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왔구나
무레 요코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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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니 이 순간 남편은 엔도다. 한 시간 후에도 그가 엔도일지는 친정엄마밖에 모른다. 마도카는 엄마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이제 안심하고 자도 돼. 내일은 센터에 가는 날이잖아."

", 그러네. 잘 자."

이제껏 거쳐온 다양한 나이의 엄마가 마치 다중인격처럼 몸 속에 함께 살고 있다. 그것들이 돌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p. 95

아빠가 돌아가시고, 간단히 유산 분배를 마친 후 엄마가 느닷없이 사라져 버렸다. 며칠 뒤 연락 온 엄마는 다섯 살 연하인 남자와 살기로 했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당시 스물여덟인 사치와 열여덟의 동생 루리는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엄마도 쉰다섯의 어엿한 어른인데다 자식이라고 해서 엄마의 행동을 제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루리는 스물 여섯에 결혼해 쌍둥이 남매를 낳았고, 사치는 독신으로, 각자 십수 년간의 생활을 영위했다. 이제 마흔 다섯이 된 사치에게 갑작스럽게 엄마가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일흔 살이 된 엄마는 치매에 걸린 상태였고, 아마도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의 상태가 이리 되니 귀찮아져서 내쫓은 것처럼 보였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치매 진단을 받은 늙은 엄마 앞에서 독신여성 사치와 두 아이를 키우는 전업주부 루리는 고민에 빠진다. 누가 모시고 살아야 하는지부터, 그런 엄마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 뒷바라지를 하며 살고 있는 전업주부 마리는 오랜 만에 참석한 동창생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줄곧 남의 뒤치다꺼리만 하다 일생이 끝날 수도 있다는 말에 평소 생활을 돌아본다. 하지만 현실은 외출했다 돌아와도 아무도 저녁식사 준비를 도우려 하지 않으니 혼자 부엌에 틀어박혀 식사를 만드는 신세다. 주부에게 요리란 좋아서 한다기보다는 거의 의지로 하는 것이니 말이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패턴의 일상, 그런데 다음날 시아버지가 조금 이상하다. 뭔가를 찾는 듯 집안을 어지르기 시작하더니, 끼니를 먹어놓고도 기억하지 못하고 밥은 언제 먹냐고 물으시는 거다. 마리는 분명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상의하지만, 현실을 회피하려는 남편의 반응은 무심하기만 하다. 마리는 개호 인정 접수를 하고 도움을 받고 싶지만, 남편은 줄곧 교직에 있었던 아버지가 치매라는 소리를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매일 그런 시아버지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마리였으니, 그녀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

 

 

뒤죽박죽 불가사의하게 이어지는 이모들의 대화. 서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대화가 이뤄진다는 사실이 어떤 기적처럼,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선문답처럼 느껴졌다. 이모들의 발상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듣다 보면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진지하게 두 사람의 앞날을 생각하면 불안은 점점 커져간다.

", 어떻게 하라는 거야!"

마쓰미는 큰 소리로 외치며 전속력을 다해 긴 언덕길을 내려갔다.  p.198

무레 요코는 이 책에서 노인성 치매에 걸리거나 신체적, 정서적으로 쇠약해진 부모를 받아들이게 되는 자식들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여덟 편의 이야기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젊은 남자와 다시 시작하겠다며 집을 나간 엄마가 치매에 걸린 상태로 돌아오고, 남편은 모른 척하는 시아버지의 치매 증상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며느리가 등장하고, 혼자 사는 엄마가 치매 진단을 받아 함께 살기로 하지만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증상은 점점 심해가고, 34년간 어머니를 모셔온 큰형 부부가 이제 더 이상 어머니를 모시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남편도 자녀도 없는 이모들이 치매에 걸려 간병을 하는 조카의 고민도 있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어 가지만, 치매란 것이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어느 날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자식들은 당혹스럽기 마련이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에게는 부모님이 아닌 새롭게 만들어진 가족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자식과 내가 챙겨야 할 아내 혹은 남편이 있고, 회사 업무도 있을 테고 그 밖에 각자의 사정에 따라 책임지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노년의 부모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은 사실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다. '자식 다 키워서 이제 한숨 돌리나 했더니, 앞으론 부모를 돌봐야 해.'라는 극중 대사처럼, 나름대로 사회에서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가정에서 내 자식의 부모 역할을 매일같이 충실하게 하며 살아온 우리이다. 그래서 치매를 피하지 못한 노년의 부모들에 대한 문제는 누구에게나 참 어렵다.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혹은 이제 나도 늙었구나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란 살면서 여럿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와닿는 건 늙어버린 부모님을 마주하게 될 때가 아닐까 싶다. 우리 아빠 등이 생각보다 넓지 않았구나, 우리 엄마 음식 맛도 이제 예전 같지 않구나.. 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란 생각보다 서글프다. 이제는 아빠, 엄마의 어린 딸이 아니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 낯설고, 뭘 해도 전과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부모의 모습에 슬프기도 하고 말이다. 이 책에 실린 여덟 가지 이야기들 속에서 세월의 흐름과 함께 노쇠해지고, 이상행동을 보이는 부모들 앞에서 대처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부모를 집으로 모셔와 보살피거나, 간병 계획을 세우려는 자식도 있고, 자식들 각자 눈치만 보다 결국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으며, 갑작스러운 부모의 이상행동이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병원 진단을 미루는 자식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충분히 있을 법한, 나라도 그럴 수 있을 법한 에피소드들이라 제각각의 모습들 속에서 작은 공감과 위안을 얻어도 좋을 것 같다. 이러한 문제는 당신에게 지금 찾아온 현재일 수도, 아니면 곧 닥쳐올 미래일 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치매와 간병이라는 주제를 생각하자면 너무 답답하고, 슬플 것만 같지만, 무레 요코는 무겁지 않게, 유쾌하게 웃음 지을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 나가고 있다. 분명 현실이 그렇게 담백하고, 명쾌하게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따뜻함과 온기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이제는 나와 내 부모가 함께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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