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 -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김용언 지음 / 반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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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지자 전혜린의 '드라마 퀸'으로서의 기질, 문학과 예술에 현혹되어 자신이 그 일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문학소녀'로서의 기질 앞에서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을 사람은 없다. 스스로를 '공부 안 해도 성적 잘 나오는 천재 소녀'로 포장하는 기술이라든가, 공부도 뛰어나게 잘했지만 그 이외의 것, 즉 다른 모범생들은 꿈도 꾸지 못할 것들을 서슴없이 해치울 수 있는 '비범한 천재 소녀'로 포장하는 기술. '비범해야 한다'라는 열망은 타인의 시선을 전제한 포즈로 가능해진다는 진리를 그녀는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좋아했던 문학소녀였다. 학창시절 교실 한구석에 펼쳐 세운 교과서 안에 책을 숨겨놓고 읽었던 기억이 있는 당신이라면, 이 책을 만날 수밖에 없으리라. 전혜린을 경유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읽기와 쓰기가 폄훼되어 온 기나긴 역사를 파헤치는 책이라니, 읽기도 전부터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책 읽는 여자의 흑역사' 의 대명사쯤으로 여겨지는 전혜린에 대해, 그리고 그 전혜린에 열광했던 세대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얼핏 전혜린 평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전혜린으로 시작해 전혜린으로 마무리가 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넘어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를 재구성하며 '전혜린'으로 상징되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다섯 살의 나는 그녀를 동경했고, 전혜린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은 지금의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적어도 동감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었다. 이기에 밝은 세속적 약삭빠름을 경멸하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들과 다른 인간임을 보여주겠노라 결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보낸 설명 없는 그림이나 단 한 줄의 시구만으로도 나는 그녀의 심경, 그녀가 처한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고 그녀가 내게 보낸 의미를 알았을 뿐 아니라, 또한 그녀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느낄 수 있는 영혼의 벗을 갈망한 시절.

아무나 쉽게 해외여행을 다닐 수 없던 시절, 독일로 유학 간 '천재' 전혜린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아버지의 보호막에서 벗어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삶을 너무 빨리 맞닥뜨린 전혜린의 초조와 불안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던 걸까. 저자는 전혜린에 대해 그녀를 비판적으로 조롱하는 시각, '부잣집 딸내미의 교양 있는-공주-코스프레'라는 시각이 교정되어야만 하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의 '사춘기 소녀스러움'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도, 전혜린의 수많은 자전적 글쓰기가 수필이라는 형식때문에 폄하되고 천대받는 것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고 전혜린의 수필에 담긴 과도한 여성성과 소녀적 감성, 그 글들이 문학소녀의 유치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성인 여성 작가에게 '소녀적' 혹은 '문학소녀'라는 말이 붙을 때의 함의에 대해서도 말한다. 글을 읽는 내내 뭔가 속 시원한 느낌, 내가 그 동안 하고 싶었던 마음들을 고스란히 글로 표현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전혜린의 삶과 평가에 대한 이야기가 여류 작가 수난사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야말로 전혜린이라는 대상을 넘어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라는 책의 부제로 완벽하게 도달한다. 당시 소녀들의 독서와 글쓰기가 많은 경우 남성들의 시선을 만족시킬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그것들과 문학소녀를 얕잡아 보는 시선이 결국 여성-독자-작가를 업신여기는 시선으로 이어져야 했던 그 당시의 모순을 짚어내는 동안,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 조차도 분노가 마구 일었다. 대체 왜, 여성들은, 단지 책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긴 세월 동안 그런 수난을 겪어야 했단 말인가. 나도 저자처럼 전혜린을 어린 시절에 만났었기 때문에, 당시에 그녀를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처럼 나도 전혜린의 삶을, 글을 동경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전혜린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러했기에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내 심금을 울린다.

문학소녀. 나도, 당신도 전혜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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