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여우가 잠든 숲 세트 - 전2권 스토리콜렉터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박종대 옮김 / 북로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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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우누스 시리즈의 그 여덟 번째 이야기이다. 특히나 이 작품은 넬레 노이하우스가 시한부 선고를 이겨내고 2년 만에 발표하는 작품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게다가 타우누스 시리즈 중에 유일하게 두 권으로 출간되는 만큼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며, 이야기 역시 가장 큰 스케일과 재미를 주고 있다.

보덴슈타인은 실망스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온 세상이 거짓말과 허위로 가득했다. 전에는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였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정말 지쳤다. 집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창문 뒤로 헤롤트 부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일상과 비극의 틈새는 얼마나 좁은지! 만일 그의 예감이 적중해서 불탄 시신이 클라우스 헤롤트로 밝혀진다면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을 듯했다. 거기다 그의 아내가 받을 배신감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 된다면 지난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일상의 기억 위에 거짓의 그림자가 여생 동안 짙게 드리워질 것이다.

숲들로 둘러싸인 타우누스 언덕에 위치한 루퍼츠하인 마을, 인근의 숲속 캠핑장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한다. 불탄 캠핑카 안에서 불타버린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보덴슈타인과 피아는 그의 신원을 알아내기 위해 조사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요양원에서 시한부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던 할머니가 살해 당하고, 그녀를 최근에 만났던 마을의 신부까지 살해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대체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사건은 42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보덴슈타인의 과거와 연결되고,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한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어 버린다.

사실 보덴슈타인은 연말쯤 1년간 휴직을 할 생각이었다. 정의를 믿고, 규칙과 가치를 믿고, 선과 악을 믿었던 그였지만 지난 몇 년 사이 그가 생각하는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에 신물이 나 엄청난 무력감이 경찰직에 대한 거북함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보덴슈타인과 함께 수사를 해왔던 피아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예감하며 갑자기 혼자 내버려진 듯한 기분이 든다. 아마도 이번이 둘이 함께하는 마지막 사건이자, 진한 동료애의 마지막 합작품이 될 거라는 생각에 울고 싶은 심정 마저 들었던 그녀는, 사건의 방향이 보덴슈타인의 과거로 향하자 점점 그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사건 관련 인물들은 전부 그와 아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각자를 둘러싼 소문이나 비밀까지 알고 있는 사이였기에, 객관적으로 사건 맥락을 꿰뚫어보기도 어려워 보였고,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그들에게 점점 휘둘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언가 나쁜 기운이 거미줄처럼 마을 위에 펼쳐진 듯했다. 모든 비극이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여겨온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불신과 불안이 독처럼 스며들었다. 소문이 돌고 추측이 난무했다. 살인자가 이방인이라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곧 그들 중 하나,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범인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이 마을은 폭발 직전의 적대적인 분위기로 확 바뀌었다. 작은 불꽃 하나만 있어도 금방 폭발해버릴 듯했다.

사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보덴슈타인은 세월이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던 불쾌한 상황들을 연이어 떠올리게 된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거다. 선천적으로 외톨이였던 그는 패거리 안에서 편한 적이 없었고, 그들 중 몇몇은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집단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소심한 시도는 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고, 겨우 그런 상황에서 벗어난 것은 5학년 때 다른 학교로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시리즈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면서도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의 과거가 전면적으로 드러난 이번 작품은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더욱 비밀스럽고,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피아과 보덴슈타인이 사건의 흔적을 따라갈수록 42년 전의 과거가 점점 수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보덴슈타인의 나이가 쉰넷이니까, 당시는 열한 살, 아니 거의 열두 살이 다 돼 갈 즈음이었을 거다. 현재 사건의 중요한 키를 가지고 있는 실종된 소년은 그와 아는 사이였던 정도가 아니라 가장 친한 친구였다.

보덴슈타인은 형사 생활을 해나갈수록 초창기에 품었던 이상주의를 조금씩 잃어갔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세상에 더 많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이젠 그 믿음조차 흔들리고 있다. 정말 좋은 사람이 더 많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전혀 상관없어 보였다. 단지 자신과 자신 가족에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은 것을 기뻐할 뿐, 자신들이 속한 세계의 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뭔가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무언의 침묵과 마을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공포 앞에서 그들이 연쇄 살인을 멈추기 위해선, 42년 전 그날 숲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밝혀내야만 한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굉장히 많고, 그들 각각이 어떻게든 관계를 가지고 있어 사건을 풀어나가면서 연결되는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하는지에 대해 추리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무엇보다 보덴슈타인이라는 인물의 숨겨두었던 내면에 접근하는 이야기라 타우누스 시리즈의 오랜 팬으로서 매우 흥미진진했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자고로 미스터리는 두꺼워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기에, 두툼한 두 권짜리 분량도 너무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진실도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로 보이는 것조차 빈틈이 있을 경우, 또는 맥락을 도외시할 경우 전체 그림을 왜곡할 수 있다. 그래서, 사건의 바깥에서 객관적으로 전체 그림을 봐야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보덴슈타인은 절대 객관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없다는 데에 아이러니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의 특별함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말이다. 타우누스 시리즈는 단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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