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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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불우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사람들이 응원은 해도 자기 손을 내밀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나오키가 잘살기를 바라긴 하지만 관계를 맺고 싶진 않은 것이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좋을 텐데. 이게 그들의 진심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수염 난 에스닉 요리점 점장한테 가진 고마움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p.200

츠요시와 나오키는 서로에게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형제가 어린 시절 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 혼자 파트타임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그들을 키웠지만 어머니마저 과로로 돌아가셨다. 형인 츠요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 역할을 대신해 동생을 먹여 살리고, 대학까지 보내는 것을 자신의 의무처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허리와 무릎이 좋지 않아 두 달 전에 이삿짐센터 일을 그만두게 되고 보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동생이 대학 진학을 거의 포기하고 몰래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나오키가 걱정 없이 대학에 진학할 마음을 먹게 할 돈이 필요했다. 물론 가난하다고 해서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오래 전 이사 일을 해주었던 혼자 사는 부유한 할머니네 집에 도둑질을 하러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들키는 바람에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곧 체포되고 만다.

이제 나오키는 홀로 살아가야 했다. 대학은 당연히 포기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보려고 하지만 만만치가 않다. 이유는 어딜 가나 따라다니는 형이 살인강도범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츠요시에게 편지가 온 것은 졸업식을 이틀 앞두고,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편지지와 봉투 구석에 벚꽃 모양을 한 파란 검열 도장이 조그맣게 찍혀 있는 그 편지는 이후 계속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그가 답장을 하지 않아도, 이사를 가도 어김없이 낙인처럼 벚꽃 도장이 찍힌 편지가 배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형에 대한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학교에서는 그가 학업을 중단하고 떠나주길 바라고, 아르바이트 점장은 그의 존재를 불편해하며, 음악에 걸었던 청춘의 꿈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는 그를 내친다. 물론 그 편지에는 자신의 과오에 대한 뉘우침과 피해자에 대한 속죄, 나오키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나오키는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버렸는지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차별은 당연한 거야.” 히라노 사장이 조용히 말했다.

나오키는 눈을 크게 떴다. 차별은 나쁘다는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고요?”

사장이 말했다. “당연하지. 사람들은 대부분 범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하네. 사소한 관계 때문에 이상한 일에 말려들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따라서 범죄자나 범죄자에 가까운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행윌세. 자기방어 본능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럼 저처럼 가족 중에 범죄자가 있는 놈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p.360

240만 독자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국내에서 출간된 지 약 10년 만에 리커버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두 번의 뮤지컬화, 연극화가 되었으며 최근에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범죄자 가족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로, 미스터리나 범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 아니라 범죄가 벌어진 후 남겨진 이들의 삶에 주목하고 있다. 과연 살인자의 가족이 사회에서 차별을 받는 것이 편견인지 당연한 일인지, 범죄를 저지른 자의 속죄는 언제까지, 어디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극중 나오키가 근무하던 회사에서 형에 대한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었을 때, 사장이 그에게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차별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법에 따라 합당한 기준에 맞게 처벌을 받지만, 그 일로 인해 남겨진 가족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지금 나오키가 겪고 있는 고난까지도 형인 츠요시가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말이었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자신이 죄를 지으면 가족도 고통을 받게 된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은 범죄자의 가족 또한 피해자니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도덕적으로는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며 대하다 보니 역차별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차별이건 역차별이건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신경을 쓰는 일이 생기면 회사로서는 부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처우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장의 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남겨진 나오키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일까.

 

죄를 지어 끊임없이 편지로 속죄하는 살인자, 죄는 없지만 끊임없는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는 살인자의 동생과 그런 동생을 불편해하는 사람들. 사실 그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해자의 가족 입장에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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