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나 읽을걸 - 고전 속에 박제된 그녀들과 너무나 주관적인 수다를 떠는 시간
유즈키 아사코 지음, 박제이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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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깊숙이 스르륵 스며드는 문장, 인간의 본질을 찌른다기보다는 싹둑 잘라내는 것만 같은 노련함. 무코다 구니코의 글을 읽고 나면 왠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포근함이 밀려든다. 드라마도 물론 훌륭하지만 그녀의 단편소설은 활자를 음미하는 즐거움을 응축해놓은 듯한 ''이 있다. <옆집 여자>는 내가 몹시도 좋아하는 구도, '전혀 딴판인 두 여성'을 그린 소설이다. 가슴속 설렘을 잊은 지 오래인 이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작품이다.    p.83

유즈키 아사코의 앗코짱 시리즈나 <서점의 다이아나>, <나일 퍼치의 여자들> 등을 재미있게 읽었었다.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그리고 여성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필력에 완전 반해서 읽는 내내 마치 연애를 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이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유즈키 아사코가 그려내는 여자들의 삶에 관해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이번에 만나게 된 신작은 고전 독서 에세이라고 해서 더 기대가 되었다. 그녀는 매체에서 에세이 연재 의뢰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어릴 적 즐겨보던 <세계명작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한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잘 모를 만큼 오래, 꾸준히, 날마다 같은 느낌으로 제목만큼은 누구라도 아는 고전 명작을 읽어나가는 연재를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어릴 적에 읽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읽기를 미루었지만 읽고 싶었던 세계 고전들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다시 읽어내며 글을 쓴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여타의 다른 독서 에세이, 고전 읽기에 관한 글과는 차별화된 부분은 바로 고전 속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에 주목하는 책 읽기라는 점일 것이다.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에밀 졸라의 <나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캐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등등 누구나 누구나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고전, 그 중에서도 여성 캐릭터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내가 서양 고전소설을 좋아하는 한 가지 이유는 등장인물의지나침때문이다. 화가 나면 상대방에게 장장 한 페이지에 걸쳐 할 말, 못 할 말 마구 퍼붓지 않나, 충격을 받으면 갑자기 기절해버리지 않나, 실연을 당하면 병으로 쓰러지지 않나, 하인에게 닥치는 대로 화풀이를 하지 않나, 욕심이나 증오 같은 감정을 몇 년이고 끈질기게 질질 끌지 않나.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수명도 훨씬 짧았고 오락이나 선택지가 적었던 시대라 감정만이 유일한 이정표니, 민폐를 끼치더라도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마음 가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p.218

유즈키 아사코는 고전 속 여성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학창 시절의 같은 반 친구 같다고 말한다. <위험한 관계<의 세실과 <보바리 부인>의 에마, 그리고 <여자의 일생>의 잔. 늘 가슴 한 켠에 걸려 있다가 문득 그녀들이 저지른 실수가 떠올라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때로는 그녀들의 결단에 용기도 얻는다고. 그들의 삶을 그리고 있는 문장들을 읽으며 그녀는 자신보다 오래 세상을 산 친구에게 잔혹한 진실을 들은 듯 명치끝이 묵직해진다고 한다. 여자들의 관계를 작품 속에서 많이 그려왔던 그녀는 사실 '여자들의 관계는 질척거려서 무섭다'라는 선입견과 맞서 싸운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 동안 여성 캐릭터 창조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온 작가라는 평가를 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누구보다 여주인공들에게 이야기하듯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작가라서, 그녀들의 장점도 단점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영미권, 유럽권 작품들과 더불어 일본 작가들의 작품도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다. 사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작품들 대부분은 전부 읽지는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 아는 작가의 작품인 경우가 많은데, 일본 작가들의 작품은 몰랐던 작품들도 있어 좋은 정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리요시 사와코의 <악녀에 대하여>, 다나베 세이코의 <대답은 내일>, 모리 마리의 <달콤한 꿀의 방>,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 등 국내에도 많이 소개되었던 작가들의 작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많아 고전 읽기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가 되어 줄 것 같다. 유즈키 아사코의 소설들이 그러했듯이, 이 작품 역시 고전 따위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친근하고, 쉽고, 공감되는 글들이 많았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사실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고전 작품 속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유즈키 아사코의 애틋하고 살뜰하며 다정한 고전 읽기를 통해 어느 새 당신도 고전 속 여주인공들이 친구처럼 느껴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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