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 상
오타 아이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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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파랗게 빛나는 하늘이 보였다.

플로리다키스다.

의식이 사라져가는 가운데 슈지의 머릿속에 하늘의 계시처럼 그런 말이 떠올랐다.

플로리다키스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러므로 공항에서 총에 맞아 죽은 그 남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수밖에 없었다.

3월의 어느 날 역 앞 광장 분수 주위로 하얀 꽃잎이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시게토 슈지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고, 근처에는 세 명이 더 있었다. 수수한 회색 정장의 여자, 조그만 진주 목걸이를 한 노부인, 상점 주인 풍모의 남자, 그리고 청바지를 입은 여대생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분수 근처로 달려온다. 그런데, 갑자기 평화롭던 그곳의 공기가 일변한다. 검정색 헬멧과 검정색 에나멜 롱코트에 검정 장갑과 부츠를 신은, 다스베이더가 피에 젖은 회칼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고, 그 무차별 살인 사건에서 유일하게 슈지만 살아 남는다. 사건 직후 근처 빌딩 공용 화장실에서 약에 중독된 범인이 체포되지만 곧 사망한다. 범인은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로 살해했지만, 약으로 맛이 간 상태에서 죽었으니 죗값을 치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게 피의자가 사망한 상태에서 사건은 그렇게 종결 되는 분위기인데, 형사 소마는 현장에서 문득 이상한 위화감을 느낀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것처럼 보이는 범인은 어째서 사람이 더 많은 곳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왜 이런 한산한 광장이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한편, 칼에 찔리면서도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진 열여덟 소년 슈지는 병원에서 정체 모를 남자에게 경고를 받는다. 다른 네 사람은 어떻게 됐냐고 묻고는 모두 죽었다는 걸 알게 된 뒤, 가능한 멀리 달아나라고 말한 것이다. 앞으로 열흘만 살아남으면 안전하다고. 슈지가 마지막 한 명이니 꼭 살아남으라고 말이다. 슈지가 채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도 전에 누군가로부터 또다시 목숨을 위협받게 되고, 형사 소마의 도움으로 그의 친구인 야리미즈의 아파트에 몸을 숨기게 된다. 경찰 조직에서 사람들의 눈 밖에 난 형사 소마, 전직 방송국 직원 야리미즈, 그리고 상해 전과로 소년분류심사원에 갔던 이력이 있는 이번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슈지. 이렇게 세 사람이 독자적으로 무차별 살인 사건의 내막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 목소리에는 무서우리만치 단순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슈지라는 인간을 죽이겠다는 의지. 놈은 약 따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느낀 원인은 싸웠을 때의 감각보다도 바로 그 목소리였음을 슈지는 비로소 깨달았다.

욕실 가득 피어오른 새하얀 김 속에서 슈지의 가슴은 섬뜩한 의혹에 옭매였다. 놈은 정말 무차별 살인범이었을까. 정말로 우연히 거기에 있던 사람들을 노린 걸까.

이 작품은 [파트너], [TRICK2] 등 유명 드라마의 각본을 써온 작가 오타 아이의 데뷔작이다. 사실 오타 아이의 작품은 최근에 <잊혀진 소년>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구성도 훌륭하고, 캐릭터, 반전, 드라마 모두 흠잡을 데 없이 멋진 작품이었다. 사법체계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작가의 예리함이 만들어내는 드라마가 너무도 이해가 되어 함께 분노하고, 공감하고, 그러다 먹먹한 감정으로 슬픔에 휩싸이고 말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작품을 먼저 만났던 독자들이라면, 이번 <범죄자>를 통해서 소마와 야리미즈, 그리고 슈지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너무도 반가웠을 것이다. <범죄자>가 데뷔작이니 여기서 등장한 캐릭터들의 이후 이야기가 <잊혀진 소년>에서 펼쳐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잠깐 언급하자면 이 작품에서 소마의 친구 정도로 등장하는 야리미즈는 방송국 직원, 고스트 라이터 시절을 거쳐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고, 그 곳의 조사원으로 슈지가 일하고 있으며, 소마는 형사과에서 교통과로 좌천된 상태로 등장했었다.

<범죄자> 240페이지 분량의 티저북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는데, 이런 이벤트가 참 좋은 것이 일단 두툼한 페이지에다 두 권 분량으로 출간되는 작품들은 정보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는 선뜻 고르기가 쉽지가 않다. 가격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분량에서도 부담스럽고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티저북만 읽더라도 바로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져 끝까지 읽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티저북을 먼저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을 아예 읽지 않은 사람들은 있을 수 있어도, 일단 티저북을 읽었다면 1, 2권 끝까지 달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잊혀진 소년>에서 단순히 원죄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대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이라는 커다란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이 작품 <범죄자>도 무차별 살인 사건으로 위장한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이야기라고 하니 앞으로 펼쳐질 스토리가 더욱 기대가 된다. 무엇보다 오타 아이는 각본가로서의 탄탄한 이력 때문에 첫 장면부터 단 한 순간도 지루할 틈 없이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압도적인 이야기의 힘이 뛰어난 작가이다. 게다가 의료, 경찰 조직, 매스컴, 정치계, 대기업 등에 대한 성실하고 꼼꼼한 취재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이다 보니 작품 속에서 구축되어 있는 허구의 세계가 실감나게 와 닿을 수밖에 없다. 구구절절 말이 길었지만, 사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빨리 정식 출간본으로 이 폭발하는 이야기의 끝까지 달려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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