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가 잠든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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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라.

가오루코와 얘기하는 중에도 그 말이 몇 번이나 나왔던가. 기적이 일어난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상관없다. 자신이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 라고. 하지만 그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허망함이 더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p.83

IT 기업 '하리마 테크'를 운영하는 가즈마사와 그의 아내 가오루코는 8년 전에 결혼했다. 하지만 1년 전 별거를 결정했고, 첫째 딸 미즈호와 둘째 아들 이쿠토는 엄마와 함께 지내고, 가즈마사는 집에서 나와 혼자 살고 있다. 그들은 가즈마사의 외도를 이유로 이혼에 합의했지만, 딸 미즈호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그때까지만 잠시 미루기로 했다. 어느 날 딸의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부모 면접에 참석하러 간 그들에게 미즈호가 수영장에서 물에 빠졌다는 연락이 온다. 의사는 미즈호가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으며 뇌에 상당히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사실상 뇌사 상태라고 말을 한다. 물론 치료는 계속하겠지만,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연명 조치에 불과하다고, 이런 경우 통상적으로 며칠 안에 심정지가 온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장기를 기증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가즈마사와 가오루코는 그 압도적인 슬픔에 절망스럽기만 하다. 딸이 죽는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장기 기증이라는 엄청난 선택까지 해야 하다니 뭔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우리가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가. 그 선택을 해야 하는 그 밤이, 그들 부부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밤이었다. 그리고 고심 끝에 미즈호라면 자신의 몸 일부나마 어디선가 고통을 겪고 있을 누군가를 돕고 싶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생각에 장기 기증을 결심한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여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고 미즈호의 손을 잡는데, 한 순간 그 손이 움찍한 것처럼 느껴진다. 미즈호의 손이 움직일 리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고 싶지 않다.

 

"우리 딸은, 살아 있어요.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장기 기증을 거부하고, 치료를 계속하기로 한다. 가오루코는 미즈호를 집에서 돌보겠다고 선언하고, 간병 교육을 받고, 남편과 이혼 결정도 번복하고 딸의 연명 치료에 들어간다.

 

 

"그런 일에 동조하는 거 말이야. 나도 장애가 있는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에 이 일을 하고 또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지만, 상대가 뇌사 환자라면 어떨지 모르겠어. 의식도 없고 회복할 가망도 전혀 없는 환자의 팔다리를 컴퓨터와 전기 신호로 움직이면 뭐 하겠어.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 것 같아."  p.190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가 데뷔 30주년 기념작으로 영화로도 제작되어 올해 국내 개봉이 예정되어 있다. 기존 그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범인도, 살인도, 추리 형식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도 흡입력 있게 전개되고 묵직한 뭔가를 던져주는 이야기이다. 딸의 뇌사라는 비극과 맞닥뜨린 부부의 충격적인 선택을 그린 휴먼 미스터리인데, 흔히 예상할 수 있는 플롯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는 점이 더욱 흥미진진했다.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기인 과학 소재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즈호의 아버지인 가즈마사가 운영하는 회사의 주력 분야는 바로 BMI, 브레인 머신 인터페이스이다. 뇌와 기계를 신호로 연결해 인간의 생활을 혁신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인공 눈, 로봇 팔 등 장애인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다.  아빠 입장에서 뭐라고 해보고 싶은 게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뇌나 경추가 손상되어 몸을 가눌 수 없는 환자로 하여금 뇌에서 보내는 신호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기술을 자신의 딸에게 적용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기술의 개발자가 집으로 가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점차 딸을 향한 가오루코의 집착을 불러오게 된다.

겉모습만 보면 그저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전히 아름답기만 한 딸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믿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먹먹해지는 작품이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넘어선 집착과 광기의 드라마가 놀랍고도 깊이 있게 펼쳐진다. 그리고 장기 이식을 둘러싼 도덕적, 법률적 문제와 의식 불명의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의 가족의 선택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사회파 작가로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작품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어 더욱삶과 죽음, 사랑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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