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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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썩썩썩 비는 소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수화기를 힘없이 놓았다. 그리고 한숨지었다.

나는 왜 낭만을 찾는답시고 간직하고 있는 낭만이나마 하나하나 조각 내려 드는 것일까? 이 낭만이 귀한 시대에.   p.71

나는 장미여대 시절 장미의 여왕으로 뽑힌 적이 있을 만큼 용모가 뛰어난 재원이었다. 당연히 따르는 총각들도 많았었고, 그들 중 지금의 남편을 선택해서 풍파 없이 살아왔다. 후회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간사해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세월이 꽤 흐른 어느 날, 나는 그 시절 열렬한 추종자 중에 화가 지망생의 이름을 화랑에서 발견한다. 하게 된다. 마음만 먹었다면 나는 그의 아내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가난한 화가를 남편감으로 생각하기엔 너무나 상식적인 보통 여자였다. 그랬던 그가 화가로서 대성을 해서 꿈을 이룬 모습을 보니, 감동인지 질투인지 모를 착잡한 감정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래서 화랑으로 들어가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신만만하고 편안한 얼굴로 담소를 즐기고 있는 그에게 차마 다가가지 못한다. 음식 테이블로 가서 이것 저것 배불리 먹고는, 흘금흘금 곁눈질을 해가며 가족들에게 줄 먹을 거리들을 주머니와 핸드백에 넣고는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온다.

화랑에 가서는 그림을 한 점도 보지 않고, 포식만 하고 나온 나의 일상은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이 작품은 '마른 꽃잎의 추억'이라는 타이틀로 네 편이나 시리즈로 연재되었던 이야기이다. 화랑을 나온 뒤 그녀는 오래 전 자신을 열렬하게 추종하던 총각들을 찾아 보기로 한다. 고생고생해서 내 집을 장만하고 나니 여유는 있어졌지만, 설렘은 고사하고 몸과 마음이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공허했던 것이다. 과연 그들은 현재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낭만적인 이 스토리는 뻔할 것 같지만 상투적이지 않았고, 큭큭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유쾌한 기분으로 이어지다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된다. 이 작품을 비롯해서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모두 소소한 우리네 이웃의 일상들을 그리고 있는데, 하나같이 재미있었고, 공감되었고, 흥미로웠고, 뭉클했다. 정말 오랜 만에 만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게다가  실제로 수십 년 전에 쓰여진 이야기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다시'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런 부부 싸움은 엿듣기가 잘못이다. 곧 우리 집으로 옮아 붙는다. 옮아 붙은 싸움은 옆집과 똑같은 경위를 밟는다.

이 아파트에 사는 남자란 남자는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머저리인지. 태어나길 그렇게 머저리로 태어났을 리도 없고 암만해도 이 아파트의 터가 센가 보다.   p.157

() 박완서 작가가 처음이자 유일하게 펴낸 짧은 소설집으로 70년대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한 48편의 짧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오래 전에 나왔던 책인데, 이번에 박완서 작가의 8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소설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들려주는 짧은 소설집 <멜랑콜리 해피엔딩>과 함께 예쁜 옷으로 갈아 입고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당시 문예지나 교양지가 아니라 대기업 사보에 실렸던 콩트이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물론 70년대의 산물이기에 그 수십 년의 세월에서 오는 세대 차이라던가, 삶의 풍경들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맛깔나는 표현과 유머, 기막힌 위트들로 인해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는 우리네 인생의 모습들로 느껴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작가는 '70년대에 썼다는 걸 누구나 알아주기 바란 것은, 바늘 구멍으로 내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적어도 이삼십 년은 앞을 내다보았다고 으스대고 싶은 치기 때문이라는 걸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70년대의 개발과 발전을 외치던 당시 사회상과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을 알지 못하는 나 같은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타임슬립이라도 한 듯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집의 풍경은 다른 듯하면서도 모두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가 잃어 버린, 혹은 잊어 버리고 사는 그 시절에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이야기들이 모두 따뜻하고, 애틋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박완서 선생님은 어떤 시시한 일상적 소재로도 삶의 진수를 뽑은 이야기의 진수성찬을 차려낸다는 권지예 작가의 말처럼, 그야말로 탁월한 이야기꾼다운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그리고 이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이 언제까지고 읽힐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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