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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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쓴다는 것이 가언을 만드는 일과 표어를 찢어버리는 일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글을 통해 끊임없이 어떤 명제를 만들거나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한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쓰지만, 그 글로 자신이 온전하게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단언하듯 문장을 만들지만 그 문장이 얼마나 불안정하며 바보 같은 것인지도 알고 있다. 바보 같은 줄 알면서 계속 쓰고, 단언하지 않으려 하면서도하얀 눈 위의 구두 발자국같은 문장을 끊임없이 찍어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속에서 흔들리며 글을 쓴다.

책을 읽는 것을 즐겨 하는 이들은 대부분 글쓰기에도 관심이 많다. 하지만 읽어본 수많은 작법서, 글쓰기, 문장 등에 대한 책들은 사실 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라는 건지, 일단 잘하라는 건지, 즐기다 보면 잘하게 된다는 것인지,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즐기라는 것인지' 유명한 잠언이나 경구 들은 하나 마나 한 말들이거나, 어쩌라는 것인지 난처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번에 만난 이 책은 조금 다르다. 소설가 김중혁이 처음으로 밝히는 글쓰기 비법과 창작의 비밀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장난기 어린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의 절반 이상은 문법, 문장, 이야기 구성 등등에 관한 비법이 아니라 작가라는 존재의 신변잡기에 가까운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창작의 도구들이라고 해서 글을 쓸 때 필요한 물품들의 나열로 시작해서 글을 쓸 때의 일상, 쓰지 않을 때의 일상, 서점의 발견과 글을 쓸 때 듣는 음악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그러고는 창작의 시작 단계를 거쳐 실전 글쓰기 항목에 이르지만, 뭐 딱히 작가 만의 창작 비법이라든가 글쓰기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우리는 소설가라는 인물의 머릿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작가라는 존재는 뭔가 대단히 창조적인 영감이 번뜩이는 순간을 마주하고, 갑자기 뭔가에 영향을 받아 마구 글을 써내려 갈 줄 알았던 이들이라면 실망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공감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미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한 그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평소에도 김중혁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었고, 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도 자주 들었던 나 같은 독자들이라면 그 친근함이 이 책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 느낌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종이 위의 문장들은, 일종의 평행 우주다. 종이 위의 문장들은 실재하는 현실과 무척 닮아 있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글을 쓰는 사람은 종이 위에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고, 가보지 못한 길을 상상할 수 있다. 픽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글이 그렇다. 우리는 글 속에다 새로운 우리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글을 통해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인 척할 수 있다. 더 현명하거나 더 세련된 사람인 척할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나 그럴 수 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더 나은 사람인 척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다. 글쓰기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작가는 인생을 두 배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길에서 만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건널목을 건너고 아침에 출근하는 그런 일상생활이 첫 번째 인생이고,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곱씹는 순간들이 두 번째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김중혁 작가는 이 책에서 바로 그 첫 번째 인생으로 농담처럼 이야기를 시작해, 점점 두 번째 인생을 보여주며 작가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내용이 너무 가벼워서 책장이 쉽게 넘어 가는데, 이상하게도 책의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어떤 글이든, 무엇이든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심각하지 않고, 어렵지 않고, 딱딱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글쓰기에 관한 두서 없는 생각들이 결국 목적지로 도달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다 작가의 명백한 의도라는 얘기일 것이다. 글쓰기란 머리 아프고,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 항상 바쁘고 시간이 없다고 핑계 대는 것은 변명일 뿐이라는 것,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만으로 뭔가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다 헛소리라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실제로 손을 계속 움직여 써 내려가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게 만들고 있으니 이 책은 자신의 제목을 고스란히 책임지고 있는 대단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다.

'읽기는 쓰기를 낳고, 쓰기는 다시 읽기를 낳는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글쓰기에 관련된 책 좀 읽어봤다 싶은 이들에게는 듣도 보도 못한 독특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 줄 것이고, 글을 쓰고 싶지만 첫 문장을 어떻게 써야 되는 건지 에서부터 막막한 이들에게는 뭐라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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