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에게 - 정호승 시선집
정호승 지음, 박항률 그림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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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 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으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 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너무도 유명하신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이 책에 실린 시들 거의 대부분이 절절한 사랑을 그리고 있는데, 이제 내가 나이를 조금 더 먹어서 인지 사랑보다는 인생을 말하는 시에 더 마음이 움직인다.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라는 시를 읽는데 뭐랄까, 괜시리 마음이 짠해진다고 할까.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더라도 '첫아기에게 첫 젖을 물린 날'을 떠올린다면 견디지 못할 일이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가 아니라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마음 먹는다면, 그 긍정으로 현명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래로 내려갈 수 있고, 시선을 낮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상대보다 우위에만 있으려고 하거나,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그 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하면 빠져나올 수가 없는 법이니 말이다. 마음을 낮추고,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세상이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라는 생각은 안 들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랴. 마음을 비우고, 겸손해지는 것은 나이를 한 살 더 먹어도 점점 더 어렵게만 느껴진다.

이 책은 정호승 시인이 지난 42년간 발표한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 받은 시들을 모았다. 그의 대표작 101편에 명상성을 모티브로 박항률 화백의 그림 50점이 더해져 시를 읽는 기분만큼이나 보는 마음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지난 2005년 출간된 시선집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의 개정판이지만, 그 후 출간된 그의 신작 시 32편이 새롭게 실려 있으므로 기존 시집을 읽었던 이들이라도 다시 읽어볼 만한 책이다.

내가 좀더 어릴 때, 그러니까 한참 사랑에 빠져 있을 때나 혹은 실연으로 우울할 때 정호승 시인의 시를 참 많이 읽었었다. 워낙 사랑에 관해서는 독보적인 시인이라, 평소에 시를 즐겨 읽는 사람이 아니라도 그럴 때는 일부러 찾아 보게 되곤 한다고 다들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미있는 건 몇 년 전에 즐겨 읽었던 시도 있고, 이번에 처음 만나는 시도 있는데 사랑에 관한 격정적이고, 절절한 그 언어들이 지금에 와서 보니 당시의 그 감동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 내가 사랑에 눈이 멀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마음이 이랬었구나. 싶을 만큼 이해가 가기도 하고, 과거의 나를 현재의 나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고 할까.

마음에 집이 없으면

마당도 없고 꽃밭도 없지

꽃밭이 없으니 마음속에 그 언제 무슨 꽃이 피었겠니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집이 없으면> 이라는 시를 읽는데 그냥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살면서 느끼는 것 중에 바로 '마음에 집을 짓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제는 너무 잘 알기 때문 일 것이다. 마음에 집이 있어야 사랑하는 사람의 부족함도 포옹해줄 수 있고, 마음에 집이 있어야 외로울 때 덜 추울 것이고, 마음에 집이 있어야 힘을 때 쉴 수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참 어려운 것이 바로 마음 속에 집을 짓는 일이다.

나도 이제는 혼자 밥 먹지 않아도 되고, 혼자 울지 않아도 되며, 이제는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호승 시인의 시들은 여전히 가슴을 울린다. 언어로 빚어내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아름답고, 먹먹하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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