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녹색 바람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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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살인이 일어났는데도 하루하루 생활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그것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흔해빠진 일상에는 망각이라는 자정작용이 있는 듯했다. 어느 가정이든 이렇게 일상을 되풀이함으로써 비극을 과거로 쫓아 보내는 것 아닐까.

죽은 후에 저 세상에서 아내와 만날 일이 두려운 노인은 아내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무서워서 죽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젊었을 적에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으며, 아내는 부리기 편한 무급 하녀로밖에 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급기야는 아내의 영혼을 불러내겠다고 영능력자를 집으로 불러와 초심리학에 심취한다. 그런 노인을 말리려고 가족들은 그런 방면에 능통한 대학교 연구자에게 부탁해서 영능력자가 사기꾼이라는 걸 밝혀내겠다고 하는 와중에, 10년 전 진로 문제로 노인과 다투고 집을 나갔던 손자가 집에 돌아온다. 그렇게 온 가족과 초심리학 연구원과 영매까지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느닷없이 살인이 벌어진다. 노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입구는 열려 있었고 아무도 별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함께 있었던 가족들과 연구원, 영매에게는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고, 그야말로 밀실에서 일어난 불가능한 범죄로 영매는 귀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가족들은 노인이 생전에 원했던 죽은 부인의 영혼을 부르는 강령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강령회를 열기도 전부터, 어릴 적 사고로 몸이 불편한 사에코의 신변을 위협하는 징조가 발견되고, 세이치는 대학 선배인 네코마루에게 도움을 청한다. 독설과 괴상한 언동으로 교내에서 유명한 그는 행동력과 호기심, 자신감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입과 은근슬쩍 내비치는 다정함까지.. 사람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는 세이치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독특한 상대였다. 호기심이 강해서 흥미가 동하는 일에는 일단 끼어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네코마루에게 수상한 강령회와 밀실 살인이야말로 딱 맞는 건수였지만, 하필 지금 다른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며 세이치에게 이것 저것 조사할 것들을 지시한다. 제일 먼저 용의선상에 가족들을 하나씩 올려두고, 금전적인 문제가 있는 지 조사하고, 외부인인 영매와 연구원들의 알리바이에 문제가 없는지 알아 보지만, 경찰도 찾아 내지 못한 것을 일반인인 세이치가 발견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의혹만 깊어져 가는 와중에, 드디어 문제의 강령회 날이 다가온다.

 

살아 있는 사람이 돌아가신 분을 불러내다니 어쩐지 불손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신 분은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의 마음에서만 조용히 살아 숨 쉬는 법이다. 추억만이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추억은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차게 생명의 기척을 전달한다. 소중한 것을 살그머니 감싸 안듯이.

이 작품은 전형적인 본격 미스터리인 구라치 준의 전작과 달리,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 풍경에서 의표를 찌르는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 미스터리이다. 특히나 이 작품은 출간 후 20년간 선배 열풍을 불게 한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 그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서 더 의미가 있다. 네코마루는 구라치 준의 첫 단편집에 등장한 이래로 이후 시리즈 캐릭터로 자리 잡아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 오고 있다. 세상 모든 일에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수학과 전기에는 유난히 취약한 이 남자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면 득달같이 달려와 참견하는 오지랖 넓은 한량이다.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고등학생으로 오해 받을 만큼 몸집이 작고 동안이다. 한창 일할 나이인데도 일정한 직업 없이 빈둥빈둥 놀며 지내는지라 어떻게 생계를 잇는지 아무도 모른다. 학생 시절부터 기이한 행동으로 유명했고, 흥미가 없는 분야에는 초등학생 수준의 지식밖에 없는 독특한 인물이다. 네코마루는 구라치 준의 여러 작품에서 탐정으로 사건을 해결하며, 본격 미스터리를 너무 난해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격 미스터리와 일상 미스터리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구라치 준과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괴짜 네코마루 선배의 조합이 너무도 매력적이다.

 

본격 미스터리물이지만 사건 해결의 단서들을 독자들에게 모두 제공하지 않고 있어서, 살인 사건의 트릭을 짐작하기란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밀실에서 살해당한 노인의 사건부터 연이어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 동안 숱한 미스터리, 추리 소설들을 읽어온 나이지만 사건의 진상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트릭과 미스터리 자체에만 치중을 주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 과학과 영능력자의 논쟁이라는 흥미로운 테마에 따른 여러 인물들의 해석과 의견에도 꽤나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어 재미있었고, 그 와중에 거의 바깥 세상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순진한 사에코는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신경을 긁는 신랄한 말과 신기한 다정함을 가지고 있는 예측 불가의 네코마루 선배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예지몽으로 꾸고 걸핏하면 자신만의 테두리에 틀어박히려는 세이치 역시 독특한 캐릭터라서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 동안 만나왔던 '일상 미스터리'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결국일상의 불안정함과 예측 불가능이 사건의 전체적인 트릭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구라치 준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이 작품을 계기로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가 더 출간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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