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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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인생을 '태어났다, 살았다, 죽었다'로 요약할 수 없듯이 신문에 난 몇 줄의 기사만으로는 일의 내막을 알 수 없다. 사건 기록은 수십, 수백 배나 두껍다. 공판에서 직접 사람을 만나보면 기사의 행간으로 읽을 수 없는 구구한 사정과 복잡한 동기가 있어 몰래 울컥해지는 사건도 있는 법이다. 실제의 인생, 실제의 사건은 사건 기록보다 또 수십 배는 두꺼울 것이다. 그리고 법정에서 드러난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p.34

20대 초반의 남성이 열 살 가까이 연상인 여자친구와 함께 모텔에 투숙했다. 얼마 후 모텔 프런트에 여자가 사색이 되어 달려온다. 남자친구가 젤리를 먹다가 목에 걸려 숨을 못 쉰다고, 남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질식사로 사망한다. 남자의 가족들은 슬픔 속에 장례를 마치고 시신을 화장했는데, 사십구재를 앞둔 어느 날 한 장의 서류가 날아온다. 남자가 가입한 3억 원짜리 사망보험증서, 수익자는 엉뚱하게도 여자친구였다. 의혹을 느낀 남자의 가족은 수사를 요청했고, 검찰은 젤리가 목에 걸려 죽은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여자친구가 보험금을 노리고 남자친구의 숨을 틀어막아 죽였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살인죄로 구속기소되었다.

사건의 개요만 보더라도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들 것이다. 이 사건은 언론을 통해서도 숱한 보도가 되었던 실제 사건인 '산낙지 살인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도진기 작가는 당시의 재판을 비난하거나 누구를 규탄하거나 현실의 결론을 바꾸려는 의도로 작품을 쓴 것이 아니므로, 소재도젤리로 바꾸었고, 당사자들의 성별도 바꾸었다고 말한다. 독자들이 그 사건과 이 작품의 사건을 동일시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사건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허구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건에서도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고, 1심에서는 살인죄를 인정해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항소심에서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시신을 부검하지 않고 화장했으므로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어렵다는 이유였는데, 사실 법을 잘 모르는 일반인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이 사건은 재판부의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그래서 더 이 작품이 궁금했다. 대체 이 사건의 배경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으며, 또한 법은 왜 이런 판결을 내렸는지 말이다.

 

형사재판에서 유죄로 하려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 필요하다. 민사재판은 두 사람이 싸우는 일이기에 한쪽이 상대방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증거를 갖고 있기만 하면 이긴다. 거칠게 말하면 51퍼센트의 증거로도 승소한다. 하지만 형사재판은 한 인간을 감방에 보낼까, 말까, 심지어는 교수대로 보낼까, 말까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 정도 증거로는 턱도 없다. 합리적인 선에서의 '의심'이 전혀 없는 수준까지 입증되어야 한다. 이것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 원칙이며, 형사재판에서 유죄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p.131

이 사건의 경우 피고는 이미 다수의 범죄전력이 있는 신용불량자였고, 빚 독촉을 받던 중 보험금을 타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 분명해 보인다. 목격자도 없고, 영상 기록도 없고, 피고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증거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증거를 떠나서라도, 보험수익자를 변경한 후 일주일 만에 20대 초반의 건강한 남자가 사고사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과연 직접적인 증거보다 범죄를 입증할 힘이 적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합리적 의심'이 무슨 뜻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이란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을 따른다는 원칙에 근거,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합리적 의심이 존재한다면 판사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 때문에 살인자를 그대로 사회로 내보내도 되는 것일까.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보험금을 노리고 계획살인을 한 게 분명한 정황이 가득한데, 법적으로는 유죄 심판에 필요한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죄로 판결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 작품은 20여 년의 판사 생활을 끝내고 변호사가 된 작가 도진기가 처음으로 쓴 본격 법정물이다. 기존에 발표했던 그의 작품들이 추리소설, 미스터리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이 작품에서는 의외의 범인이나 트릭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굉장히 흥미롭게 읽힌다. 거대한 사법 시스템과 법적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쓰인데다 피고인과 수사기관, 법원이 날 선 공방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직 부장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법은 정의를 위한 것이 아니며, 판사 역시 정의의 수호자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서고자 했던 인간적인 판사의 고뇌와 행동 덕분에 억울하고, 화가 나는 현실의 피해자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은 '정의'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은 '법치'에 불과하고, 그 법치는 공정한 결론보다 공정한 절차를 추구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나쁜 놈은 충분히 처벌되지 않고, 손해배상은 늘 부족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판사도 있다는 사실이 조금의 희망처럼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물론 이 작품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이고, 주인공 역시 '가상의 인물'이지만, 어쩐지 나는 도진기 작가가 부장판사로 재직 당시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도진기 작가가 앞으로도 이런 작품을 더 많이 써주길, 독자로서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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