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때 천사였다
카린 지에벨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사람은 언젠가 한번은 죽는다. 하지만 그 언젠가를 당장 몇 개월 뒤나, 며칠 뒤로 예상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비극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 여기며 자신은 늘 안전한 곳에,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믿고 있겠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이 완전 오산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삶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으니 말이다.

프랑수아는 아주 서서히 자신의 실존이 이제 종점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생에서 쌓아 올린 커리어나 재력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사생활을 돌보지 않으면서 커리어를 쌓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부질없는 짓이었을 뿐이다.

변호사 프랑수아는 조금이라도 계급 사다리의 상층부로 올라가기 위해 미친 듯 일만 하면서 살아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뇌종양을 앓고 있으며 수술도 불가능한 상황이며 항암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남은 시간이 몇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가난한 형편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며 뒷바라지 했는지 알기에, 성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오로지 일을 하느라 다 소비하며 살아 왔던 그였다. 당연히 부모님에게 자주 찾아 뵙지도 못했고, 돈이나 값비싼 물건들만 던지듯 드렸으며 마음을 다해 표현하지도 못했었다. 오로지 궁핍한 삶에서 벗어나야겠다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놓치거나 간과해버린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지만, 이제는 남은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냔 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마음 놓고 웃어본 게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라니, 그의 일상이 어땠을 지는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프랑수아는 병원을 나와 아내와 사무실 동료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리옹 인근에서 히치 하이킹을 하는 폴을 만나 어쩌다 보니 동행을 하게 된다. 스무 살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폴과 마흔 일곱의 죽음을 앞둔 프랑수아는, 얼핏 보면 부자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 모두 딱히 목적지가 없는 탓에 발길 닿는 대로 길을 다니고, 숙소를 잡아 쉬고, 다시 길을 떠난다. 그렇게 두 남자의 로드 무비처럼 흘러가던 이야기는 폴이 살인청부업자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급변하게 된다. 폴이 가지고 있는 마약 때문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하마터면 두 사람 모두 죽을 뻔한 고비도 넘기면서 프랑수아는 생애 처음으로 이상한 모험을 겪게 된다. 폴을 쫓는 패거리들을 당장 경찰에 신고하자고 하는 프랑수아, 절대 경찰은 믿을 수 없다며 그들에게서 훔친 마약을 몰래 팔아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폴. 그들 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도, 가치관도 극과 극이다. 폴은 이번 한 건만 제대로 마무리되면 이 바닥에서 완전히 손을 씻겠다고 하지만 글쎄, 그 전에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아 보이니 말이다.

현재란 곧 죽음이다. 플로랑스는 죽었고, 그도 곧 죽으리라. 요즘은 밤마다 죽음을 상대로 싸우다가 현기증 나는 추락을 맛보곤 한다. 마지막 여행길에 나선 그에게 표지판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라고는 애송이 녀석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주 중인 녀석이다. 아무리 도망쳐도 그는 결국 죽음을 맞아야 할 테지만 녀석은 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카린 지에벨은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꽤 많은 작가이다. <빅 마운틴 스캔들>, <그림자>, <너는 모른다>, <마리오네트의 고백> 등 기존에 만나왔던 작품들은 심리 스릴러의 귀재라 불리는 그녀 답게 꽤나 두툼한 분량을 자랑했다. 그런데 이번 작품 <그는 한때 천사였다>는 우선 분량부터 많이 차이가 날 정도로 작아졌다. 그리고 전개방식과 분위기도 매우 달라졌다. 기존 작품들이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 패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해서 인물의 심리 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스릴러였던 반면에, 이번 작품은 평범한 두 인물의 로드 무비 형식으로 진행되어 매우 빠른 전개가 돋보인다. 사실 기존 작품들에선 다소 지루한 부분들도 어느 정도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군더더기 없이 마치 영화라도 보는 것처럼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나가는 플롯이라 제대로 페이지 터너로서의 면목을 뽐내고 있다.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 약간 기욤 뮈소의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지루한 건 딱 질색이라 기존 작품 보다는 이번 작품에 한 표를 던져주고 싶다.

 극중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프랑수아의 삶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그는 짧은 시간 동안 아들처럼 함께 지내온 폴이 꼭 살아야 한다고,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런 말을 한다. 사탄도 원래는 천사였다고. 신이 인간들에게 부정적인 에너지로 시험에 들게 하고 저항하는 법을 알려주려는 의도로 사탄을 보낸 건데, 사탄인 루시퍼는 인간에게 부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어주다 보니 그 자신이 죄에 물들게 되었던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신은 이미 사탄을 용서했고, 사탄도 다시 천사가 될 거라고. 폴이 어린 두 동생들을 고아원에 보내고 앵벌이, 날치기, 도둑질 등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다가 마피아 조직의 킬러가 되어 결국 그들이 시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불법적인 일을 하게 된 것이 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불행한 삶을 살아오며 암흑가를 전전해온 것을 마냥 개인의 부도덕이라고만 치부하지 않고, 비정한 사회시스템에서 찾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성서의 사탄과 타락한 천사로 연결되어 한 편의 근사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 그녀의 다음 작품은 또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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