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파이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최민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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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전부 다야. 남자들 전부가 다 그렇다고. 이건 선전포고 없는 전쟁인 거야. 그들은 우릴 증오해. 남자들은 우니 나이가 몇이건 우리가 대체 어떤 사람이건 간에 싹 다 미워하고 있다고. 근데 아무도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아. 심지어 우리 조차도." 그녀가 하도 길길이 뛰는 바람에 설득할 방법이 없었고, 그로 인해 우리는 불편해졌다. 왜냐하면 내가 전에 말했듯(그리고 이는 바로 지금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진실이다) 만약 당신이 여성이라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들이 있고, 당신이 어린 소녀이거나 여자라면 당신은 여성이며, 당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미국 뉴욕 주 북부 소도시의 가난한 동네를 배경으로 비밀 조직 '폭스파이어'를 결성한 소녀들의 이야기이다.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술 냄새를 풍기고 집에서 싸움이나 하던 아버지 역시 어딘가에서 죽어서 혼자인 렉스와 알콜 중독인 엄마와 사는 매디는 친구들을 모아 비밀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그들의 상징인 붉은 불꽃을 문식으로 새기며 입회식을 거행했던 이들 조직은 훗날 덩치가 불었고, 인원수가 많아지자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개성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가 특별하기를, 타인보다 우월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어리고 가난하며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들을 억압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맞서기로 한다. 사회의 부조리를 넘어서려는 소녀들의 연대감과 믿음은, 다소 무모해 보일지라도 열정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회적으로 약자로서의 여성이었지만, 마치 아무도 날 상처 입힐 수는 없어. 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이들은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관심을 표현하고 성추행을 일삼는 수학 선생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어 학교를 그만두게 만들고, 개들을 학대하고 소중히 다루지 않는 가게 주인이 장사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소문을 내기도 하고, 조카에게 돈을 뜯어내고 이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매디의 삼촌을 현장에서 혼쭐을 내주기도 한다. 하지만 폭스파이어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조직의 리더인 렉스는 징역 5개월 형을 살게 된다. 세상이 그녀를 기소한 혐의는 다음과 같다. 중절도죄. 무면허 운전. 난폭 운전. 속도위반. 생명의 위협. 경찰관의 지시에 불응. 악의적 재물손괴. 치안 문란. 무기를 숨겨서 소지. 불법 무기 소지. 치명적인 무기로 흉악한 공격 시도. 습관적 무단결석. 교육적 문제아. 문란한 미성년자. 폭스파이어가 어떤 행동을 해왔는지 대충 짐작이 될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인 강자의 시선으로 판단한 어른들의 편협한 시선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우리 모두 죽음을 모면했다.

렉스가 에이시 홀먼의 뷰익에 우리를 태우고 거의 가본 적 없던 시골길을 달렸던 그 거칠고 난폭한 드라이브. 앞으로 절대 잊지 못하리라. 우리가 살아 있는 한은.

나는 여전히 가끔 그때 일을 꿈꾼다. 그러다 겁에 질려 잠에서 깨지만, 그러면서도 미소를 짓는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죽음을 속여 넘겼으니까. 그건 아무나 그랬다고 주장할 수가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성 혐오가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여성 혐오와 관련된 사회적 담론이 증가하고, 젠더 폭력 사건들이 이슈화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폭증하고 있다. 하지만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흘렀는데도 여성을 바라보는 일부의 시각은 여전히 수준 이하인 것이 사실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가 하면 페미니스트 여성에게 살인 예고를 하는 등 여성을 향한 폭력적 언행을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다. 이럴 때, 바로 지금, 폭스파이어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거침없이, 두려움 없이, 당당히 분노하고, 남성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맞서고, 잘못된 사회적 규율에 반격을 세울 수 있는 여성들만의 비밀 조직이 있다면 어떨까. 극중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한 20세기 후반 미국의 실상이 현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약자로 하여금 사적 제제를 집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라는 것이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 속 이야기는 현재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을 통해 접하는 이야기들이 일종의 간접적인 대리체험이라고 했을 때, 내용이 궁금해서 보기는 하지만 두 번 다시는 체험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작품이 가끔 있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들도 나한테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작가였다. 사이코 패스의 매우 폭력적인 시선으로 보는 세상은 굉장히 불편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불편하지만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이렇게나 소름 끼치게 잘 그려내는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혹은 끔찍한 묘사나 고통스러운 대목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작품에서도, 참 아프고, 두려운 감정이 들게 하곤 했다. <좀비>, <대디 러브> 등 많은 작품들이 그러했는데, 이번 <폭스파이어>는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만큼 불편한 부분 없이 술술 읽혔다. 물론 여전히 폭력과 복수가 난무하는 강렬한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기존 작품에서 느꼈던 끔찍하거나 불편한 부분이 없어서 읽기에는 참 좋았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이미 두 차례나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하다. 첫 번째 작품에선 스타가 되기 전 안젤리나 졸리가 렉스 역을 맡았었고, 두 번째 작품에서는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건조한 톤으로 원작을 고스란히 살리고 있다고 하니 영화와 비교해서 읽는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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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8-16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 폭력을 방지하고 맞서는 여성들의 모임이나 조직이 생긴다면 찬성합니다.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런 모임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 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릴 수 있고, 근절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연대감 형성입니다.

피오나 2017-08-16 17:22   좋아요 0 | URL
그죠? 약자들의 연대감 형성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시사하는 바가 많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