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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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이런 식으로 산을 즐기는구나."

기무라 씨가 진지하게 말했다.

"기무라 씨도 이제부터예요. 음식에 집중해도 좋고, 꽃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좋고, 등산 일기를 쓰는 것도 좋고. 그림이나 카메라, 즐길 수 있는 요소는 무한히 있어요. , 좋지요?"   p.124

미나토 가나에가 산을 배경으로 소설을 쓴다고 하면 누구나 미스터리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누군가 다치고, 죽고, 속이고, 배신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가 달라졌다. 누가 다치기보다는 치유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은 국내에 꽤 많이 출간되어 있고, 나도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읽었기에 그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책은 그러한 편견을 완전히 깨버리는 작품이었다. 미나토 가나에와 힐링이라는 단어를 연결시킬 수 있다니 놀랍기 그지 없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이별의 슬픔, 사랑의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 떨칠 수 없는 열등감 등 다양한 고민을 안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오르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모처럼 특유의 독기를 뺀 채 평소 취미인 등산을 소재로아무도 죽지 않는 소설을 그려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일본 NHK TV에서 두 시즌에 걸쳐 드라마화되어 영상으로도 사랑 받았다고 하는데, 각각의 에피소드가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연작 형식이라 드라마로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산은 생각을 하기에 딱 좋다. 동행이 있어도 말없이 한 줄로 걷고 있으면 자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 마음속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자기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으면 인생도 자기 발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일상생활에서는 외면하던 문제와 똑바로 마주 봐야 할 듯한 느낌이 든다. 이 발로 정상에 도착하면 가슴속에도 빛이 비쳐드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가 가는 길을 격려해준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과 마주 보면서 걷는 것이 등산이라 생각했다.   p.361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리쓰코는 입사 동기 친구들과 함께 첫 등산을 가기로 한다. 등산을 계획하게 된 이유는 바로 아웃도어 행사에서 등산화에 한 눈에 반했기 때문이다. 모처럼 좋은 신발을 샀으니 산에 한번 올라가볼까 싶어서 시작한 등산이었던 거다. 하지만 당일에 친구 한 명이 컨디션을 이유로 불참하고, 다소 어색한 관계인 친구와 둘이 산 정상을 향하게 되는데.. 안 그래도 결혼을 앞두고 고민이 많은 리쓰코는 무사히 등산을 마칠 수 있을까. 그 외에도 단체 미팅에서 만난 수수한 분위기의 남성과 등산에 나서게 된 화려한 사십 대 여성의 이야기도 있고, 아버지 덕에 세 살부터 등산을 시작했지만 어째서인지 정상에는 한 번도 오르지 못했던 여성의 이야기, 독신에 변변찮은 번역 일을 하며 아버지의 농사를 돕고 있는 서른다섯 유미가 잘 나가는 의사 남편을 둔 잔소리꾼 언니와 등산을 가게 되는 이야기 등등.. 저마다의 고민과 사정이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바위투성이의 길을 다 올라가면 단숨에 시야가 탁 트이고, 배낭을 내려놓고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손이 닿을 것만 같다. 선명한 녹색 습원을 지나고, 낯선 식물들과 알록달록한 꽃들도 지나치며 크게 심호흡을 한다. 공기를 배 속 가득 들이쉬면, 스트레스와 불만과 짜증이 쌓인 시커먼 뱃속이 아주 조금은 깨끗해지는 느낌이 드는, 바로 그런 것이 등산이다. 페이지 가득 싱그러움과 맑음이 가득한 느낌이랄까. 산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상큼한 기운이 이야기 속에도 가득해 책을 읽는 내내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이라는 걸 모르고 읽었다면 전혀 그녀의 작품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녀의 작품이 너무 독하고 어두워서 힘들었던 이들에게도, 혹은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도 색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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