우리 모두 속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해리 홀레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그 진실을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해리 홀레 시리즈를 만나 보자. 순서에 상관없이 어떤 작품부터 읽어도 상관없다. 소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재미와 함께 해리 홀레에게 치명적으로 중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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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단호하고 건강한 관계의 기술
박상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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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해보다는 오해가 많습니다. 세상은 나를 오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해에 분노하지 말고, 누가 나를 이해해주었을 때 그 사람에게 고마워하는 것이 건강한 마음가짐입니다. 한편 오해가 억울하고 불편한 일만은 아닙니다. 오해가 이해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걸 알면 마음이 훨씬 편해집니다. 믿음을 쌓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오해에서 이해로 건너가는 과정, 그 시간을 우리는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묵묵히 나의 길을 가면 됩니다.     p.79

 

언젠가부터 자존감, 인간관계, 우울감 등 심리학과 관련된 에세이, 자기계발서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이는 시대적인 흐름과도 관련이 있는데, 사회가 불안정하고, 개인의 자존감이 낮아지고,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서 위로와 감성의 코드를 찾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최근에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외출을 하지 못하거나 타인과의 교류가 줄어든 사람들이 답답함과 우울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사회적으로 불안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정신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현대 사회에서 인간관계란 누구에게나 힘들고 두렵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배신당하고 상처받고 실망하고,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상대의 눈치를 보고, 그들 때문에 분노한다. 10년간 1,000회 이상 관계 수업을 진행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의연하게 대처하는 기술과 팬데믹 이후 새로운 시대에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법에 대해서 알려준다. 우리는 이제 코로나19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없고, 아마도 급변한 소통방식의 체계는 다시 오프라인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오프라인, 온라인의 경계 없이 이루어지는 관계 맺기, 소통에 유연해지려면 예전보다 더 많은 ‘관계 연습’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왜 이렇게 타인의 말에 흔들리고 상처받고 자책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지 나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일이에요.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평가에 민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 때문입니다.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나 때문입니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자존감 낮은 나 때문입니다. 설령 안 좋은 평가를 받더라도, 지적을 받더라도, 좀 더 건강한 시각으로 상대의 말을 해석해보세요. 비난이어도 괜찮아요. 그 말 속에서 나를 키울 수 있는 성장의 씨앗을 찾아보는 능력을 키우세요.    p.229

 

동료가 항상 불평불만이 가득해 나도 덩달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평소 감정도 점점 나쁜 쪽으로 기우는 것 같은데, 이 동료와 잘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면서 공포가 밀려온다면 해결 방법이 있을까. 입만 열면 잘난 척하는 사람과 옆자리에 앉아서 일을 하는데, 어떤 날은 두통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피곤하다면,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매일 봐야 하는데 어떡하면 좋을까. 대부분 인간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직장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편한 동료와 함께 일해야 하고, 매번 트집 잡는 상사를 참아야 하며, 직장에서 버텨내야만 한다. 여기에 더해 요즘은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 졌는데, 덕분에 가족들과의 불화까지 더해지고 있으니 심각한 상황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관계에서는 ‘신중한 행동’과 ‘약한 연결’이 핵심이며, 적당하고 가까운 거리 두기에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소통의 핵심은 공감과 경청이고, 경청은 자세, 공감은 표현이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공감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펜을 들고 실전 연습을 해볼 수 있도록 예시가 나와 있기도 하고, 관계를 성장시키는 대화법들의 사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외에도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 긍정을 이끌어내는 대화의 기술, 관계를 살리는 칭찬법 등 공감과 소통, 감정 등을 모두 훈련해볼 수 있는 스킬들이 가득한 책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의연하게 대처하고 마음 근육을 키워 관계의 주인이 되는 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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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벨 죽이기 죽이기 시리즈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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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당연하지."
"죽는 게 무섭지 않아?"
"죽는 게 무서우냐고? 무슨 소리야? 죽는 건 엄청난 대모험이라고! 그렇지, 얘들아?"
피터가 대뜸 물어보자 소년들은 부리나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자, 봐." 피터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다들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은 거야."   p.49

 

고바야시 야스미의 '죽이기 시리즈' 그 네 번째 작품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변주했던 <앨리스 죽이기>, '호두까기 인형'을 모티프로 한 <클라라 죽이기>, '오즈의 마법사'와 미스터리를 결합시킨 <도로시 죽이기>에 이어 이번에는 '피터 팬'이다. 작가는  ‘피터는 자신이 죽인 사람은 잊는다’, ‘네버랜드 아이들은 살육을 즐긴다’, ‘피터의 부하는 피터가 모르는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원전 문장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확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피터팬은 우리가 동화나 영화 속에서 만나왔던 피터팬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인다. 천진난만하면서도 사악한 웃음을 짓는 피터팬이라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사실 <팅커벨 죽이기>를 어느 정도 읽다가 아무래도 이 '피터팬'이라는 캐릭터에게 너무 적응이 안 되어서, 제임스 매튜 배리의 <피터팬> 원작을 다시 들춰 보았다. 그리고 흥미로운 대목들을 발견했다. 솔직히 세상에 피터만큼 건방진 소년은 없었다, 피터의 관심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멋진 재주를 과시하는 데 있는 것 같았다, 등의 문장들은 영원한 소년 피터팬의 아이답고 철없음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만큼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중심적이며, 악의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실제 동화에 묘사된 피터팬도 사람을 엄청 많이 죽여본 것을 자랑스레 이야기했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원했으며, 전투의 열망으로 가득하다는 걸로 나온다. 놀랍게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린 그 동안 이 <피터팬>이라는 동화를 어떻게 읽고, 해석해 온 걸까,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그렇게 보자니 고바야시 야스미의 '죽이기 시리즈'가 새삼스레 더 매력적인 작품으로 느껴졌다.

 

 

"즉 이런 말인가. 범인을 찾으려면 모두를 신문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서 신문하면 증언의 가치가 점점 상실된다."
"그러니까 범인 찾기는 신중하게 진행해야 해. 누군가 부주의하게 말을 꺼낸 순간, 누가 범인이냐는 정보가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어."
"네 머릿속에는 해결에 다다르는 경로가 만들어져 있어?"
"아마도."      p.293

 

이야기는 피터팬이 후크 선장을 죽이고 나서 웬디와 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온 뒤에서 시작된다. 피터는 웬디에게 봄철 대청소를 할 때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여름이 되어서야 데리러 간다. 웬디와 동생들과 달링가에 입양된 소년들은 모두 피터와 팅커벨을 따라 네버랜드로 향한다. 하늘을 날던 중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피터가 구해 온 고깃덩이 중에 말하는 도마뱀 빌이 등장한다. '죽이기 시리즈'를 계속 읽어 왔다면 누군지 알겠지만, 사실 이 작품으로 처음 접했다고 해도 상관없다. 도마뱀 빌과 지구에 사는 인간 이모리는 꿈으로 연결되어 있다. 빌이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를 만나고, 호프만 우주의 사람들과 사건을 수사하고, 오즈의 나라에서 활약하며 모험을 펼치는 동안 지구의 이모리가 도움을 주며 빌을 구하려고 한다. 현실과 꿈 속 세계, 각기 다른 두 세계에서 일어난 죽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예를 들어 네버랜드의 누군가가 죽으면 지구에 있는 아바타라도 죽는다. 꿈 속 세계에서 살해당하더라도, 현실 세계에서는 병이나 사고로 죽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범인을 찾아낼 수도,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도 쉽지가 않다.

 

네버랜드에 도착하자마자 팅커벨이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고, 아이들은 피터를 범인을 찾는 탐정으로 적극 추천한다. 하지만 범인을 찾겠다며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는 피터 때문에 지구에서도 사고가 잇따르자 이모리는 살육을 멈추기 위해 그의 아바타라를 찾아 나선다. 꿈의 나라 네버랜드에서는 매일매일 살인이 일어나고, 동화 속 나라에 대한 환상은 산산조각이 나지만, 그럼에도 도마뱀 빌과 이모리의 모험은 계속 된다. 다음에는 또 어떤 동화 속 세계가 잔혹한 환상으로 바뀌게 될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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