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미스트
스테프니 메이어 지음, 윤정숙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그렇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계속 살아 있기 위해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어두운 밤이면 때때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회의를 느껴야 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의 질이 과연 이 정도의 노력을 기울일 만한 것인가?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 뜨지 않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끈질긴 공포와 지독한 노력보다는 어둡고 공허한 무()쪽이 매력적이지 않은가?

과학자이자 전직 비밀 요원, 그 일을 6년 했고, 이후 그들에게서 3년 동안이나 도망 다니면서 살아 왔다. 테러리스트를 심문하는 일을 누구보다 유능하게 해왔지만, 국가와 조직은 그녀를 버렸고,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였던 동료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그녀는 침대에는 가면과 가발, 그리고 분장용 피를 채운 비닐 팩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자신은 그 아래 침낭에서 잔다. 밤마다 보안 장치를 설치했다가 아침에 다시 해체하는 작업을 반복해야 하고, 그 때문에 일어나고 싶은 시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야 한다. 약국이 무색할 만큼 많은 독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벨트에는 주사기가, 주머니에는 메스 날이, 신발에는 칼, 가방 안에는 후추 스프레이 등등 완전 무장을 하고 다닌다.

이름과 신분을 수시로 바꾸고, 다양한 변장술을 통해 모습을 감추며, 절대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총과 방독면이 세면대 아래 수건 더미에 숨겨져 있고, 자기 전에도 방독면을 쓰고서야 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방침이 바뀌어서 그녀가 필요하다고. 여러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운 일이 생겼고, 이 일을 해 줄 다른 적임자는 없다고. 절대 망쳐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그녀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이건 그들이 파 놓은 또 다른 함정인 걸까. 아니면 그녀도 이제는 드디어 침대 위에서 편하게 잘 수 있는 날이 오려는 걸까.

그녀는 정말 대니얼에 대해 공부하고 그의 상호작용을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사람은 이렇게 행동한다. 그녀는 그 방법을 전혀 모르거나 완전히 잊어 버렸다. 그녀는 웨이트리스를 상대하거나 칸막이 직업에 필요한 말들만 터득했다. 직장에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안다. 그녀는 불법 의사로 일할 때 환자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전에 그녀는 대상에게서 대답을 이끌어 내는 최고의 방법들을 배웠다. 그러나 미리 정해진 역할 밖에서는 항상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했다.

100만 명을 죽일 수도 있는 치명적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미국의 네 개 주에 방출하기로 한 테러리스트로 지목된 대니엘 비치. 알렉스는 그에게 접근해 자백을 받아 정보를 빼내와야 한다. 그래야 그녀의 이름이 조직의 블랙 리스트에서 사라지고,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도 구할 수 있다. 고등학교에서 역사와 영어를 가르치는 표면적으로 대니얼은 흠 하나 없이 깨끗한,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계좌에서 큰 돈이 움직인 내역이 포착되었고, 마약왕 엔리케 데 라 푸엔테스라는 인물과의 연관성도 엿보인다. 알렉스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는 그에게 접근한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너무 순조롭게 그와 말을 나누게 되고, 그를 연구실로 유인하고, 자백제를 주사해 그를 심문하게 된다. 그런데, 그에게 약물을 사용하고, 자백을 강요하며 고통을 주려고 할수록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자신이 벌써 3년이나 이 일에서 손을 뗐었기 때문에 대상에게 감정을 느끼는 거라고, 그래서 대상의 반응에 영향을 받는 거라고 애써 생각하려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그녀가 몰랐던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었다. 과연 대니얼의 정체는 무엇이며, 알렉스는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지긋지긋한 도망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녀가 모르는 이 일에 숨겨진 내막은 과연 무엇일까.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작가 스테프니 메이어의 시크릿 에이전트 스릴러는 무려 730페이지나 되는 두툼한 두께의 스파이 소설이다. 제임스 본드의 소설 혹은 영화 제이슨 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주인공 캐릭터가 여성이라는 데에 스테프니 메이어 만의 특별함이 있다. 읽는 내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생존 방법과 각종 지략을 구사하는 알렉스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매력적이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위기에 몰린 주인공이라는 설정 자체는 평범하지만, 그걸 이야기로 풀어내는 방식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고, 매혹적이다. 스테프니 메이어만의 주특기인 로맨스가 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 소설이지만, 국가의 안보나 국민의 생명과 연관된 공공의 안전 등은 사실 이 작품에서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주요 등장 인물은 알렉스를 포함해서 단 세 명이고, 시종일관 그들이 비밀을 파헤치고, 계획을 세우고, 그들을 쫒는 무리로부터 도망치는 모습만 그려지고 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조직의 인물들은 초반과 후반부에만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지루해질 틈은 없다. 스파이 소설에 등장하는 로맨스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그려낸 듯한 느낌이다. 역시 스테프니 메이어! 라는 찬사가 나올만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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