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달콤한 고통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어쩔 수 없이 상투적으로 변명하며' '이곳 생활은 아주 신나지도, 재미있지도 않아' 라는 글귀가 가슴 아팠다. 편지를 받을 당시에는 저 글귀가 마음에 걸렸고, 이제는 심장에 콱 박혀 생생했다. 그녀는 제럴드를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한 적도 없었다. 하지 말았어야 할 결혼이었다. 데이비드는 결혼 한 달 전, 처음 그 소식을 듣고 취소하라고 그녀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젊은 과학자 데이비드 켈시, 그는 낡고 스러져가는 주택가에 있는 하숙집에서 지내며, 금요일 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주말이면 요양원에 있는 아픈 어머니 곁을 지킨다. 담배와 술은 전혀 하지 않았고, 워낙 깔끔한 성격에 직접 청소까지 해서 청소 아줌마가 그의 방에는 아예 들를 필요가 없었다. 여자에게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이상적인 세입자이자 괜찮은 청년, 혹은 성인으로 생각했다. 그곳으로부터 한참 떨어지는 마을에 멋진 집을 가지고 있는 윌리엄 뉴마이스터, 그는 주말마다 근사하게 인테리어된 자신의 집에서 사랑하는 연인과의 삶을 꿈꾼다. 그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으며 인생을 사는 법, 웃는 법, 행복해지는 법까지 아는 남자였다. 

네가 나더러 성공했다고 하니 아주 좋긴 하다만, 너 없이 나는 불완전해.

사실 이 두 인물은 한 사람이다. 회사가 있는 프로스버그의 누추한 하숙집에 살고 있는 데이비드 캘시는 자신의 월급 90퍼센트를 쏟아 붓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 교외에 있는 이 집을 구입했다. 그리고 새로 이름을 짓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이 되어 사랑하는 여인 애나벨과의 삶을 꿈꿨다. 애나벨은 2년 전 자신을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인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집에서 마치 그녀와 함께 있는 듯 행동했고, 그녀와 같이 잠들었다. 지금은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지만, 결국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고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다시 머리가 맑아졌다. 애나벨이 그랜트 바버와 결혼하게 내버려둬야지, 한 번 더 뻔한 실수를 하게 둬야지, 오래가지 않을 테니. 그런데 재혼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바보처럼 일정이 뒤로 밀린다. 그 자식이 애나벨이 누운 침대에 기어들어 간다고 상상하자 식은땀이 흘렀다. 뭔가 확실히 해둬야 한다. 편지를 또 보낼까? 그는 편지는 포기했다. 그랜트의 목을 졸라 쾌감을 선사하며 죽이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간 그가 감옥에 가야 한다. 증오심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안과 미움, 경멸을 선사한다. 그래도 그는 애나벨을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예의 바르고 조용하며 회사에서는 유능한 수석 엔지니어인 데이비드의 완벽한 이중 생활은 모두 한 여자 때문이다. 일주일 중 닷새는 회사 근처 허름한 하숙집에서, 나머지 이틀은 가명으로 구입한 멋진 집에서 지내면서 애나벨 과의 삶을 꿈꾼다. 그는 끊임없이 이미 결혼해 다른 남자의 아이까지 출산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고, 만나자고 연락하고, 그러다 급기야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우린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당신이 그녀와 결혼했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데이비드는 지나친 집착과 망상에 빠져 있는 정신 나간 스토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그녀, 애나벨도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완전히 마음을 내어주지도 않으면서 그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고, 다정스런 말투로 이야기하며, 편지에서는 나야 당신을 봐서 좋았다. 여전히 사랑을 듬뿍 담아, 난 당신 생각을 많이 해. 등의 표현으로 그가 희망을 가지도록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고, 데이비드에게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면서 단칼에 그를 거절하지 못하고 빙빙 돌려서, 우유부단하게 그를 밀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데이비드의 완벽한 이중 생활은 그를 짝사랑하는 이웃집 에피와 결혼 생활에서 도피하려고 여자들을 기웃대는 동료 웨스 덕분에 점점 쉽지가 않아 진다. 그의 집요한 편지 때문에 화가 난 애나벨의 남편은 그를 찾아오고, 그의 삶은 점점 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1955년부터 1991년까지 무려 36년에 걸쳐 완성한 『리플리』 연작을 쓰던 중, 1960년 이 시리즈의 속편이라 할 만한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발표한다. 집착이라는 감정을 그 극단까지 밀어 붙여 파고드는 이 작품의 주인공 데이비드 캘시는 여러 모로 톰 리플리를 떠올리게 하지만, 또 굉장히 다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시작된 주제가 리플리에 이르러 제대로 완성되는 느낌이랄까. 그러니 이 작품은 리플리 시리즈를 예고한 수작이기도 하다. 과연 데이비드의 감정은 사랑일까. 집착일까. 나는 그가 사이코패스나 변태 혹은 스토커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의 감정이 참 안타까웠다. 정확한 마음을 알 수 없었던 애나벨의 우유부단함도, 진심이지만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었던 에피의 짝사랑도, 아내와의 불화로 끊임없이 여자들을 기웃거리며 가정을 외면하는 웨스의 무심함도... 다 그럴 수도 있을 법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법한 감정들이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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