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체온증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김이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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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신작 '저체온증'이 출간되었다. 형사 에를렌뒤르 시리즈로 국내에 출간된 순으로는 네 번째 작품이다. 그 동안 국내에 <저주받은 피>, <무덤의 침묵>, <목소리>가 출간되었었고, 이 책들은 모두 절판 상태이다. 그리고 무려 8년 만에 만나게 되는 새로운 에를렌두르 시리즈라니.. 감격스럽다!!! 에를렌두르 시리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늘하고 슬픈, 북유럽 미스터리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게다가 경찰소설로는 독특하게도 사건 수사 자체보다 주인공의 내면 묘사가 큰 비중을 차지했던 시리즈들이기도 하다.

"아들 일과 관련해서 무슨 소식이 있소?" 노인이 커피를 반쯤 마시고 나서 물었다. "새로운 소식은?"

"아니요, 죄송하지만 새로운 소식이 없습니다." 에를렌뒤르는 지금껏 몇 번을 반복했을지 모를 대답을 재차 했다. 그는 노인의 방문을 자기에게 떨어진 시련으로 여기지 않았다. 에를렌뒤르 입장에서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다른 부분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일어난 일이 자기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지옥을 안겼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어떻게 아무 소식도 없을 수 있는지 되풀이해서 말하는 노인의 항변을 묵묵히 듣는 것 말고는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이었다.

한 여성이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 각별한 사이였던 어머니가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많이 힘들어했다는 주변의 증언과 정황들로 그녀의 죽음이 그저 평범한 자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친구는 마리아가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에를렌뒤르 형사에게 강력하게 주장하며, 사후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마리아가 영매와 나눈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를 준다. 범인을 잡고 처벌하는 것보다, 남겨진 무고한 사람들에게 다시 진짜 삶을 돌려줄 답을 찾아내는 게 수사의 진짜 목적이라고 믿는 에를렌뒤르는 동료들 몰래 혼자 수사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그 스스로도 마리아가 살해됐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는 그저 그녀가 자살한 이유가 알고 싶었다.

 

아이슬란드의 고독한 형사 에를렌뒤르.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과 고독과 자책감에 귀 기울이며, 넋두리 같은 원망을 듣는 일을 지겨운 시련으로 여기지 않는 형사. 기꺼이 사라진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수호천사가 되고자 하는 남자. 무려 삼십 년 전에 실종된 아들의 부모가 여전히 에를렌뒤르를 찾아온다. 아들 소식이 없나 해서 경찰서에 들른 것이다. 당시 경찰은 그들의 아들이 실종된 사건 관련하여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하지만 에를렌뒤르는 그 사건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에게는 그 어떤 사건도 과거의 그것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겨진 이들에게 그것은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자살한 여자의 남편과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앉아 대화를 주고받는 남자, 죽은 이들과 사라진 이들과 슬퍼하는 이들의 마음을 지극히 사적으로 받아들이는 남자, 그렇게 자신이 담당하는 사건 모두가 그에게 개인적인 상처와 슬픔이 된다.

"왜 이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형사 생활이 위태로워지지 않습니까?"

"이 사건은 손에 잡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이, 의심에 의심만 쌓인 사건입니다. 근거로 삼을 것이라곤 파편들뿐이죠. 제게는 단순한 연결 고리들이, 나중에 발생한 사건들을 잇는 일종의 배경이 필요합니다. 이야기 속 간극을 채워야 합니다. 그들의 재정적인 배경까지 포함해서 말이지요. 이런 부탁을 드리는 이유는..... 범죄행위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이런 부탁을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도 모르는 추악한 범죄를.... 요주의 인물이 저지르고..... 상황을 모면한 듯 보입니다. "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그렇게 시종일관, 아무런 단서도 없이 홀로 마리아의 삶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해 조사를 하는 에를렌뒤르 형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경찰이 수사가 아니라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조사하는 내용이 거의 책 내용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 죽게 되면 남겨진 이들은 자책한다. 내가 그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그때 내가 어떻게 했더라면 지금 뭐라도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에를렌뒤르가 수사를 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에 있다. 마리아의 친구와 주변인들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고통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그들에게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어 주기 위해서. 왜냐하면 이미 죽은 이는 그 어떤 대답도 들려줄 수 없으니까. 남겨진 이들은 답을 찾지 못하는 한, 영원히 그 죽음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말이다.

사실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은 직업인으로서 경찰이 겪는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경찰 조직을 스쳐 지나가는 배경 정도로만 남겨두고, 곧장 주인공 에를렌뒤르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다. 그렇게 경찰 수사의 디테일과 조직 내 구성원으로서의 고뇌 등을 덜어내는 과감한 선택을 통해, 주인공의 개인적 고통과 사적인 불행이 그의 직업과 어떤 식으로 연관을 맺는지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독특한 미스터리가 만들어진다. 살인과 죽음이 아니라, 사건 이후 남겨진 사람들에게 주목하는 경찰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평생을 상실감과 고통을 안고 견뎌야 하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심정에 공감하는 경찰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래서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는 특별하다. 이 시리즈가 계속 출간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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